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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October, 2024

2024.10.29 (화) 갈5: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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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9 (화) 갈5:13-26 복음을 믿음으로 자유를 얻는 성도들은 율법을 무시해도 될까? 갈라디아서의 마지막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성도는 ‘자유’를 지키고 종이 되지 않는 것이다. 1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강조했다. 역설적으로, 자유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노릇이다. 율법에서 벗어나 사랑의 종이 되는 것이다(13-14). 유대인들처럼 율법의 규정들을 놓고 따지지 말고, 서로 진심으로 사랑함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육체의 소욕에 대해 싸우며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함을 가르친다(16-17). 성령은 우리로 예수님처럼 살도록 이끄신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말씀에 나타난 주의 뜻을 분별하며, 실수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삶을 택해야 한다. 2 성령을 따르지 않는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 바울은 육체의 일로 여러 죄악을 열거하고, 이어 성령의 9 가지 열매를 열거함으로써 육체의 일과 대조하여 성령의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한다(22-23). 정욕과 탐심이 동기가 된 행위는 악하고, 이미 성도는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한다(24). 성도가 할례와 율법을 따르게 되면 오히려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고, 결국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게 될 것이다(25-26). 복음으로 자유케 된 성도는 모든 억압과 얽매임을 벗어 버렸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은 모두가 형제 자매들이며, 그 안에는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 주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자유인의 삶을 주셨으니,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매일같이 닮아가게 하소서!

2024.10.28 (월) 갈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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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월) 갈5:1-12 앞서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이방인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약속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방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1 할례를 받는 것은 곧 율법 전체를 행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겠다는 다짐이고, 믿음의 효력을 부정하는 태도나 다를 바 없다(2, 4). 갈라디아 성도들이 유대인 교사들에게 미혹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영적 열등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세속적이고 헛된 가치관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모두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다. 2 그리스도 예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에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고 오직 사랑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만이 의미가 있음을 바울은 선언한다(6). 그래서 그는 아무리 작은 죄나 거짓도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전체를 오염시킬 위험이 있음을 상기시킨다(9). 우리가 바라봐야 할 푯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또 주께서 주신 복음 뿐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거짓에 휩쓸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7-8). 3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았다. 만약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전했다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참된 진리인 ‘십자가의 걸림돌’이 사라진다(11). 바울인 이 십자가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길을 걸었고,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도 믿음의 길을 걸으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향해 ‘차라리 스스로를 거세해 버려라’는 말로 논쟁을 마무리한다. 이처럼 거짓에 대해 강력한 적개심을 표현하며,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복음을 따르도록 촉구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시는 주님,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

2024.10.26 (토) 갈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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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 (토) 갈4:12-20 복음에 대한 논리적 설명은 마쳤지만,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에 빠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는 논리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함을 바울은 알았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논조와는 달리 그들과의 친분 관계에 근거해 설득하지 시작한다. 1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갈라디아 성도들도 유대인이 되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권면한다(12). 바울이 갈라디아에 처음 갔을 때 몸이 아팠다. 당시 사람들은 병에 걸린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를 영접하듯 바울을 영접했고, 바울을 진정으로 사랑했다(14-15). 이들은 바울의 외모를 보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바울의 참된 말에 집중했고, 초라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했다. 그런데 지금은 참된 말을 하는 바울을 멀리하고, 할례와 율법, 즉 인간의 겉모습을 중시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은 의아해한다. 사람의 외모, 학벌, 집안, 기타 외적 요사를 보고 지도자를 택하거나 그 말을 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선 안 된다. 2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은 진리가 아니라 성도들이 자신들에게 ‘열심을 내도록’, 즉 인기를 얻으려고 열정적으로 일하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교인들을 갈라놓고, 바울을 공격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진리를 위하 열정은 유익하지만(18), 자기 세력을 늘리려는 열정은 경계해야 한다. 바울은 이미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고 떠난 상태였지만, 상황이 어린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바울은 ‘내 음성을 바꾸었으면 좋겠다(언성을 높여야겠다)’는 말로 이어지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병에 걸려 연약한 모습으로 다가가서, 진리를 전할 때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졌다. 성도는 어떤 지도자를 따르고 사랑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 준다. 주님, 우리모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꾼으로 성장되게 하소서!...

2024.10.25 (금) 갈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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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5 (금) 갈4:1-11 바울은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음을 천명했고, 이제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부연하기 시작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 외에는 없다. 1 당시 로마에서 ‘초등교사’는 미성년 자녀들을 가르치는 훈육의 책임을 맡았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영적으로 ‘초등교사’의 역할을 하던 율법 아래 있었다(1-3; 3:24). 하나님은 믿는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 조차도 상속자로 세우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고 믿게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믿는 자들의 마음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의 권세를 주셨다. 2 이방인들은 율법의 훈육을 받지 않았지만 복음을 듣고 믿을 때 하나님의 참 아들이신 예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가 된 것이다(6-7).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에서 종과 다름없이 사는 동안,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고 양자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완전한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이전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주님,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 생명을 이어 가게 하셨으니, 아버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데 쓰임 받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4.10.24 (목) 갈3: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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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목) 갈3:19-29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은 죄인에 불과함을 바울 사도는 논증하고 있다. 1 인간의 범법 때문에 주어진 율법은 약속의 씨,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필요한 것이다(19). 율법은 약속과 모순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는 사람을 살리거나 의롭게 할 수 없다. 율법은 사람들이 스스로 죄 아래 있음을 알려 줌으로 예수님을 믿게 한다. 율법 아래서 볼 때 유대인들은 어떤 법을 어겼는지 아는 죄수이고, 이방인은 모르는 죄수일 뿐이다. 2 바울은 ‘우리’ 즉 유대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전에는 오히려 율법 아래 ‘갇혔다’고 말한다. 당시 어린이의 가정교사와 보모 역할을 했던 선생에 비유된다. 따라서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구원받기에 더 유리한 환경에 있었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어렸을 때 선생에게서 훈육을 받았느냐, 안 받았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전에 율법을 알았느냐, 몰랐느냐는 중요치 않다. 믿음을 가진 후에는 더 이상 율법의 영향력 아래 있을 필요가 없다(25). 모든 성도는 과거 환경이 어떠했든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3믿음을 통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세례를 받으면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의 상속자가 된다(27, 29). 이것이 복음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사람에 대한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주님,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임을 기억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서로 사랑으로 품고 섬기는 주께서 기뻐하실 교회로 계속 성장하게 하소서!

2024.10.23 (수) 갈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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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3 (수) 갈3:10-18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복음의 핵심을 논증한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하는 자들은 오히려 저주 아래 있다.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보시고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다. 1 율법은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곤 선언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율법을 모두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10; 신27:26).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빠짐없이 행하는 방법밖에 없으니, 실제로는 모두가 율법의 저주를 당하게 된다. 율법주의자들이 자신들도 율법 안에 살지 못하면서 이방인(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강요하면 자기들처럼 저주를 당하리라고 가르친 셈이다.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홀로 받으심으로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죄를 속량하지 않으셨다면, 유대인들 역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13; 신21:23).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기에, 이제 이방인들은 율법을 따를 필요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에 들어가게 되었다(14). 2 유대인들이 할례와 율법을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 언약 백성의 표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 인간 사이의 계약도 폐하거나 더할 수 없듯이 하나님과의 언약 역시 그러함을 가르친다(15).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당사자가 그의 여러 자손이 아니라 그리스도 한 분이란 사실을 바울은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 ‘자손’을 의미하는 ‘씨’라는 단어는 모두 단수로 되어 있다 (16a; 창13:15-16; 15:4-6; 22:17-18; 24:7).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이 단어를 단수로 쓰신 이유는 그리스도에 의해 많은 영적 자손이 나타날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16b). 아브라함의 언약의 시작은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이미 언약을 맺었던 것이다. 구...

2024.10.22 (화)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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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2 (화) 3:1-9 신앙 문제는 생명이 문제이며,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검증되지 않은 가르침을 섣부르게 받아들였다고 꾸짖으며, 왜 그 가르침이 거짓인가를 논증한다. 1 갈라디아 성도들은 어리석게 꾐에 넘어갔다.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했는데,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 믿음으로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다.(1-2).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괴로움도 기꺼이 감수했는데, 만약 율법과 할례가 구원의 필수요건이라면, 그 모든 고난과 수고가 다 헛된 셈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왜 성령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로 마치려 하고 있다고 질타하며, 바른 신앙을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죄나 거짓 가르침, 세상의 고통 등으로 신앙이 흔들리고 있는가? 주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행하셨던 일들을 떠 올려 보라.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심을 기억하자 2 성령을 통해 체험한 것뿐 아니라, 성경 또한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6; 롬4:1-13; 창15:6).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조건은 율법과 할례가 아니라 믿음이다(7).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8; 창12:2).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얻음을 성경은 증거한다(9). 체험되는 것은 말씀으로 확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든든한 뒷받침이다. 주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에 순종함으로 바른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2024.10.21 (월) 갈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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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월) 갈2:11-21 바울은 앞서 교회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자신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동등한 사명을 부여받았음을 확증했다. 우리는 바울이 왜 그토록 ‘오직 믿음’을 강조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바울은 자기가 베드로와 동등할 뿐 아니라 베드로도 따를 수밖에 없는 복음의 진리를 전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사건을 이야기한다(11). 베드로는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을 의식해 이방인들과 식사 교제 중에 자리를 피해 이방인들과 거리를 두는 사건이 생겼다. 바나바를 포함한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했다 (12-13). 이방인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베드로의 이 행동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것’으로 바울은 규정했다(14). 믿음을 따르지 않는 행동은 말씀과 대척점에 서게 된다. 2 베드로는 이미 전통적 유대인의 생활 방식을 따르지 않았고, 이방인과 함께 먹고 교제하는 것이 죄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신도 안 지키는 율법의 행위를 왜 이방인에게 요구하냐며,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으로 베드로를 책망했다(15-16). 겉으로 보이는 종교와 문화를 따름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 즉 진실하게 예수님을 따름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3 바울은 ‘율법의 정죄에 의해’ 죽었고,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다고 고백한다(19). 이는 자신의 유대인이란 정체성이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오히려 바울이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해 함께 죽었고,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삶을 완전히 뒤바꾼다는 의미이며, ‘오직 믿음’이라는 고백은 앞으로 예수님만 붙들고 살겠다는 결단이다. 주님, ‘오직 믿음’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바른 믿음 안에서 참된 신앙생활을 이어 가게 하소서!

2024.10.19 (토) 갈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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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9 (토) 갈1:11-24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시험이 오고 고난이 닥칠 때 흔들리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삶의 간증은 고난 속에서 우리를 굳세게 한다. 또한 각자가 경험한 삶의 변화만큼 확실한 전도의 증거도 없다. 1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직접 배웠다고 주장한다(11-12). 갈라디아교회에 있던 거짓 선생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니 사도가 아니고, 그의 말은 사도적 권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를 죽이기까지 한 사람이었고, 게다가 유대교에 대해 누구보다 열심인 사람이었음을 밝힌다. 예수님은 만나기 전 바울은 구원 얻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암울한 상태에 있었다. 2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택정하시고 그 은혜의 부르심임을 말하며, 그 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고 고백한다(15). 다만 하나님이 자기를 택해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시기로 섭리하신 것이다(16).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도 만나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다(17). 바울이 그러했듯이, 예수님을 만나면 삶은 완전히 바뀌고, 그 자체가 복음의 증거가 된다. 3 다메섹 도상 사건 이후 3년이 흘러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만났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도 만났지만 다른 사도들은 보지 못했고, 거기 머물렀던 기간은 단 15일에 불과했다(18-19). 사도들로부터 복음에 대해 배우지 않았지만, 사도들뿐만 아니라 시리아, 길리기아 성도들은 바울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복음을 알게 되었음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21-24). 사람에게서 복음을 듣거나 배우지 않은 바울이 정확한 복음을 알 뿐 아니라 열심히 전하는 자가 되었으니, 모든 것을 주께서 직접 행하셨다고 인정하며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만났느냐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존재...

2024.10.18(금) 갈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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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금) 갈1:1-10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후에 사람은 다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유대인’이란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고, 할례를 받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거짓 선생들이 있었다. 1 갈라디아는 지금의 튀르키예 남부 지역으로, 바나바와 함께 전도 여행을 다녔던 곳이다 (행13:14-14:26).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정체성, 관계성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의 시작부터 복음으로 인한 정체성의 변화를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지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악한 세대에 속하지 않고, 자기 몸을 주셔서 죄를 대속해 주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4). 복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변화한다. 이 정체성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정체성이다. 2 본론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놀란다’,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등의 수사학적 표현으로 갈라디아 성도들을 책망하며 본론을 시작한다. 율법과 할례를 통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저주를 받을 자들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하게 선언한다(7-9).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이다(1). 바울이 만약 적당히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타협했다면 크게 배척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사람들이 복음을 바르게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복음의 사람은 분명한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과 복음이 자기 삶의 중심이란 것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감을 절대로 잊지 않은 사람이다. 주님, 우리의 정체성이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놓여 있음을 알아,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의 변화가 있게 하소서!

2024.10.17 (목) 호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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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7 (목) 호14:1-9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의 개혁을 외치며 개혁을 위해 여호와를 아는 것, 곧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수라 가르친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모토 역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였다. 이처럼 교회를 바로 서게 하는 도구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 말씀이다. 1 호세아는 마지막까지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외침을 그치지 않는다. 불의로 엎드러진 이스라엘은 ‘말씀(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말씀을 의지하는 자는 세상의 권력을 의지하지 않는다. 우상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헛된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 때에야 회복의 소망이 있다. 2 말씀으로 돌아가면, 이스라엘을 고치시고, 기뻐하시고, 사랑하실 하나님의 사랑이 회복될 것이다(4).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매가 풍성할 것이라 하신다. 포도주는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될 것인데(5-7), 레바논(두로, 시돈)은 이스라엘에 바알 신앙을 가지고 왔던 이세벨의 고향이다. 이처럼 진정한 풍요는 바알 우상 숭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붙잡음으로써 얻어진다. 세상을 따라하면 그들이 가진 것들을 우리도 가질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3 마지막으로 호세아는 우상을 멀리한다면 가지가 무성하여 하나님이 풍요와 안정을 주실 것을 선포한다. 삼나무의 곧고 굵은 줄기가 상징하는 안정, 그 나무의 열매가 상징하는 풍요가 보장된다는 약속이다(8). 우상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힘써 알고 그분께 돌아오려 하는 자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호세아는 이 말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의인은 구원을 얻겠지만, 죄인은 걸려 넘어질 것이란 말로 예언을 마친다. 듣는 자들에게 공이 넘어왔다. 우린 어리석은 죄인의 자리에 있어선 안 된다. 주님, 말씀과 순종에 관심을 집중하는 성도, 하나님이 복 주시기 기뻐하시는 성도, ‘오직 성경’의 신앙의 토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성도로 ...

2024.10.16 (수) 호1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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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6 (수) 호13:1-16 북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던 에브라임 지파가 북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몰아갔음을 고발한다. 왜 그런 악행을 저질렀던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그 저변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1 에브라임 출신의 북 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이 왕권 강화를 위해 대중에게 금송아지를 숭배하게 한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 우상 숭배는 계속 이어져 왔다 (왕상11:26; 12:28). 오므로 왕조의 아합은 바알까지 섬겼고, 결국 오므리 왕조는 예후에 의해 멸망당했다 (왕하10;11). 우상이란 아침 구름, 이슬, 연기 같이 헛된 것이지만, 그들은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수준으로 낮아진 신을 ‘확실한 존재’로 느끼기 때문에 인간은 우상 숭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오직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구원자시고, 진정으로 확실한 신이시다. 어리석은 죄인들은 확실한 은혜를 받을수록 오히려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잊는다. 헛된 우상을 선택하면 그 결과는 ‘확실한 헛됨’이다. 2 사무엘 시대에 백성은 자기들이 이방 나라들보다 약한 이유가 왕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라가 강성하고 풍요를 누림은 왕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의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언약을 알고 지킴에서 이뤄진다. 백성들의 요구에 하나님은 왕을 주셨지만 왕은 백성을 압제했다 (9-11; 삼상8). 죄와 회개치 않은 죄로 인해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파괴되고 약탈당하는 것뿐이다(14-16).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남는 것은 비참한 멸망 뿐이다. 세상의 헛된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리라는 어리석은 기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복이다. 주님, 오늘날도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파멸로 몰고 가는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오히려 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는 결단이 있게 하소서!

2024.10.15 (화) 호11: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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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5 (화) 호11:12-12:14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교만을 꺾고 주께 돌아오라고 다시 권고한다. 하나님께 돌아와 인내와 정의를 지키며 하나님만을 바라고 불의한 행위를 그칠 것을 종용한다. 1 거짓과 속임수는 사탄의 특기다. 지금 북 이스라엘와 남 유다에 만연했던 악의 정체를 드러낸다(12).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했던 북 이스라엘의 정치적 결정이 불신앙은 결국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2). 호세아가 이 시점에서 야곱, 곧 이스라엘의 옛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던 속이는 자 야곱을, 주께서 만나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3-4). 하나님을 기억하고 끝까지 붙잡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다.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자(6). 야곱과 또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처럼. 2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 먼저 과감히 제거해야 할 것이 ‘불의’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스라엘을 가짜 저울로 사기치는 장사꾼에 비유한다(7).이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악행을 저질렀다(8). 이런 불의를 제거하지 않으면 다시 광야로 내몰려 장막에 거주하게 될 것을 경고한다(9).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10), 또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가 분명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12-13). 말씀 앞에 불의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심각한 죄다(14).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악행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를 선택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옛 습관은 광야에 모두 버려두자. 새 출발은 소망과 미래를 약속한다. 주님, 거짓되고 불의한 모든 행위와 습관을 버리고, 주의 사랑 앞으로 돌아와 주가 주시는 은혜로 새 사람을 입게 하소서!

2024.10.14 (월) 호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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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4 (월) 호11:1-11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호세아는 설명한다.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과 같은 이스라엘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으로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다시 묵상하게 된다. 1. 11장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아버지인 하나님께 행했는지, 그런 이스라엘을 얼마나 참고 기다리셨는지 잘 보여 준다.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해 애굽에서 불러내셨고, 선지자들을 보내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가까이했고, 하나님을 무시했다(2-3). 하나님께서 이들을 건져 내시고, 광야에서도 먹이시고 보존하셨으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앗수르에게 지배 받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스라엘을 호세아가 이렇게 책망해도, 알아듣는 이도, 돌아오려는 이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믿자. 더 이상 도망가지 말고 멈추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자. 2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하고, 이스라엘아, 내가 어떻게 너를 넘겨주겠느냐’하시는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8).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던 성읍들이다. 이스라엘을 그들처럼 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인자가 풍성한 아버지시다(사42:3). 호세아는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을 결국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주면서 진노 주에 긍휼을 그치지 않으시는 주님을 잊지 말고 속히 돌아오라고 외친다. 아무리 멀리 떠났어도 방향을 바꿔 돌아가면 산다. 죄악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자. 아버지의 품으로 용기를 내어 다가가자. 주께서 얼마든지 긍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뛰어넘는 무궁한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때로 고난으로 인...

2024.10.12 (토) 호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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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토) 호9:10-17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로 가득차셨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극악한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1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흔들어 놓으려 한다. 우리가 믿음을 잘 지키려면 세속적인 가치에 저항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사막에 열린 포도송이 같고, 처음 익은 무화과처럼 탐스럽고 사랑스런 존재였다(10).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기꺼이 만나 주시고 사랑으로 품어 주셨다. 그때 우리는 감격하며 기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감격이 사라지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의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우리는 우상으로 가득한 세상의 온갖 유혹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2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증한 우상 숭배자들로 전락했음을 고발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들이 누리던 모든 영광을 빼앗길 것을 엄중히 선포한다. 우상숭배에 빠지는 이유는 좀 더 쉽게 세상의 성공을 쟁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공을 자녀들에게 물려줘서 자녀들도 세상에서 안정적으로 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앗수르 침략을 받게 되고, 나라도, 자녀도, 가정의 안위도 다 잃어버렸다(11-17). 우상숭배의 결과는 패가망신과 멸족지화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세속의 우상들을 멀리해야 한다. 모두 사람이 우상을 따라 살지라도 성도는 이 세대를 거슬러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올곧은 믿음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 주님,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고 감사를 잃지 않음으로, 세속의 유혹을 얼마든지 이겨내게 하소서!

2024.10.11 (금) 호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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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1 (금) 호9:1-9 우상숭배에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예언자들을 멸시한 것이 결국 포로로 끌려가 온 땅에 흩어지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을 다시 한 번 경고한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고 여호와께서 ‘보복’하시기 전에 돌이켜야 한다. 1 임박한 환난 앞에 두려워해야 한다. ‘다른 민족들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말라’는 말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란 의미다. 젖과 꿀이 흘러야 할 약속의 땅이 우상숭배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 이제 이방인들이 먹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인 부정한 음식을 전쟁포로가 되어 먹게 될 것이다. 절기가 되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포로여서 그럴 수도 없다. 하나님은 패역한 자들을 흩으신다. 죄악으로 인해 쫓겨나 흩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옮겨지기도 한다. 그 차이는 엄청나다. 형벌과 보응으로 가는 피난길과 순종의 열매를 향한 복된 길의 차이다. 흩어짐을 당하기 전에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지혜다. 2 호세아는 ‘처벌의 날’, ‘심판의 날’이란 강한 어조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한 이스라엘의 고집스런 태도를 고발하고, 그날의 고통이 매우 극심할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포함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덫을 놓듯이 이들을 대했고, 사사건건 방해하고 발목을 잡았다. 하나님의 전 안에서도 그들은 선지자에게 원한을 품었다. 사사 시대, 기브아에서 레위인의 첩을 강간한 일(삿19-21)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도륙당한 일을 빗대어 이스라엘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지 마지막으로 경고하며,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그 악에 대해 보응하실 것을 확실히 전한다(9). 하나님의 징계가 이르기 전에 우리는 주의 말씀과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내 고집을 꺾고 순종하며 주께 나아가야 한다. 주님, 주 안에 거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든든히 지어져 감을 알고 항상 하나님만 높이며 살아가게 하소서!

2024.10.10 (목) 호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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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목) 호8:1-14 본문은 우상숭배로 인해 일어날 심판들에 대한 경고와 책망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이 반복하는 우상숭배의 결과, 그리고 이방들이 의지한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한 묘사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우리는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1 우상을 숭배하고 외세만 의지하는 이스라엘은 먼저 앗수르의 침공을 당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법을 만홀히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입맛에 따라 선택한 지도자, 하나님이 아닌 손으로 만든 우상은 모두 깨지고 무너질 것이다. 아무 열매도 없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의 실체다. 얼마나 간절히 믿는냐는 중요치 않다. 믿음의 대상의 실체가 중요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실체들을 더욱 의지한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우상이다. 그 우상을 내어 버려야 한다. 창조주의 얼굴을 바라보자. 2 이스라엘의 처지는 쓸모없어 방치된 그릇, 무리에서 떨어진 짐승, 사랑을 얻기 위해 몸을 파는 자 등에 비유된다(8-10). 하나님이 상세하게 알려 주신 삶의 지침과 무관하게 산 결과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궁궐,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성읍 모두 불에 타 없어질 것이다(12-14). 하나님이 아닌 이방을 의지한 결과다. 그들은 옷을 찢으며 여호와 앞으로 돌아왔어야 한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없다. 주께 돌아와 주만 의지하는 것이 다가올 진노를 피하는 길이다. 창조주를 무시한 채 세운 모든 높은 것은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주께로 돌아와야 한다. 주만 바라자. 주만 의자하자. 주님,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의존을 버리고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결과가 패망이었음을 기억하고, 오직 주의 은혜만을 구합니다!

2024.10.9 (수) 호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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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9 (수) 호7:1-16 여호와를 힘써 알고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고자 외쳤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내부적 혼란과 외부적 위협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먼저 하나님부터 찾고 그분을 의지하록 촉구한다. 1 북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선지자는 이제 왕궁 안의 타락과 반목, 권력을 향한 더러운 싸움을 고발하며 지도자 그룹이 계속되는 한 이스라엘은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이들의 부패와 백성의 도덕적 타락으로 양극화와 맘몬주의가 판을 쳤다. 호세아는 이런 죄악들을 달궈진 화덕에 비유했다. 한번 달궈진 화덕이 쉽게 식지 않듯 이스라엘에 피어 오른 죄의 불길이 그치지 않고 계속 그들을 집어삼켰다는 것이다(6-7). 왕궁 안의 사람들이 보여 주는 간교한 마음과 분노, 배신과 권력욕으로 인해 이스라엘 왕들이 오래 집권하지 못하고 금방 폐위하거나 암살당하는 패턴을 보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거나 부르짖지 않았다. 여호와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며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다. 2 호세아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외세와 야합하는 것을 여러 번 경고했다(11; 8:9). 외세를 이용하려다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의 신앙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외세에 이용당하다 결국 망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9-12).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고 그분을 찾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유익만 구하는 이스라엘에게 화가 있다(13-14). 고집스런 자세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의지하며, 계속 빗나가기만 하는 것은 결국 멸망으로 인도된다. 우리가 구하고 바라고 의지할 이는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다. 다른 힘을 의지해선 안 된다. 오직 주만 바라봐야 한다. 주께서는 주의 날에 주의 방법으로 이루실 줄 믿자. 주께서는 의인의 간구를 반드시 들으신다(약5:17). 주님, 안팎으로 거친 압력과 유혹이 거세다 할지라도, 다른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함으로 얼마든지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내는...

2024.10.8 (화) 호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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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8 (화) 호6:1-11 앞 장에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모두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한 호세아는 이제 주께 돌아가자고 온 백성에게 목 놓아 외친다. 위선적인 제사를 그치고 진실로 주께 나아갈 때 진정한 회복이 있음을 선포한다. 1 분명한 경고를 외친 선지자는 이제 온 나라의 회개를 촉구하며 주께 돌아가자고 힘써 말한다. 주께서 치셨지만 싸매 주시고, 셋째 날에 일으키실 것을 선포한다. 결국 살리고 일으키실 분은 외부의 강대국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여호와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뼛속 깊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대한 무지가 죄라고 선포했고(4:1),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권면한다(3). 우리를 고치실 유일하신 주를 알고 주께 돌이킬 때 온전한 회복이 임한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해 거세게 책망하신다. 바로 이스라엘의 믿음과 주를 향한 사랑이 아침 구름처럼 또 이슬처럼 잠깐 있다 사라진다고 말씀하신다. 위선적 제사와 번제를 버리고 진정한 사랑을 원하시는 주를 기억하며, 반역과 포악을 그치고 가증한 음행을 내려놓으라고 책망하신다(6-10). 빛의 자녀는 빛의 자녀답게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엡5:8).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회복해야 산다. 진정한 사랑 없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무슨 영광이 되겠는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회복하자. 거짓과 위선을 내려놓고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깨끗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자. 주님, 말만이 아닌 행실로, 위선이 아닌 진실로 주께 나옴으로 우리의 사랑과 예배를 회복되게 하소서!

2024.10.7 (월) 호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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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7 (월) 호5:1-15 부끄러운 일을 당하기 전에 속히 돌이키라는 여호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그치지 않았다. 안팎의 혼란에 대해 하나님이 경고하실 때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회개하며 돌아가야 마땅하다. 1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족속과 왕족들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라는 명령은,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이 어느 한 부류에 그치지 않고 지도자부터 시작해서 나라 전체에 만연해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1) 이런 행위를 그치지 않은 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또한 돌아갈 수도 없고 (4), 설령 찾아간다 해도 여호와께서 만나 주지 않으신다(6). 우상숭배에 대한 열심은 오히려 그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한때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었으나(민13:8; 삼상1:1), 이제 북왕국의 영적 타락을 대표하는 지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경고의 사이렌을 주실 때 죄악을 그치고 당장 주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2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임박한 전쟁에 대해 경고한다.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이 임하는 날, 북 이스라엘은 황폐해지고 남 유다의 지도자들에게도 주의 진노가 홍수처럼 임할 것이다(9-10). 확실히 임할 멸망은 강대국을 의지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만이 치유하실 수 있다. 성난 사자처럼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찢으시기 전에 속히 돌아가야 한다. 죄를 뉘우치고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15). 우리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면 얼마든지 찾고 만나 주신다(렘29:13). 시편 저자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면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라고 고백했다(시50;12). 사이렌이 울릴 때 우린 돌아와 주의 긍휼과 자비를 구해야 한다. 주님, 경고를 계속 무시한 결과 돌이킬 수 없는 큰 일이 생기듯, 우리 삶에 울리는 영적 경고 소리에 멈춰 돌아보고 주께 돌아가 자비를 구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2024.10.5 (토) 호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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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5 (토) 호4:1-10 호세아는 이제 백성의 무지함과 제사장들의 범죄를 고발한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범죄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며, 그 책임 가운데는 제사장 그룹이 있었다. 주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죄이며, 그것을 기억하고 전하는 것이 믿음이다. 1 언약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논쟁을 제안하시며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부르신다. 이는 이스라엘의 무지를 깨우치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하지 못했고 계명과 율례를 저버렸다. 그 결과 땅이 슬퍼하고 바다가 눈물 짓는다(3).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언약을 소흘히 한 죄는 모든 관계를 깨뜨린다. 천국 백성이 된 우리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청지기답게 세상을 성실히 다스리고 가꾸라는 주의 명령과 약속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복되게 이 땅을 사는 원리란 사실을 기억하자. 2 호세아는 제사장 그룹의 죄를 고발한다. 많은 백성은 제사장들을 신뢰하지 않으며 불만족스러워했다. 저들의 타락과 범죄가 종일 계속되어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모르는 백성은 망하게 되어 있다(신8:11-20). 먼저 깨닫고 믿고 따라야 할 제사장들이 먼저 그것을 망각하고 범죄하고 있는 상황이다(6). 영적 지도자들의 부패 때문에 백성이 그들의 심판과 치리를 불만족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제사장 그룹의 타락은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앞당긴 큰 요인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뿐이다(9-10). 우리는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선한 모본이 되어야 한다. 주님,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지 않도록, 주를 더욱 열심히 알고 따라가 선한 본을 보이는 천국 백성이 더 많아지게 하소서!

2024.10.4 (금) 호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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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4 (금) 호3:1-5 무한한 사랑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신 후에 호세아더러 음란한 아내를 속량해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녀의 회복을 기대하는 사랑으로 기다리라고 하신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함이 없는 사랑의 주님께 돌아가 회복되는 은혜의 과정을 본다. 1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세 자녀를 낳은 후 집을 떠나 다른 남자를 따라 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빵를 즐겼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여 준다. 가루를 반죽해 과자를 만들어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의 한 전형이기도 하다(렘7:18).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떡, 요6:51)을 우상에게 바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가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끝없는 사랑을 보이시는 우리 하나님께 돌아올 때, 회복의 은혜는 넘쳐날 것이다. 2 ‘가서 그 여자를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호세아는 순종한다.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라는 만만치 않는 값을 치르고 아내를 되찾아 온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놓으시고 어마어마한 값을 치르고 우릴 속량하셨다 (벧전1:18-19). 치러진 속량값은 다시 주어진 진정한 자유에 걸맞는 태도와 결심, 순종과 성숙을 요구한다. 이전의 음행을 끊고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는 호세아의 요청은 이전의 삶에서 돌이켜 오직 주만 따르라는 하나님의 요청이다. 우릴 죄와 저주에서 속량해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구원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3 이스라엘 자손 역시 홀로 버티며 구원의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준비할 시간을 갖게 되리라고 말씀하신다(4). 왕이 없고, 제사도 드릴 수 없고, 제사를 인도할 중재자도 없는 상황은, 많은 날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게 될 미래를 의미한다. 나아가 진정한 왕이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먼 미래를 의미하기도 한다. 기...

2024.10.3 (목) 호2: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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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 (목) 호2:14-23 우리 구원의 근거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를 우상이 준다고 착각한 데 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엄중히 징계하시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범한 죄로 인해 인생의 수렁에 빠졌을 때,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일까? 1 아골 골짜기는 과거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심판을 받았던 장소다. 그런데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 역시 아골 골짜기에 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들에게는 수치와 결핍만 남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에 떨어진 우리에게 결혼 서약을 하면서 변함없이 사랑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 인생이 아골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는 이 약속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공의, 정의, 은혜, 긍휼, 진실함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19-20).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이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기다리고 계신다. 2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방의 침략을 받은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황폐와 파멸만 남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해충으로부터 그리고 활과 칼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주시며 평안을 찾게 해 주시리라 약속하신다.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겠다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인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가까이 나아갈 용기를 내라고 격려한다(히4:16). 때로 우리는 불순종한 죄로 인해 기도할 염치가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야말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가장 절실한 때다. 주의 응답의 약속을 붙잡고 우리의 회개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런 기도에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하실 것이다. 주님,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에도 언약의 말씀은 변치 않음을 알고, 깊은 수렁 속에 빠져 있다 해도 즉시 주의 약속 의지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올 ...

2024.10.2 (수) 호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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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 (수) 호2:2-13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내릴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엄히 경고한다. 이 징계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배은망덕, 그리고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믿음 생활 때문에 임하게 된 것이다.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1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징계를 부르는 영적 음란인 우상숭배를 제거하라고 경고한다(2). 40년 광야 방황시대에 믿음 없던 세대가 모두 죽었다는 사실과 새로운 세대를 보존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이끄셨다는 사실은 경고와 희망 모두 제시한다. 하나님은 음란한 자식들을 더이상 긍휼히 여지기 않으신다고 강력하게 경고한다(4). 그러나 모세의 율법대로 음행한 아내를 죽이지 않고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모습에서 또다시 한없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엿본다. 우린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2 호세아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공급을 잊어버리고 이방 신들을 향해 구걸하듯 숭배했던 이스라엘의 배은망덕한 죄를 고발한다.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이방 신들에게 찾아가는 것의 결과는 참혹함과 비참함 그 자체다(6-7). 모세 역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땅에 소산이 가득하게 하실 분이 하나님이시니, 미혹에 빠져 다른 신들을 섬기지도 절하지도 말고, 오직 마음과 뜻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했다(신11:13-17).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가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면, 우리 인생은 처참하게 변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자. 3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의 위선적 제의와 예배를 고발하며 멈출 것을 경고한다. 거짓으로 위장한 모든 것을 벗겨 내면 큰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10). 모든 유대 전기를 기쁘게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우상들도 섬기는 이중성을 보였다. 하나님은 헛된 제물과 분향을 가증히 여기신다(사1:11-14). 종교혼합주의적 신앙은 위선이요, 하나님을 분노케 한다. 당장 위선적 예배를 제하고 멈춰야 한다. 유일한 하나님이신 아버지께 온전하고 순전한 예배를 올려 드려야 한다. 주님의 징...

2024.10.1 (화) 호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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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 (화) 호1:1-2:1 북 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 호세아는 나라가 가장 부국강병을 이룬 시절에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이 시대 백성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의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곧 이스라엘은 국내외적 혼란에 빠져들었고, 호세아가 사역을 시작한 지 약 3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1 1장은 호세아의 서론이자 책 전체의 메시지를 집약해서 보여 준다.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한 호세아의 혼인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상징한다. 선지자가 음란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자신의 삶이 메시지가 되게 한다. 죄악이 가득한 시대에 사람들은 선지자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선지자와 그의 가족, 아이들의 이름이 메시지가 되어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마다 하나님의 극진한 사람과 심판과 소망의 메시지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2 ‘이즈르엘(하나님이 흩으심)’, ‘로루하마(긍휼을 얻지 못함),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님)’ 세 아이의 이름은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과 전쟁을 예고한다. 하나님의 긍휼이 끊기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총체적 심판이 임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메시지를 무서운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갑자기 찾아오는 미래의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로 당산의 백성을 향한 궁극적 계획과 선한 의도를 밝히신다. ‘이즈르엘’은 부정적이 역사가 떠오르던 곳에서 소망의 장소로, ‘로루하마’는 ‘루하마’로, ‘로암미’는 ‘암미’로 역전될 것이다. 우리가 심판과 징계를 당하나 인내하며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회개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항상 놀라운 회복의 약속을 성취해 주시기 때문이다. 주님, 호세아 가정의 비유가 이 시대 우리의 삶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신실하신 하나님께 정직과 신의로 항상 나아가게 하소서!

2024.9.30 (월) 느13: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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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30 (월) 느13:23-31 성벽이 완성되고 성전 제도 또한 재정비되었지만, 느헤미야서 마지막 기록은 유다 백성의 영적 삶의 현장에 관한 보고를 통해 참된 개혁은 외적 개혁이 아니라 삶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다시금 가르쳐 준다. 1 본문23-27은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를 다룬다. 보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느헤미야는 혼합 결혼을 넘어 그들의 자녀, 즉 다음 세대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느혜미야는 차세대 그룹과 소통하며 사역의 범위를 자녀 세대까지 넓힌 듯하다. 그는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태어난 자녀들 가운데 절반이 유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들이 아는 언어가 무엇인지 분석할 정도로 어린이들에게 체계적이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듯하다. 역대기에서 드러내지 않은 솔로몬의 약점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면서까지 이 사안의 심각성을 강하게 전하고 있다. 언어에는 가치관과 문화와 신앙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믿음의 가정은 믿음의 언어로 대화하고 말씀으로 함께 기도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작은 신앙공동체인 가정이 더 하나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함께 믿음을 키워가자. 2 느헤미야서 마지막 부분은 제사장과 레위사람에 관한 것이다. 평신도였지만 그는 귀환 공동체가 예배를 중심에 두고, 성전 사역자들이 체계를 갖추어 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제1성전 시대와 달리, 제2 성전 시대엔 왕이나 군사조직 등 독립적인 정부 체계도 없다. 오직 말씀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신실한 선포가 유다 공동체의 정체성이 된 것이다. 무너진 성벽이 계기가 되어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을 품고 기도한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뿐 아니라 공동체성을 다시 세우되, 그 중심에 말씀 사역이 온전히 이뤄지도록 했다는 의미에서 느헤미야서의 이 마지막 단락은 이 시대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전달한다. 모든 가정이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서서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순수성을 갖고 자녀들을 교육할 때 그 가정은 그리스도로 온전히 세워질 것이다. 주님, ...

2024.9.28 (토) 느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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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8 (토) 느13:1-9 영적 승리는 우리를 기쁘게 하고 흥분시킨다. 그러나 한번 승리했다고 사탄을 완전히 이긴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승리의 틈새에 끼어 있는 사탄의 역사를 깨닫고 영적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1 유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에 어긋난 행동을 즉시 수정한다. 자신들과 함께 생활하며 영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방인의 무리를 모두 분리시킨다(3; 10:28, 30). 그런데 어느 틈엔가 이방인들과 함께 섞여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벽 재건을 방해하던 원수 도비야를 위해 제사장이 성전에 방을 내주기까지 했는데, 이제까지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4-5). 영적 지도자의 무지는 영적 몰락을 앞당긴다. 세속의 문화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와중에 영적 지도자들이 깨어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깨어 성령의 검을 들고 계속 싸워야 한다. 2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 이방인 도비야가 제사장과 모종의 밀약을 맺고 성전에 방을 얻어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모든 일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잠시 떠나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이스라엘은 바른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 중 한 사람은 영적으로 무뎌져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깨어 본노하며 단호하게 대처한다. 느헤미야는 신속하게 도비야의 세간을 성전 방에서 내던지고, 방들(원문에는 복수)을 정결하게 청소하고 성전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으로 다시 채운다(9). 우리 안의 더러운 죄악들은 회개함으로 깨끗하게 청소되어야 한다. 그리고 깨끗하게 정화된 마음을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 채워야 한다. 주님, 모든 성도들과 특히 리더들이 날마다 심령을 새롭게 하고 회개와 성령 충만함을 구하며, 깨어 겸비하고 기도하므로 주님의 공동체가 영적 전투에서 항상 승리하게 하소서!

2024.9.27 (금) 느12: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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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7 (금) 느12:31-47 성벽이 완성되고, 느혜미야가 이끄는 유다 공동체는 성벽 완공을 기념하는 봉헌식을 통해 기쁨과 안식을 누린다. 1 성벽 봉헌식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Valley Gate지점에 있는 성벽에서 출발하여 두 무리가 양쪽으로 행진하며 진행되었다. 무리가 반으로 나뉘어 성벽 위를 각각 오른편 왼편으로 행진하여 동쪽 끝에 있는 성전에서 다시 만나는 예식은 성벽이 완전히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선포하는 의미이며, 행진할 때 나팔을 부는 모습은 마지막 때,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를 떠올리게 한다(35-36). 또한 그 행진이 끝나는 곳이 성전이었다는 것(40)은 그들이 결국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식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 기쁨의 소리가 멀리, 이방인들의 영역에까지 퍼져 나갔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기쁨과 능력이 우리 주변에 퍼져가게 하실 것이다. 2 백성이 무리를 지어 성벽 위를 행진한 후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성벽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성전 제사 역시 정상화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제 자신들이 서약한 대로 율법에서 정한 예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 성전 곳간으로 들인다. 놀라운 것은 이 같은 헌신이 자신들이 서약한 것들을 지키고 율법을 순종하고자 하는 것 이상의 의지에 따라 이뤄졌다는 것이다(44). 열심히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드린 것이다. 억지로 혹은 인색함으로 드리는 헌물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헌신하게 된 것이다. 사명을 다해 수고하는 사역자들과 그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성도들의 섬김이 있으면 헌금은 은혜의 통로가 된다. 주님, 교역자와 모든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주의 교회를 세워 가고, 기꺼이 헌신하는 거룩한 일꾼들이 되게 하소서!

2024.9.26 (목) 느12: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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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6 (목) 느12:22-30 봉헌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담아 예물을 드리는 행위다. 본문은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식을 기록한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을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만을 높여야 함을 교훈한다. 1 1차 포로귀환 이후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성벽 재건은 대적들의 방해로 중단된 상태였고, 그 어떤 결실도 거둘 수 없었다. 귀환한 백성은 땅을 저당 잡히고 자녀들은 종으로 팔리며 살림살이가 궁핍해져 무너져 갔다.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인과 통혼하고 교류하면서 신앙도 무뎌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52일 만에 성벽이 완성되었다(6:15). 숱한 고생과 수고 끝에 맞이한 봉헌식이기에 자칫 자신들이 이룬 성취에 도취되기 쉬웠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백성은 오직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올린다(27-29). 참된 봉헌은 여기까지 도우신 주님의 은혜에 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2 예루살렘 성벽이 이미 완성되고 곧바로 성벽 봉헌식이 진행되지 않음에 주의해야 한다. 먼저 유다 백성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의 말씀을 들었다(8;3). 또 초막절 성회를 열었다. 이후에 다시 모여 갈급한 심명으로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했다(9:2).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새 언약을 세웠다(9:38). 계명과 규례를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제물과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말과 글이 아닌 자신들의 삶으로 새 언약을 지켜 나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성벽 봉헌을 위해 자신들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준비했다. 봉헌식에 참여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먼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했다. 그리고 백성과 성문, 성벽까지도 정결하게 했다(30). 성벽 봉헌식을 앞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겠다는 일종의 선포식으로 알고 동시에 자신들을 드리는 봉헌식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며 봉헌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2024.9.25 (수) 느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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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5 (수) 느12:1-21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본문에 기록된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이 이름들을 기록한 참된 의미가 뭘까? 1 에스라2장과 느헤미야 7장에 1차 귀환자들의 지도자 명단이 있다. 1차 귀환(BC537) 후 93년이 지난 BC444년에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이 완성된다. 그처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1차 귀환 지도자들의 명단을 느헤미야가 기록한 것은 그들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또한 1차 귀환자들 중에 속했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소개한다(1a). 파괴되었던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다짐으로 귀환했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명단을 여기에 기록함으로 그들의 헌신이 씨앗이 되어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열매가 맺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사장들의 명단(1b-7), 레위인들의 이름과 그들의 후손들의 이름은 성전 제사를 맡은 자들의 혈통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지를 설명한다(8-11). 예배 회복은 수십 년에 걸친 헌신자들 덕분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셨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선조들의 헌신 덕분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늘 감사하고, 후대를 위해 거룩한 씨앗을 뿌리는 성도가 되어야겠다. 2 제사장은 세습되는 직분으로 영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사장 가문의 족보 관리가 중요했다. 느헤미야는 1차 귀환 당시 대제사장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 때 제사장의 족장이 된 인물들을 기록한다. 느헤미야가 자신의 주도로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 예배를 정상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을 1차 귀환했던 신앙의 선배들에게 돌리고 있다. 이는 또한 이 모든 일이 사람의 손에 이뤄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고백이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도 불쌍히 여기셔서 선조들에게 신앙을 허락하시고, 그들의 헌신으로 교회가 세워져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하나님이 이루신 이 역사를 보며, 우리도 그 역사에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헌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주님, 우리가 이...

2024.9.24 (화) 느11: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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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4 (화) 느11:22-36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이다. 본문은 유다 지파가 본래의 기업에 다시 거주하게 됨을 통해 언약이 다시 성취되는 새 역사를 보여 준다. 1 본문은 예루살렘에 유다 자손(25-30)과 베냐민 자손(31-36)이 어디에 분포되어 살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이곳에 나열된 유다와 베냐민 도시들을 통해 느헤미야 당시 유다 공동체가 거주했던 지역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지명들은 또한 선조들이 개척하고 정복하고 일궈 놓았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선조들의 역사는 그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역사적 전통 위에 귀환 공동체가 지금 서 있다는 사실이다. 2 하나님이 옛적에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이 땅에 들어오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포로로 끌려갔던 땅에서 이끌어 내셔서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와 정착하게 하셨다.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았던 것처럼(삿1), 이제도 그 땅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살고 있다(스9:1-2). 과거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온전한 국가를 세워야 할 사명이 귀환 공동체 앞에 놓여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늘도 우리 앞에 놓인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주님, 나의 작은 헌신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거대한 역사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2024.9.23 (월) 느1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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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3 (월) 느11:10-21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실족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어려운 시기에 자원하며 헌신한 자들의 이름을 본문에 기록하신 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다 안다’라고 말씀하시며 위로하신다. 1 사명자에게 요구되는 충성이 사역 기간 내내 변함없이 유지되지 못할 때가 많다. 시련이 닥치고 시험에 들어 실족하며 충성을 서약한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무거운 짐을 벗듯 사명을 던져 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 서약까지 하지만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또 예루살렘 성내는 거주하기에 불편한 요소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로 한 제사장들(11-14)이 있었다. 성전세와 십일조를 관리하고 성전 유지 보수 등 성전 바깥일을 맡는 레위인들(15-18)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동역하기로 한다. 어떤 이는 찬양으로, 문지지로 다양한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로 결단한다. 비록 이름이 자세히 기록되진 않았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되고 질서 있게 움직이지 못하던 시기에 각자 사역의 자리에서 충성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되어 기억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위해 충성하며 헌신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신다. 2 느디님 사람들은 전쟁포로이거나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 꾀를 내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은 기브온 사람들의 후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종이 되어 하나님의 집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일을 감당하게 되었고(수9:23), 대대로 성전 노예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살다가 전쟁포로가 되어 끌려갔었고, 포로생활이 끝나면 그곳에서 자유롭게 새 삶을 사는 것이 상식이었을 것이다. 얼마든지 다른 선택지가 있었던 느디님 사람들이 여전히 성전을 위해 헌신하는 (21) 모습은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결단했던 이방 여인 룻을 생각나게 ...

2024.9.21 (토) 느10: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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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1 (토) 느10:32-39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 재건을 마쳤지만, 귀환 공동체가 성전제사를 운영하고, 유지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바치는 헌금이 어떤 의미이며, 공동체의 재정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1 성전 제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을 위한 요소였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활비, 제물과 땔감 등을 위해 성전세를 걷기로 결의한다. 그런데 그 액수가 1/3세겔이다. 율법에는 성전세를 1/2 세겔로 규정하기에 율법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32; 출30:13, 15). 그러나 본문은 이들의 결의를 비난하지 않는다. 페르시아에 조공도 바쳐야 했기에 그들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다. 2 귀환 공동체는 율법의 규례를 따라 첫 소산을 제사장들에게 주어 성전 운영과 그들의 생활을 위해 쓰게 했고, 레위인들을 위해 십일조를 바치기로 한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백성이 풍성한 수확을 얻으면 그들도 풍성함을 누리고, 또 흉년이 들어 소출이 적으면 그들도 백성과 함께 빈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처럼 헌금은 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서로를 섬기면 나누는 것이며, 이를 통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한다. 3 헌물은 바치고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도 아주 중요하다. 느헤미야는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 제사장을 입회시켜 재정의 투명성을 확보했다(38). 또 레위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십일조를 떼어 성전에 바침으로써 그들 역시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현했다. 이는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않기’ 위함이었다(39). 사사시대가 영적 암흑기가 된 이유도 헌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고 성소의 재정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던 것도 큰 이유다 (삿17:7-8; 삼상2:12-17). 우리는 교회 재정을 바로 세우는 것 또한 거룩함을 위한 중요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며, 재정 또한 주의 뜻에 따라 운영...

2024.9.20 (금) 느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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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0 (금) 느10:1-31 이스라엘의 진정한 성벽인 영적 정체성은 회개를 통해 재건되었다. 물리적 성벽을 재건할 때처럼 영적 성벽을 재건하는 사역 역시 백성 전체가 함께 감당하고 있다. 1 초막절 이후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을 대표해 레위인들이 드린 기도는 문서화되어 하나님 앞에 인봉되었다(9:4, 38). 이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할 계명에 합당한 백성으로 살겠다는 고백이요, 헌신을 뜻한다. 총독이었던 느헤미야와 아사랴(에스라), 제사장들의 이름이 나온다. 원래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성전을 책임지는 자들이었지만, 느헤미야는 귀환한 유대 공동체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신앙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행정 관리들을 내세우지 않고 제사장과 레위인을 나열했다. 그 이후에 행정적 리더들의 이름이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말씀과 신앙을 그 중심에 둬야 한다.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중심에 언제나 하나님을 모셔두자. 2 평민들은 비록 자기 이름을 언약의 글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모두 저주로 맹세에 참여했다(28-29). 우선 백성들은 율법을 따라 이방인들과 통혼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이전에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악을 회개하고 그 죄로부터 절연할 것을 선언한 것이다(30; 스9-10). 또한 세상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도를 우선하기로 맹세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법도까지 지키겠다고 선언한다(31).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으로 선포하고 순종하겠다는 다짐을 통해 세상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영적인 성벽을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 주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공동체라는 자부심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켜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