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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November, 2021

2021.11.2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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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27 (토) 합1:1-17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이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해 유다를 침략해서 일만 명의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아간(BC 605) 사건에 앞서서 예언했기 때문에, 본서는 그 직전일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와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하나님이 각 나라를 심판하시는 방식과 기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1 하박국은 유다의 영적 해이에 대해 하나님께 고발하며 부르짖는다. 성전에 매일 예배가 드려지지만, 그 땅에 폭력, 불의, 죄악, 파괴, 갈등, 싸움이 끊이지 않고,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시행되지 않고, 악인이 의인을 이긴다고 고발했다. 유다의 상황을 속히 개입하셔서 바로잡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2 하박국이 원한 것은 개혁과 치유였지만,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멸하실 계획을 말씀하신다. 이들은 호전적인 자들로 성읍들을 정복하고, 자기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이었다. 이런 극악한 무리를 통해 철저히 파괴되어야 할 정도로 유다는 부패해 있었다. 내 눈에 작은 것을 하나님도 작게 여기실 것이라고 안심해선 안 된다.  3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왕들과 나라들을 다스리심을 인정하지만(12), 어떻게 거짓된 자들이 활개를 치고, 악인이 의로운 자들을 삼키게 하실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유다가 바벨론에 비하면 훨씬 의롭지 않느냐는 것이 하박국의 주장이다.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일들이 있지만, 그래도 사회보다는 훨씬 도덕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부다 더 악한 자들을 사용해서 우리를 치곤 하신다. 우리가 바로 설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인정하고 바른길로 돌이켜야 한다.  주님, 우리를 포함한 사람들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정결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살아가기 위해 힘쓰게 하소서!

2021.11.2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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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 26 (금) 욥31:24-40 자신이 행하지 않았다고 욥이 주장하는 11가지 죄악 중 마지막 5가지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지혜롭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자.  1 욥은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았고, 해와 달을 보며 유혹되어 우상숭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기 번영과 안정을 위해 숭배하는 우상들이다. 하지만 욥은 이것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기에 재판에 회부될 만한 죄악이라 규정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 어떤 것도 의지할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긴다. 2 욥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했다. 원수들의 멸망이나 재난을 즐거워하지 않았고 저주하지도 않았다. 아랫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였고, 나그네와 행인드도 편히 묵어갈 수 있게 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악한 일을 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을 배려하고 넓은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다. 3 욥은 만약 어떤 죄악으로든 자신을 고소할 자가 있다면 고소장을 받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모두에게 드러내놓고 알리며, 오해를 풀겠다고 한다. 그토록 욥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사람이었다. 또한 자기 땅과 그 경작하는 자를 착취한 적이 없다고 선언한다. 이는 자기 소유에 대해 분수를 지켰다는 뜻이다. 성도는 주께서 베푸신 은혜 안에서 자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참 지혜다. 주님,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만 설명하려는 어리석은 자의 길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2021.11.2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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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25 (목) 욥31:1-23  31장은 욥이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행한 적이 없으며,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처벌을 받겠다고 선언하는 부분이다. 욥이 언급하는 11가지 죄악 중 6가지를 다루는데, 이를 통해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을 과연 뭘까?  1 고대 근동에서는 처녀에게 관심을 두고, 또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 통례이기도 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기업’을 기대하며 세상의 윤리 기준보다 더 높은 수준에 따라 행동해 왔음을 주장한다. 또 거짓을 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고대 근종의 대상 무역에 대한 기록에는 상인들이 조금씩 속이는 일은 허다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보다 높은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2 길을 벗어남, 마음이 눈을 따름, 손에 더러운 것이 묻음이란 상징적 표현을 통해 재물을 탐내는 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욥은 마음에서조차 여인에게 미혹되는 일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아내와 모든 소유를 빼앗겨도 좋다고 선언한다(9-12). 욥은 심령의 정결까지 철저히 지켰다. 실제로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안에 해악이 없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이 세상의 악하고 음란한 문화로부터 마음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3 이어서 욥은 종과 가난한 자들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자를 간과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동료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지 않거나, 충분히 도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해를 피하려 돕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재앙을 허락하셔서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게 된다.  주님,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윤리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절대적 판단 자체를 거부하는 이 세대를 향해 겉은 물론이고 내면까지 정결하게 하으로 세상에 거룩함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2021.11.2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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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24 (수) 욥30:16-31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려고 애썼던 욥은 하나님이 왜 이런 환난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욥의 경험 속에서 환난 날을 맞이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다.  1 욥이 지금 가장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것이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다윗도 자신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했다(대하6:42). 어떤 환난에 사로잡혀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구원받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해야 한다.  2 욥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셔도 자신은 계속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주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고, 응답하실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다윗 역시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응답받았다고 고백한다(시18:6; 107:13; 120:1).  욥도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응답을 받아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누렸다. 우리도 환난 날에 기도 응답을 확신하며 끝까지 간구하고 응답받는 믿음이 필요함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눅18:8).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환난 중에도 주의 응답을 확신하고 부르짖어야 한다.  3 하나님은 환난 날에 당신을 부르는 자를 건지시고, 그로 인해 영광을 얻으실 것을 약속하셨다 (시50:15). 경건한 자가 겪는 환난의 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나중에 욥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전에는 하나님에 듣기만 했는데 이제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42:5).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환난은 인내와 연단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소망을 이룬다(롬5:3-4).  주님, 환난 날에 믿음을 무기 삼아 얼마든지 이겨내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2021.11.2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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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23. (화) 욥30:1-115  이제 욥은 좋았던 옛 시절은 사라져 버리고, 조롱과 저주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탄식한다. 특별히 우리는 재앙을 당한 욥을 조롱하는 악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가진 악이 어떤 것인지 확인한다.   1 가난한 자들이 서로 돕는 착한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자들도 많다. 욥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가난한 자들이 자신을 비웃는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궁핍하게 살아가고, 공동체 밖에서 살아가던 자들이 욥고 같이 부유했던 자가 재앙을 당해 자기들과 같은 처지가 되면 동종보다는 조롱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기뻐해야 한다. 혼자 외롭게 괴로워하며 탄식하는 지체가 없어야 한다.  2 욥은 자기가 이런 일을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자신의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과거의 힘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욥 앞에서 행동을 조심했던 자들이 방자해지며,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고(12-13), 욥은 두려움에 에워싸여 품위를 잃어버리고 만다. 욥의 탄식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비열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마치 정글과도 같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우리는 악인들의 자리에 서지 않고 그들을 막아서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는 생각을 버리고, 늘 다른 사람을 축복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전하는 축복의 사람임을 잊지 말게 하소서!

2021.11.2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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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22 (월) 욥 29:18-25 29장에 기록된 욥의 과거의 기억은 현재 자신이 재앙으로 인해 비참해진 상태와 커다란 비교가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누린 사람으로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보면서 구원받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자.  1 재앙을 당하기 전에 욥은 자신이 장수를 누리고 또 죽을 때 자기 집에서 평안히 숨을 거둘 것을 기대했다(18). 그전까지 늘 흡족한 삶을 살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자신의 영광(명예)이 새로워질 것으로 생각한 것은 계속 선행을 베풀었기에 사람들로 칭송을 받았다는 의미다. 이렇게 욥은 자신이 죽을 대까지 계속 새로워지고, 또 계속 도전하며 살아가리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를 바라보며 그날이 오기 전까지 하나님이 공급하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도전하는 삶을 꿈꾸고, 실천하길 소망하자.  2 재앙이 닥치기 전 욥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었다. 욥의 권면과 가르침이 얼마나 좋았으면, 사람들이 비를 기다리듯 욥의 가르침을 기다릴 정도였으며, 욥의 표정만 보아도 위로와 힘을 얻었다고 한다(23-24). 욥의 지혜 역시 사람들에게 으뜸으로 여겨졌고, 그의 위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였다. 성도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영적 훈련을 계속하는 것 역시 욥이 묘사한 것과 같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우린 복을 나누고 전하는 사람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우리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해야 한다.  주님, 세월이 갈 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위로와 격려가 되는 성도가 되게 축복하소서!

2021.11.2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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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20 (토) 욥28:12-28  세상 지식과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1:27).  1 ‘어디서 지혜와 명철을 얻을 수 있는가?”란 질문을 던지며 욥은 사람이 그 길을 알 수 없다고 진술한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진정한 지혜와 명철을 찾을 수 없고 어떤 귀한 것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학문을 동원해도 진정한 지혜와 명철을 얻을 순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만할 것이 아니라 한계를 가진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  2 사람이 지혜와 명철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이 지혜와 명철로 가는 길과 그것들이 있는 곳을 아신다고 진술한다. 모든 자연 법칙을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므로 창조의 능력인 지혜와 명철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소유할 수 있다(잠2:6).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받는 지혜와 명철을 구해야 한다.  3 욥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고 진술한다. 솔로몬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다”(잠9:10)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성도들에게 지혜와 명철을 은혜로 주시고, 이것들을 간직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게 하신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의 지혜와 명철을 따라 행하며, 세상의 모든 죄악을 멀리함으로(전7:7) 지혜와 명철이 충만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주님, 구원받고 성령을 받았으니 지혜와 명철로 충만하여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서!

2021.11.1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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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19 (금)  인간은 놀라운 능력고 지식을 갖추고도 정작 삶의 문제에 대해선 지혜를 갖추지 않았음에 욥은 탄식한다. 본문은 인간이 가진 능력에 대해 감탄하는 부분이다.  1 인간은 땅 속 광석을 얻으려고 깊은 곳까지 탐사하여 찾아내고, 위험한 갱도를 뚫고 캐낸다. 이는 어떤 동물도 갗추지 못한 능력이다. 하지만 이처럼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인간은 자기 생명의 참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는 가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2 인간은 다른 동물들은 절대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곳까지 들여다보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고 욥은 말한다. 땅 밑에는 뜨거운 용암이 있고 청옥과 사금같은 귀금속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만이 안다. 용맹한 짐승들도 가지 못하는 곳을 사람은 간다. 신체적으로는 동물들의 능력을 따를 수 없지만 지식과 지혜가 있다. 하지만 그 놀라운 지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자기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존재다.   3 바위를 조각하고 산을 뿌리까지 뒤엎을 정도의 능력을 갖췄고, 바위에 물이 흘러갈 길을 내거나, 물을 막을 수도 있고, 땅 아래 숨어 있는 보물을 찾아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인간이다. 사람에게 이런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지만, 그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욥은 탄식한다.  주님, 놀라운 문명을 이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생명과 삶의 문제에 무지한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복음의 사람들로 쓰임받게 하소서!

2021.11.1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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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18 (목) 욥27:13-23  세상에서 악한 세력이 의로운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악한 길을 따라 간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ㅇㅁ해 결국 악은 멸망하고 의로운 자가 승리할 것을 교훈한다.  1 욥은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과 악인이 전능자에게서 받을 산업에 대해 진술한다. 악인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을 의미한다. 악인이 세상에서 잠깐 복을 누리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저주받는 운명이 될 뿐이다(잠13?22). 욥이 지금은 어려움에 처했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란다. 현실에서 보이는 것이 결코 전부일 수가 없다. 결국엔 하나님의 말씀과 원칙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믿음을 갖고,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주의 공의를 따라 의로운 길로 행해야 한다.  2 욥은 악인에게 두려움이 홍수처럼 닥치고, 푹풍이 그를 앗아 갈 것이며,  동풍으로 악인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저주한다.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 영벌을 받을 것임을 의미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면할 수 없다(렘25:31). 이 세상에서 잘살고, 자손들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는 것이 최고의 삶처럼 살다가 평안히 죽음을 맞는 악인들을 보고 담력을 얻어 끝까지 악인의 길을 가서는 절대 안된다. 이는 착각이다.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히9:27).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3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궁지에 몰려도 의인은 그런 상황을 초월하여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히10:38).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약속을 믿음으로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기억하여 의로운 길로 행해야 한다. 세상의 많은 박해 속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의의 길로 행하는 자에게 주님은 영원한 생명과 복을 약속하셨다. 성도는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여 승리해야 한다. 주의 공의가 성취될 영원한 심판을 고대하며

2021.11.1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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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17 (수) 욥27:1-12  가장 친한 친구들로부터도 심한 말을 듣고 마치 버림받은 사람같은 상황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1 욥은 계속 비유를 들어가며 세 친구들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을 이어간다. 하나님의 숨결이 자기 코에 있다고 고백하는 욥은, 마치 전쟁에서 왕이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왕을 위해 싸우다 죽겠다고 맹세하는 장수과도 같은 모습이다. 자신이 살아온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5b-6) 욥은 불의와 거짓을 말하지 않겠고 친구들의 한 말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4-5b).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충성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의 본성과 신앙은 고난 가운데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의 입술에서도 욥과 같은 맹세와 다짐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지키자.  2 위로하겠다고 찾아와서는 정죄하고 욕하기만 했던 세 친구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지혜자로 인정받았을지라도, 결국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갈망하고 있다. 자기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하는 친구들을 악인이나 불의한 자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판정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욥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자기가 직접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다른 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돕는답시고 훈수만 늘어놓는 자들처럼 어리석고 무가치한 사람도 없다 (12). 차라리 욥 자신이 세 친구들을 가르치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다(11).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함을 확신하고 있었고 세 친구들보다 훨신 더 나은 지혜를 갖고 있었기에 담대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어떤 어려움이나 가난,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주를 바라보며 담당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참

2021.11.1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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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16 (화) 욥26:1-14  세상은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추상적 존재로 여기지만, 성도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창조주이시고 섭리주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1 욥을 위로하러 았다지만 세 친구들의 말과 행동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려 했을 뿐, 어려움에 처한 욥을 돕기 위해 그 지혜와 지식을 사용하지 않았다(3). 그래서 욥은 자기에게 한 말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는지 반성하도록 촉구했다. 상대방이 상처 받는 것을 고려하지도 않고 지식을 뽐내거나, 옮은 말이라도 사람을 돕는 데 사용되지 못한다면 참된 하나님의 지식이 말할 수 없다.  2 욥은 하나님이 자연현상을 주관하심을 믿었다. 지구나 천체에 관한 지식이 없던 시대 욥이 가진 지식은 영적 지혜의 결과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모든 자연현상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다스리시는 가운데 일어난 현상임을 욥은 고백한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직접 관리하시며 섭리하고 계심을 묘사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삶의 환경을 직겁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찬송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3 하나님은 자연만물뿐 아니라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며 심판하시는 주권자시다. 우리는 악이 흥왕하고 선이 악에게 지는 것처럼 보여도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이미 보이셨듯이 반드시 하나님이 악의 세력을 심판하실 것이다. 성도는 악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신 주님께 속한 자들이다.  주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1.11.1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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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15 (월) 욥25:1-6  지금까지 욥은 하나님이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시고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신다는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 현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반박했다. 빌닷은 욥에게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그저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표현했다.  1 빌닷은 하나님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권능과 화평과 주권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말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크고 옳으시다고 주장했다. 종종 자신의 실패나 실수를 하나님의 뜻이란 이름으로 쉽게 덮는 사람들을 본다. 하나님의 뜻과 주권이 잘못 인용 되어선 안된다. 남을 굴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순종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뜻 이야기를 해야 한다.  2 악한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지적하는 친구들의 말을 듣고 욥은 큰 재앙을 당할 정도의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죄인이란 사실은 틀림없다. 모두가 죄인이기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잊지 말아야 하고, 때로 당하는 가혹한 재앙이 인과응보의 원칙을 벗어나며, 하나님의 어떤 목적이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고난 중에 신앙을 놓치지 않게 된다.  고난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우리의 고난을 이기게 하며, 죄와 사망 권에 아래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소망이 진정한 해답임을 깨달아 감사하며 선포하는 생활이 되게 하소서!

2021.11.1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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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13 (토) 욥23:1-17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고, 위로는커녕 비난만 하는 친구들에게 더는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욥은 이제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1 욥은 자신이 당하는 재앙이 너무 컸음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런데 어디 계신지 알지 못해 답답해 한다. 자신의 말을 물리치지 않고 들어주실 것이란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을 정도로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었지만, 고난을 통과하는 기간 동안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고 느껴지기에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만 있었다면 이렇게 까지 힘들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확인할 수 있고 탄식하지 않아도 될 삶을 살아가게 하셨다 (롬5:8).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인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 안에 원망과 탄식이 끝난다.  2 욥은 자신이 무죄함을 확신했지만 하나님이 이를 알아주시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시험해 보시길 바랬고 순금처럼 정결한 상태가 입증될 것을 소망했다.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입증하는 신앙고백이다. 우리 역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릴 통해 주변 모든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요3:17).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우리의 구원이며 생명이란 사실을 확신하며 이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이름을 담대하게 선포하며 전하면서 살아야 한다.  주님,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길을 아시고 단련시키시고 순금같이 만드실 하나님을 더 굳게 붙잡으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2021.11.1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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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12 (금) 욥22:21-30  엘리바스는 욥에게 마지막 권면의 말을 하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해답을 욥에게 주면서 그대로 행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엘리바스가 제시하는 해답은 욥에게 결코 소망을 주지 못했다.  1 먼저 욥이 하나님과 화목해야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교훈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돌아가 불의를 멀리하고,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죄인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을 이룰 능력도, 말씀을 듣고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없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를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분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는 말씀 안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총을 받지 않는다면 엘리바스의 권면은 불가능한 제안에 불과하다.  2 엘리바스는 욥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복되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며, 그의 길을 형통하게 해 주실 것이기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책망하면 겸손히 그 책망을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그러나 그는 욥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고, 그저 욥의 현재 상황이 그가 죄인임을 드러낸다고 확신해서 회개를 촉구했다. 우리는 소위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힘없는 사람이 자기 앞에서 겸손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런 마음이 소위 ‘갑질’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이런 자세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교만함의 극치에 불과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회복의 축복을 먼저 삶을 통해 증거가 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2021.11.1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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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1 (목) 욥22:1-20  엘리바스의 마지막 발언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욥의 말을 들었던 엘리바스는 이제 자신의 주장을 좀더 견고하게 전한다.  1 욥에게 회개를 권했을 때 욥이 받아들이지 않자 두번째 발언에서는 좀더 격앙된 말투로 악인의 심판을 말하면서 욥을 염두에 두고 악인에 대한 저주를 선언했었다. 세번째 발언에서 그는 욥의 의로움이 하나님께 어떤 유익도 없다고 단언한다. 엘리바스는 욥의 악이 크고 죄악이 끝이 없다고 질책한다. 물론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유익을 끼칠 순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기뻐하시고 슬퍼하신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하나님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2 엘리바스는 욥의 학행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욥이 당한 고난을 근거로 그가 심각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추정했을 뿐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괴롭혔고, 도움이 필요했던 자들을 매정하게 대했고, 약자에겐 강하게 강자에겐 비굴하게 행동했고, 고아와 과부에게 매정하게 대했기에 이런 재난과 두려움이 가득해졌다고 저주했다. 거짓 소문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살인이다. 입술로 이웃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다.  3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모르신다고 말하는 욥의 태도를 지적하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무능하다고 하는 태도야말로 악인들의 특징이라고 엘리바스는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정확히 알고 계신다고 확신했다 (7:19; 10:6, 14; 14:3, 6). 그 사실 때문에 욥이 고통스러워했던 것이다. 남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가르치고 훈계하려 했던 엘리바스야 말로 거짓으로 남을 비난하는 악인이 되어버렸다.  주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함을 알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2021.11.1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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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수)욥21:17-34  악인들의 삶이 현실에서 여전히 형통하게 보인다. 악인이 반드시 벌을 받는다면 선인은 항상 복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도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욥은 고난 받는 자신의 삶이 결코 자신이 악인인지, 의인인지 말해 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 욥의 친구들은 현실에서 악인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심판받아 그들이 곤고해지는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런 일이 결코 자주 일어나는 않음을 알았다. 지금도 악인은 좀처럼 심판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많은 이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성도는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이란 기준을 절대 저버려선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형통함은 하나님 백성이 영원히 누릴 영광과 비교될 수 없다.  2 욥이 이 땅에서 인과응보를 주장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악인이 공정히 심판받는다고 한다면 악을 행한 당사자가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악과 악인들을 심판하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행하실 뿐이다. 욥의 친구들이 생각하는 이 세상의 질서가 실제로 적용되지 않고,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원칙의 틀 속에서만 행하는 분이 아니기에, 누구도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칠 수도, 하나의 원리를 강요할 수도 없다고 욥은 말한다.  3 친구들은 욥이 망해 버린 상황을 보면서 자신들은 욥과 달리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이런 친구들에게 욥은 이 세상을 똑바로 보고 말하라고 외친다. 현실은 악인이 멸망 당하고 더 큰 심판을 겪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멋진’ 죽음 조차 사람들의 부러움을 얻는다. 현실이 이런데 친구들은 말도 안되는 논리와 주장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척, 정죄하고 조롱하고 있으니 그들이 하는 말은 거짓이라고 욥은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해야 하는 일이다.  주님,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더디 온다고 영적으로 느슨하게 살아가지

2021.11.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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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11.11.9 (화) 욥21:1-16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이며, 악인이 결코 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이런 지적을 계속 들은 욥은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1 친구들의 논리로 하는 말에서 욥은 전혀 위로받지 못하고 있다. 욥은 친구들을 원망하거나 친구들과 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난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답을 얻기를 원한다. 상황을 다 이해하는 것처럼 자신을 정죄하는 말을 그쳐 달라고 욥은 부탁한다.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은 모든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 침묵하셨다. 주님이 잠잠히 공통을 감내하신 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 앞에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우리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2 자기 지식을 자랑하던 소발은 악인은 틀림없이 패망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잘살고 오래 살고 힘도 세다. 후손도 더 잘살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과 상관없는 것 같다.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살그리아간다. 그러나 욥은 그들이 이와같은 삶의 행복이 그들의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욥은 그들을 보며 억울해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악인이 부와 형통함을 누리는 경우도 많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지만, 그럼에도 욥은 그들의 형통함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았다. 주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며 그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 더 기뻐하게 될 것을 기억하며 오늘도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2021.11.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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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8 (월) 욥20:1-29 소발은 욥의 반론을 무력화하고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자기 의견을 내놓는데, 그 의견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한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이 문제다.  1 소발은 악인의 형통함이 일시적이며, 악인은 기쁨과 즐거움을 영원히 누리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소발은 악인이 누리는 재산과 소유물이 가난한 자들로부터 빼앗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권선징악의 결말은 모든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내용이다. 이런 세계관이 많은 이에게 위로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에 부당한 일이 많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법칙을 진리처럼 믿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아무런 잘못 없이 고통 가운데 있는 욥에게 소발의 주장은 특히 설득력이 없다. 2 소발은 악인이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에 보다 힘을 싣기 위해 심판을 내리는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소발은 욥을 악인 취급하고 정죄하면서, 욥의 상황은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시는 것을 규정했다. 즉 욥에게는 소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소발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몰랐고 죄에 대한 심판만을 강조하여 고난 가운데 있는 친구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나의 견해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행동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를 짓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말씀 위에 분명히 서 있음으로 남에게 쉽게 충고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중보하며 함께하는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1.11.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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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6 (토) 욥19:21-29 자신을 비난하고 저주하는 친구들의 말에 너무도 힘들어 한다. 그런 고난 속에서 욥은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고통을 나눠 줄 대속자를 기다린다. 1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현실 앞에서 욥은 친구들이라도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길 바랬다. 그러나 친구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군림하여 욥을 더 정죄하고 조롱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세우면서도 욥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들의 의가 거짓이란 뜻이다. 의로움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레19:18; 신6:5; 마22:37-40).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폄하하는 것만큼 교만한 모습도 없다 (약4:12). 2 보통 죄인들은 자신들이 한 말이나 행동을 숨기려 한다. 모든 죄악이 덮여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말들이 영원히 새겨지기를 바랬다. 욥은 자신을 고난 가운데서 건져 줄 대속자를 구하고 있다. 능력 없는 자를 대신해서 빚을 갚아 주는 대속자만이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속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속자로 오셨다. 우리 모두의 죗값을 완전히 대속해 주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을 매일같이 의뢰해야 한다.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마땅한 본분인줄 알고 구원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2021.11.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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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5 (금) 욥19:1-20 고난 앞에서 자신의 악함과 죄인 됨을 인정하지도 않고 계속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욥에게 빌닷은 회개하라고 강요했다. 오늘 본문은 빌닷의 꾸짖음에 대한 욥의 답변이다. 1 빌닷은 악인의 최후에 대해 강하게 욥에게 말했지만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욥은 오히려 친구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부서뜨리고 있다고 말하면서, ‘너희가 나에게 죄 때문에 마땅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는 너희는 나와 비교할 때 얼마나 더 의로운가’라고 지적한다.  이 고난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라고 다시 한 번 주장한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13:4)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현재 삶의 평안함을 근거로 죄의 경중을 쉽게 판단해선안 된다. 2 욥은 자신이 남들보다 더 큰 죄인이 아님에도 하나님이 엄청난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에 탄식하고 있다. 친구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원칙 아래에서 이뤄지는 파멸이다. 반면 욥은 하나님이 당신의 의지대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간섭 아래 일어나고 있는 욥의 고난은 악인의 파멸과 차이가 있다. 고난을 주신 분도,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욥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길 간구했다. 3 욥의 형제들, 알던 많은 사람들, 친척들, 종들도 욥을 외면했다. 아내조차 멀리하고, 가까웠던 친구들이 욥을 미워하고 조롱한다. 그 누구도 욥에게 진실된 위로자가 되어 주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에 누구를 위해 의지처가 되어 주지도 못하고, 진실한 위로자를 찾을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과 맺는 관계는 일반적인 인간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와 언제든 함께 하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과 함께하는 인생은 절대로 허무하게 끝나지 않는다.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자, 구원자이심

2021.11.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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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4 (목) 욥18:1-21 욥의 주장을 건방지게 생각한 빌닷은 화가 나서 욥의 답변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욥이 말을 가로채듯 자신의 말을 시작하면서, 욥이 당하는 고난은 그의 악행을 증명하는 것이라 확신하고, 악인의 최후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1 욥이 친구들을 마치 지각없는 짐승처럼 여긴다고 생각한 빌닷은 불쾌한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땅도 바위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욥의 주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서 욥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 감정이 격돌할 대 사람들은 서로를 거침없이 비난한다. 위로하고자 방문했던 원래 목적은 이제 사라졌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은 대화의 목적이 될 수 없다. 2 빌닷은 악인이 스스로 고난을 자초한다는 논리를 강조한다. 지금 아무리 의로운 척해도 욥이 당하는 고난은 욥이 악인임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빌닷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이같은 저주와 심판이 이미 임했을 것이다. 죽음의 파멸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심판하실 것이지만, 이 땅에서 의인이 항상 빛나고 풍족한 삶을 산다는 것은 잘못된 세계관이다. 3 빌닷은 악인의 최후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발언한다. 그 자신뿐 아니라 집안과 후손에게까지 임한다고 말한다. 후손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결국 망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의 최후에 대해 강조하면서 악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말한다. ‘알다’란 동사는 하나님을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깊이 아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 자는 곧 악인일 수밖에 없다. 그는 욥이 그런 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주님, 우리가 맞이할 죄인의 운명, 악인의 최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감당하셨음을 기억하며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인생으로 계속 살아가게 하소서!!!

2021.11.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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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3 (수) 욥17:6-16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마친 욥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서 다시금 탄식한다.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스스로 회복할 수 없다. 욥의 탄식은 완전한 도움을 바라는 또 다른 기도가 되고 있다. 1 욥은 자신의 처지가 사람들 사이에 속담거리가 되어 버렸음을 탄식한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 어떤 존중도, 위로도 받지 못한다. 근심에 눌려 욥의 눈은 어두워졌고, 자신의 존재 조차 무가치한 그림자처럼 되어 버렸다고 탄식한다. 고난을 당할 때 힘든 이유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고난과 불행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섣부른 판단을 경계할 수 있다. 주님은 죄인으로 고난 당하고 죽어가는 우리를 동정하시고 구원해 주셨다. 우리는 조롱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동정하고 구원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 친구들은 욥에게 무능한 권면으로 소망이 있다고 말해 왔고 지금도 어둠이 아침 빛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욥의 고난의 참된 이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에 욥에게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없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삶도 희망이 없는데, 욥 역시 자신에게 남은 생명의 시간이 길지 않다고 느끼며 절망하지만, ‘의인은 자기 길을 꼭 붙들 것을 고백하면서 죽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해명을 듣는 것이 소원임을 고백하고 있다(15-16). 욥이 그토록 갈구했던 생명보다 더 참된 생명을 하나님이 믿는 모두에게 주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 영적 생명이 그것이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을 가졌으니, 참된 소망을 갖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11.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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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2 (화) 욥16:18-17:5 친구들의 조언으로 자신이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욥은 시선을 하나님께 돌려 그분께 도움을 구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자기 중보자가 되어 주시기를 간구했다. 1 욥은 땅이 자신이 당한 모든 고난을 잘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땅이 자신의 억울함을 함께 호소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증인과 중보자로 하나님을 지목했다. 자신에게 비록 고난을 허락하셨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심을 믿었다. 욥의 간구에서 발견하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중보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욥은 막연히 하나님께 중보자가 되어 달라고 간구했지만,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 지금도 우릴 위해 중보하고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2 친구들은 고난 속에 있는 욥을 정죄하며 회개를 강요했고, 이들의 조언은 도움은 커녕 조롱이 되었다. 그러나 욥은 이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간절히 매우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우리가 가진 빚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때 보증이 필요하듯,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인이 되어 담보물을 주실 것과, 자신의 중보자가 되어 주실 것을 간구했다. 이처럼 우리는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만 찾아야 한다. 우리의 억울한 상황을 아시며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든 상황 가운데 의지하게 하소서!

2021.11.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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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1.1 . (월) 욥16:1-17 엘리바스가 욥을 불경한 자로 규정하고 정죄한 것에 대해 욥은 친구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 하며, 점차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고 있다. 1 친구들은 하나같이 고난의 원인을 죄라고 단정하고 욥에게 충고하지만, 능력 없는 말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 욥은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을 기억해야 한다. 헛된 조언과 충고를 피하고 위로와 격려의 말로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친구들에게 하소연하고, 그들의 말에 화를 내어도 근심과 아픔은 여전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심으로 사람이 자신이 당한 비극을 죄의 증거로 보면 참 억울하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증거가 된다. 비록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삶이라 해도 고난과 슬픔이 가득한 길이라 해도, 주와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된다. 3 욥의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에는 욥도 친구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 편에서 욥에게 회개를 강요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사람은 욥이었다. 욥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릴 때 인생은 풀리기 시작한다. 욥은 그 사실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변론하고 기도로 나아갔다. 주님, 하나님께 답이 있음을 알고 기도로 늘 나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