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2024.4.4 (목) 왕상1:38-53

Image
2024.4.4 (목) 왕상1:38-53 성경은 사람들의 선택에 따른 상반된 결곽를 매우 극적으로 분명하게 보여 준다. 솔로몬과 아도니야의 달라진 처지를 보면서, 우리가 선택하고 행동하기 전에 결과를 내다보고 상고하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다. 1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고 솔로몬의 왕위 등극을 공포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솔로몬이 마침내 왕이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무는 자는 복된 결과를 경험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의 재림 때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는 심판주요 왕으로 오시다. 그 날에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의 왕 되심을 기다리며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며 살았던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즐거움과 영광을 누릴 것이다. 2 아도니야는 한껏 들뜬 기분으로 자신이 초대한 사람들과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전하는 솔로몬의 왕위 등극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나 아도니야를 비롯해 향연에 모였던 모든 사람이 혼비백산했다. 아도니야는 자신의 망령된 행위가 죽음을 불러왔음을 비로소 깨닫고, 두려움 속에 달려가 제산의 뿔을 움켜잡았다. 이 행위는 고의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구제하는 수단이었는데(레4:7), 권력을 탐하며 반역한 아도니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규례였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하지 않고 자기 소욕대로 사는 자의 최후는 어떨까?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아도니야와 같이 자기가 왕 노릇하며 심판을 향해 가는 이웃을 참되고 유일한 왕이신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왕으로 다시 오시는 날 얻을 영광을 생각하며 오늘도 순종과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4.4.3 (수) 열왕기상 1:28-37

Image
2024.4.3 (수) 열왕기상 1:28-37 말년이 되도록 후계를 정하지 않아 논란의 원인을 제공한 것 같은 모습과 달리 다윗은 솔로몬을 후계로 정하는 모든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한다. 말로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행력이 떨어지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뭘까? 1 인간의 사심과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 다윗은 말년에 수많은 고난을 겪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항상 자신을 환난에서 건지셨음을 고백하는 무게감 있는 멩세를 통해 솔로몬을 왕위 계승자로 확정했다. 왕위 승계를 자신의 사후로 미루지 않고 즉각 선포하게 함으로 상황을 다시 역전시킨다(30).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사심과 달리 구별된 성도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2 다윗은 아도니야의 반역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신하들을 부른다. 오랫동안 왕국 수비를 맡았던 브나야,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다(32). 다윗은 솔로몬의 즉위식을 합법적 절차로 진행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한다. 특히 제사장의 기름 부음으로 신정 국가의 왕위 즉위식을 진행하고, 뿔 나팔을 불어 솔로몬에게 왕위가 승계되었음을 만천하에 공포하게 한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조급해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진행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3 본문은 브나야의 반응만 기록하고 있다(36-37). 대세인 아도니야의 반역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상황 속에서 아멘을 외치며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세를 따르거나 양다리를 걸치며 이해득실을 따지는 세상 속에서 우직하게 충성하며 명령에 순종하는 태도는 믿음의 눈이 열려 잇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를 현혹시키는 보이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삶에 풍성히 이뤄진다. 주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하며 나아가게 하셔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

2024.4.2. (화) 왕상1:11-27

Image
2024.4.2. (화) 왕상1:11-27 다윗은 노쇠하여, 신복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점점 아도니야에게로 흘러간다. 이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나단 선지자는 꿋꿋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 왕의 승계는 국가적 중대사다. 그런데 다윗은 건강상의 문제로 아직 왕위 계승을 확정 짓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조바심이 난 아도니야가 다윗도 모르게 스스로 왕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나단이 보기엔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은 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한 것에 불과했다. 이에 솔로몬의 어머니이자 다윗의 아내인 밧세바에게 이 사실을 알려 바로 잡을 잡을 것을 조언한다(13-14). 성도는 늘 깨어서 기도함으로 상황에 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2 밧세바의 행동은 무척이나 용감하다. 주저 없이 다윗을 찾아가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라 공포한 일을 왕에게 소상히 아뢴다. 대세를 본다면, 오히려 자신과 솔로몬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아도니야의 눈치를 살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밧세바는 선지자 나단의 조언을 따르는 믿음을 보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땐 하나님께 묻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주님이 뜻을 분명하게 알려 주신다면 지체 없이 행동해야 한다. 3 선지자 나단은 밧세바와는 또 다른 경우의 수를 가지고 다윗에게 나온다. 다윗에게 왕위 계승은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음을 다윗왕에게 조언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 국론의 분열과 국정의 혼란이 야기될 것이란 사실을 다윗이 분명히 알도록 은근히 상기시킨 것이다(26). 밧세바와 동역을 하면서, 사람의 욕심으로 밧세바의 아들 문제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어야 함을 강하게 권면한 것이다. 사람들은 동역보다 홀로 주목받는 주도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의 뜻이 이뤄져 영광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서로 힘을 주는 동역은 주 안에서 아름다운 일

2024.4.1. (월) 왕상1:1-10

Image
2024.4.1. (월) 왕상1:1-10 자만심은 우리를 어리석은 길로 이끄는 악이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과 그 뜻을 거역하며 자기 소욕대로 살아가는 길, 두 가지 상반된 길이 존재한다.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 이유가 뭘까? 1 다윗이 늙자 가문에서는 자연스럽게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었을 것이다. 아도니야는 발 빠르게 움직이며, 마치 자신이 후계자로 내정이나 된 것처럼 왕권을 나타내는 병거와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사람들을 늘 의식했던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은 아도니야와 함께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경과 외모를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면 엄청난 자만심에 빠진다. 자만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어리석은 선택으로 이끌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2 올바른 책망은 지혜롭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그런데 아도니야 주변에는 그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에 대해 책망하거나 조언하는 사람이 부재했다. 노쇠해진 다윗 역시 아버지의 역할을 재대로 할 수 없었다. 요압 장군과 제사장 아비아달 역시 악한 조력자였다. 충언해 줄 사람이 없으면 마음의 소욕대로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전7:5). 반드시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경건한 지체들의 음성을 듣고, 또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과시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주여, 하나님의 뜻을 겸비한 마음으로 받고 열린 귀로 들어,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2024.3.30 (토) 롬5:6-11

Image
2024.3.30 (토) 롬5:6-11 창조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확증이라면(롬1:20),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릴 향한 사랑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하나님 사랑의 확증인 십자가로 우리의 구원도 확증을 얻었다. 1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8).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릴 향한 하나님 사랑의 가장 분명한 증거다. 살면서 하나님에 대한 의문과 원망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클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흔들림 없고 가장 확실한 사랑의 확증이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확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에서 확실히 구원받을 것입니다”(9).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고, 그 결과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이다(갈3:13).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지 않는다(롬8:33-34).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의 확증인 또 다른 이유는 십자가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10). 십자가의 결론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의 구원이 확증된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확증이며, 구원의 확증인 주님의 십자가를 어떤 상황에서도 놓치지 말고 굳게 붙잡고 살아가게 하소서!

2024.3.29 (금) 눅23:44-56

Image
2024.3.29 (금) 눅23:44-56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건이며, 그 십자가 앞에서 참 제자가 드러난다. 1 주님의 십자가는 우주의 초점이다. 정오부터 3시까지는 해가 가장 밝을 때지만, 온 세상이 캄캄해졌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극적으로 반영한 초자연적 현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상한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성소 휘장이 이때 찢어지는 일이 생겼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던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 사라졌다(히10:19-20). 이제 우리는 은혜의 자리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 처형을 주관하던 이태리 장교는 예수님의 운명하심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이 의인이심을 고백했다. 주의 십자가는 철옹성 같던 영혼도 변화시키는 구원의 사건이다. 2 예수님께서 운명하셨을 때, 제자들은 현장을 피해 모두 숨어버렸다. 이때 아리마데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고, 시신을 받아 장례를 치르고 자신의 무덤에 안정했다. 유대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 중 한 명이었던 그는 하나님 나라를 진심으로 소망하던 자였다(51).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드러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주저하던 신앙이,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름으로써 참 제자임을 드러냈다. 이 또한 600여년 전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이 성취된 부분이다 (사53:9; 마27:57). 비록 요셉 자신은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쓰임 받은 선한 일꾼이 된 것이다. 주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쓰임 받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4.3.28 (목) 눅23:33-43

Image
2024.3.28 (목) 눅23:33-43 진리와 복음이 선포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 예수님의 양쪽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죄수들은 최고의 행운을 얻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33). 하나님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34a).이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라보며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얻느냐, 아니면 영원한 절망의 심판에 떨어지느냐가 결정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져 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영원한 심판에 빠질 것이다. 2 십자가 앞에 선 자들에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38).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구경만 할 뿐이다. 조롱하는 자들도 존재한다(35-37). 두 죄소중 한 명도 종교지도자나 군인들의 행위를 따른다(39). 어리석은 자들은 예수님이 용서와 구원의 길을 여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으로 오염된 세상의 상식에서 나오려 하지 않고, 영원한 파멸의 길로 걸어간다. 3 또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고백하는 자도 있다. 그는 자신이 처형당하는 것은 범죄에 대한 형벌로 당연하지만, 예수님께는 죄가 없음을 인정했다. 이는 구원에 이르기에 합당한 신앙고백으로 여겨졌다(40-41). 예수님의 죽음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 때문이라는 고백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다. 이어 이 죄수는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주소서’라고 간구한다. 그에게 구원은 먼 미래가 아닌 ‘오늘’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 편에 서는 것이다. 주님, 지금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과 복음을 비웃지만,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이 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