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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6 (월) 살전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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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6 (월) 살전5:12-22 본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주는 가르침의 마지막 부분으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고 섬길 때 지켜야 할 원칙과 각 개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을 살아갈 때 마음에 품어야 할 큰 틀을 제시한다. 1 교회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지켜야 할 첫째 덕목은 섬기는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초신자들이었기에 그들 가운데 세워진 지도자들에게 대한 영적 능력이나 탁월한 지식을 기대하긴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앞서서 섬기는 자들이 비록 부족하다 해도 그를 인정할 것을 권면한다(12). 그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야 그들 가운데 화목함이 이뤄질 수 있음을 가르친다(13). 세상은 더 큰 능력, 더 많은 인정을 받는가를 따지며 세우지만 교회는 모두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공동체이기에 그런 방식을 사용할 수 없다. 똑같이 나약한 인간임을 알고 말씀과 진리에 관련한 문제가 아닌 한 그를 인정해 주고 그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가 지켜야 할 덕목이다. 2 교회에서는 뒤쳐진 사람들을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 교회는 이런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게으른 자는 꾸짖고, 약한 자는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는 붙들어 주어 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 모든 사역은 ‘오래 참음’을 기본으로 한다(14). 무엇보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서로 선하지 않은 것을 본받아선 안 된다(15a). 세상은 뒤쳐진 이들을 ‘무능하다’며 내치지만, 교회는 모든 이를 붙잡고 함께 가는 공동체임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3 가르침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방법을 간략하게 가르쳐 준다. 즉, 어떤 거창한 과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놓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한다. 또한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풀어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갈 것을 강조했다(19-20). 끝으로 매순간 좋은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고, 좋

2024.8.24 (토) 살전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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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4 (토) 살전4:1-12 데살로니가에 단 3주밖에 머물지 못했던 바울은 성도들에게 아직 가르쳐야 할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 만은 꼭 기억하고 실천하라’고 할 만한 핵심 가르침을 본문에서 주고 있다. 1 우선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신이 가르쳤던 내용을 기억하고 실천하라고 권면한다. 신앙생활의 대원칙이 바로 ‘거룩함’이며, 거룩함을 지키지 않음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임을 강조한다(3, 7-8). 당시 사회적 부도덕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데 바울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고, 색욕을 따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율법도 자신과 가정과 이웃을 파괴하는 악행인 간음을 살인과 동등한 죄로 취급한다. 세상은 점점 더 부도덕한 영에 잠식되어 가고 있는 현 세대에서 우리 성도들은 세상의 음란한 문화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2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모든 형제 자매에 대해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기에 그 사랑을 계속 유지하도록 권면했다(9-10). 또한 성실히 일할 것을 권면했다. 신앙생활을 한다, 교회를 섬긴다는 이유로 직장이나 가정에서, 기타 사회적인 관계 가운데 맡은 일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 가정에서, 직장에서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면 그로 인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마련이다. 가정에서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은 함께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도록 저희를 부르셨으니 세상의 악한 문화와 단호하게 절연하면서도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 되게 하소서!

2024.8.23 (금) 살전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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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3 (금) 살전3:1-13 본문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쁨을 설명한다. 우리는 복음을 위한 헌신자로 서야 한다. 1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기도 전에 자신이 그곳을 떠나와야 했기 때문에 교회의 상황이 염려가 되었다. 바울과 동역자들이 예상했던 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4). 그래서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고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믿음을 붙잡아 주기 위해 디모데를 파송했다(2, 5). 그런데 놀랍게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여전히 견고했다는 것이다. 또한 영적 지도자를 보고 싶어 할 정도로, 지도자들을 향한 끈끈한 유대감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디모데가 돌아와 들려준 소식에 바울 일행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결코 헛수고가 아님을 알고 위로를 받았다. 세상이 주는 위로와 소망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생명의 풍성함으로 누리는 기쁨은 영원하다. 2 성도는 복음 안에서 굳게 서 있다고 하지만,선 줄로 생각할 때 항상 넘어짐을 경계해야 한다(고전10:12). 따라서 바울은 당장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만나러 갈 수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곧 하루 속히 다시 만나 믿음의 부족한 것을 채워 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다. 또한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이 넘치고(12),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거룩하고 흠 없는 교회로 계속 세워져 가기를 중보했다. 진정한 복음의 사람은 자신을 위하 기도보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더 힘을 다해 기도한다. 그럴 대 자신을 위한 기도의 영역세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주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가 결코 헛되니 않고, 오히려 놀라운 열매를 맺는 기쁨이 있음을 알아 끊임없이 주변을 돌아보며, 중보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소서!

2024.8.22 (목) 살전2: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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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2 (목) 살전2:13-20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지만 율법에 관심을 갖고 회당 예배에 참여했던 자들이었다 (행17:4). 헬라 문화에 익숙한 이들은 유대율법의 규례를 일일이 지킬 수 없었기에 회당에서 유대인들로부터, 또 동족들로부터 차별과 박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이 더 존귀한 자들이 되었다고 선포한다. 1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 말씀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또 유대에 있는 교회들을 본받아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동족에게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가족, 친구, 이웃, 동료 등 가까운 사람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길에서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도 끝까지 복음의 길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명백한 구원의 증거다. 2 유대인들이 일으킨 소요 때문에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데살로니가로 돌아갈 기회를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바울 일행은 마게도냐를 떠나 아테네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b, 행17:10-14). 그러나 바울은 자기 ‘얼굴’이 데살로니가에서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바울은 이들을 자신의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 영광이라고 고백할 만큼 소중하게 여겼다. 이처럼 성도 각 사람을 섬기며 성도들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일꾼이다. 주님,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착하고 충성된 일꾼’으로 매순간 살아가도록 성령의 기쁨과 용기를 더 하소서!

2024.8.21 (수) 살전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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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1 (수) 살전2:1-12 마게도냐의 세 도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 바울은 심한 고생을 했고 오래 머물지도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역을 헛수고로 여기지 않고,계속해서 사역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 이유가 뭘까? 1 바울은 데살로니가 직전, 빌립보에서 매도 맞고 옥에 갇히는 고생을 했다 (2; 행16:19-24). 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면 배척당하고 생명의 위협도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이며, 그 안에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동기, 속임수가 없기에 위험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했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동기였다(4). 우리의 신앙생활 모두가 불신자들의 눈에는 헛된 것으로 보이겠지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2 ‘종교 사기꾼’들은 아부의 말을 앞세우고, 인기를 얻으려 하지만 바울 일행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의 생명까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줄 수 있다는 자세로 성도들을 사랑했다. 사도의 권위를 세울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젖먹이를 양육하는 유모 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베풀었다. 이처럼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섬길 때,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얻을 수 있다. 3 바울은 한 영혼을 귀히 여겼다. 바울은 성도들 중 한 사람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했다. 이는 성도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9-10). 또한 모든 자녀에게 관심을 두는 아버지처럼 바울은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에 합당히 행하도록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알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을 위해 자기 노력과 시간을 바칠 자세가 되

2024.8.20 (화) 살전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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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는 온전한 돌봄과 양육 속에서 시작된 교회가 아니다. 설립 초기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시련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1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중 세워진 교회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경험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회심자들을 남겨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박해 속에 다 쓸려가 버릴 줄 알알던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갖고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3). 이는 복음을 깨닫고 확신시키시는 성령의 능력이었다(50. 성령은 환난 속에서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뻐할 수 있게 하신다(6). 많은 사람이 시련이 오면 자신의 힘으로 싸우다 패배한다. 성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싸우는 자들이다. 성령님을 기대하며 이뤄 가시는 역사를 기뻐할 때 우리는 얼마든지 영적 승리를 이룰 수 있다. 2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신앙이란 고난이 평안으로 바뀌고,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복 받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인 후 우상을 버렸고, 어떻게 하나님을 참되게 섬길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9).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소망했다(10). 성도는 시련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사실을 더 가까이 붙들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시련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장차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누릴 천국의 삶을 소망하자. 주님, 신앙의 여정 속에서 그 어떤 위기가 닥쳐도 그 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기뻐하고 우리를 건지시는 주님이 계심을 소망하는 든든한 믿음을 주소서!

2024.8.19 (월) 왕하25: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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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19 (월) 왕하25:18-30 열왕기의 본문은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열왕기의 대주제인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짚어 준다. 나라가 세워지는 것도, 성전이 세워지는 것도,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또 심판 받는 것도, 마지막에 작은 회복의 소망을 남겨 두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1 하나님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 계획, 책략과 상관없이 계획하신 일들을 진행하신다. 유다의 대부분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갔고 땅은 황폐해졌다. 그러나 주권적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남겨 두셨다. 그중 일부는 바벨론에 대항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 평안의 때나 훈육의 때나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한다면 소망이 있다. 2 열왕기의 마지막 부분인 이 본문에 여호야긴이 옥에서 풀려난 일을 기록함으로 소망이 있음을 암시한다. 언뜻 갑작스럽게 보이는 이 기록은 독자들이 이 기록을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비록 많은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어도 소망은 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훈육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뜻은 정하신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이며, 다윗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성취된다. 주님,온 세상이 우릴 향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비웃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얼마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음을 믿고 주만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