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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October, 2021

2021.10.3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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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30 (토) 욥15:1-16  데마 사람 엘리바스가 두 번째 변론을 시작한다. 그는 욥이 하나님께 항변한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번보다 한층 격한 말로 욥을 질책한다.  1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 경외하기를 그만 두었다고 판단하고 강한 어조로 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욥의 말을 헛되고 무익한 말로 여겼다(2-3). 욥의 말은 스스로 악인이라는 증거며, 자신이 욥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욥이 자기 말로 스스로 정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밤에 환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엘리바스지만(4:12-15), 친구의 탄식과 아품에 공감하지 못했고, 자신도 같은 죄인이며 한계를 가진 인간임을 느끼지 못했고, 고통의 소리를 오히려 꼬투리 잡아 정죄하는 자리에 서고 말았다.  2 앞에서는 자신의 권위를 신비적인 체험에서 찾았다면, 이번에는 욥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에서 욥을 꾸짖을 수 있는 권위를 확보하려 했다. 욥이 제일 먼저 난 사람도 아니고 창조 전에 출생한 존재도 아니기에 특별한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7-8). 또 자기를 포함한 친구들이 욥보다 지식이 많고 깨달음을 가진 근거가 연로함이라고 주장한다(9-10).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나이 많음으로 꾸짖는다는 것은 영적인 문제에 있어 사실상 어리석음일 가능성이 더 높다.  3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욥에게 하나님께서 은밀히 말씀하신 것이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욥이 불만을 터뜨리고 감사치 않고, ‘죄악을 물 마시듯 들이키는 추악하고 부패한 사람’으로 정죄하며 책망했다. 그러면서 나이, 지위 등에 근거해 자신의 말을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지혜’라는 주장으로 욥을 설득한다. 설령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다 해도 그 지혜로 누군가를 질책하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굴복시켜려 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혜가 될 수 없다.  하나님, 주가 주시는 참 지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신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2021.10.2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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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29 (금) 욥14:13-22  욥의 항변(13:20-14:22) 마지막 부분에서 욥은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죽음을 예상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은혜 얻을 수 있기를 구하고 있다.  1 지금까지 욥의 친구들은 욥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은 묵묵부담이셨다. 이제 지친 욥은 곧 죽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죽음 이후에 부활의 은혜만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죽음 이후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13). 죽은 자들이 머무는 스올(무덤)에서 고난의 기간을 견디다가 주님이 부르실 때, 부활의 날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다(14-15). 즉 하나님을 다시 만날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게 봉해 버리실 것을 소망한다(16-17). 재앙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욥은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의 은혜만은 잃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  2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을 마친다. 산과 바위, 돌, 땅과 같이 변함이 없을 것 같은 존재들도 결국 다 무너지는데, 인간이라고 어찌 사라지지 않겠냐고 자조한다(18-19). 죽고 나면 후손들과 별 상관없게 되는 것이 인간이요, 자기 슬픔에 잠기는 것이 다라고 고백한다. 모든 인간의 마지막이 죽음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죽음 이후에 소망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 영원한 삶과 부활의 영광을 주셨음을 감사하며, 영생의 기쁨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소서!

2021.10.2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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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27 (수) 욥13:20-28 이제 욥은 하나님께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옳고 그름을 놓고 항변의 기도(13:20-14:22)를 시작한다. 욥의 부르짖음을 통해 고통당하는 한 인간 욥을 만나고, 고통 가운데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보자. 1 욥은 하나님께 왜 일방적으로 폭행하시냐고 부르짖는다. 그래서 주의 손을 멀리 가져가시고, 주의 두려움을 거둬달라고 간청한다. 그런 다음에 자신을 불러달라 한다. 억울한 감정이 많을 욥은 절대적 섭리자이신 하나님께 ‘왜 내게 이런 일을 하십니까?’라고 따지듯 자기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이는 분명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그동안 쌓이지 않았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요청일 것이다. 2 이어서 욥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부르짖는다. 소발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허물과 죄를 잊은 것이면 생각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23; 11:6). 욥은 하나님께 어떤 위협도 될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께 해로운 일을 할 수도 없는, 그리고 생명이 길지도 않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괴롭히시냐고 항변한다. 이처럼 이유 없이 당하는 고난으로 인한 억울함은 참을 수 없는 억눌림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3 하나님의 침묵에 욥은 자기의 어린 시절부터 지었던 죄를 모두 기록해 두셨다가 한꺼번에 벌하시는 것이냐고 질문한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징벌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계속 감시하시다가 죄가 있을 때 지체 없이 벌하시려는 것과, 이미 썩은 물건, 좀먹은 옻처럼 된 자신에게 이런 형벌을 가하시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냐며 항변한다. 고통 앞에서 인간은 이렇듯 한없이 나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주여, 내가 한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위로하고,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매일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1.10.2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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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27 (수) 욥13:20-28 이제 욥은 하나님께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옳고 그름을 놓고 항변의 기도(13:20-14:22)를 시작한다. 욥의 부르짖음을 통해 고통당하는 한 인간 욥을 만나고, 고통 가운데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보자. 1 욥은 하나님께 왜 일방적으로 폭행하시냐고 부르짖는다. 그래서 주의 손을 멀리 가져가시고, 주의 두려움을 거둬달라고 간청한다. 그런 다음에 자신을 불러달라 한다. 억울한 감정이 많을 욥은 절대적 섭리자이신 하나님께 ‘왜 내게 이런 일을 하십니까?’라고 따지듯 자기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이는 분명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그동안 쌓이지 않았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요청일 것이다. 2 이어서 욥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부르짖는다. 소발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허물과 죄를 잊은 것이면 생각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23; 11:6). 욥은 하나님께 어떤 위협도 될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께 해로운 일을 할 수도 없는, 그리고 생명이 길지도 않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괴롭히시냐고 항변한다. 이처럼 이유 없이 당하는 고난으로 인한 억울함은 참을 수 없는 억눌림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3 하나님의 침묵에 욥은 자기의 어린 시절부터 지었던 죄를 모두 기록해 두셨다가 한꺼번에 벌하시는 것이냐고 질문한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징벌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계속 감시하시다가 죄가 있을 때 지체 없이 벌하시려는 것과, 이미 썩은 물건, 좀먹은 옻처럼 된 자신에게 이런 형벌을 가하시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냐며 항변한다. 고통 앞에서 인간은 이렇듯 한없이 나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주여, 내가 한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위로하고,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매일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1.10.2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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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26 (화) 욥13:1-19 재앙을 당한 욥을 위로하고 그의 회복을 도우려 왔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친구들은 무능함과 어리석음만 드러내고 말았다. 욥은 이들을 질타하면서 자신을 내버려둘 것을 요청했다. 1 친구들이 가르치려는 바는 자신도 이미 알고 있기에 이제 그들과의 변론을 그만두고 욥은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탄식하고 있었던 처음 7일이 가장 지혜로운 모습이었다(5). 누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명쾌하게 말할 수 있을까? 잠언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도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지혜롭게 여겨진다고 가르친다(잠17:28). 나의 지혜의 한계를 알고, 참된 지혜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 2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속지 않으시고, 변호가 필요하신 분도 아니다. 사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변호하려 했다기 보다는 자신들의 선입견을 변호하려 했고, 자기들은 욥과 같은 재앙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변호하려 했다. 이렇게 자기 생각과 이익을 지키려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들의 말은 결국 재처럼, 흙으로 쌓은 성처럼 무너질 뿐이다 (12). 3 욥의 친구들이 욥의 말을 반박한 큰 이유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자기들보다 의롭고 온전했던 욥에게 이런 재앙이 임했다면, 자기들에게도 이런 재앙이 임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두려움과 욥이 하나님께 계속 항변하는 것을 막지 않으면 또 다른 징계가 임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이 그들 앞에서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나도 좋네’라고 말하면서 자신있게 나선 것은 지금껏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으므로 하나님이 앞에 설 수 있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16). 최악의 상황에 놓였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만한 지혜도 없었지만,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결단했다. 주님,나의 생명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며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일하게 하나님 앞에 서 있게 하소서!

2021.10.2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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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25 (월) 욥12:13-25  욥은 친구들이 한 말은 짐승들도 다 아는 내용이라고 일갈한 후, 욥이 죄를 지었기에 재앙을 당한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강변한다.  1 친구들의 주장을 따르면 결국 하나님의 성품을 부정하게 된다. 욥은 지혜와 권능, 계략과 명철이 모두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의 섭리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만물의 움직임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진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 지혜와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논리나 추론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자들이 논리를 갖고 하나님의 진리를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선생이 되기를 피하며 우리의 무지를 더 깊이 알아야 한다.  2 욥의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었기에 재앙을 당했다’는 논리를 집요하게 주장하며 의로우신 하나님의 섭리는 이러한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사실을 욥은 밝힌다(17-22). 이처럼 세상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얼마든지 나타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민족들의 흥망성쇠, 왕과 지도자들의 운명 등이 의로운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23-25). 즉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해서 다 정의롭지는 않다는 말이다. 욥이 당한 재앙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지만, 인간이 가진 지혜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에 근거해 우리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태도는 없다.  주님,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도저히 파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니, 무엇인가를 안다고 생각하기 보단, 하나님이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1.10.2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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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23 (토) 욥11:12-20  욥을 꾸짖었던 소발은 그래도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가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욥이 탄식할 때 사용했던 표현들을 가져다 대응하는 식으로 문제를 바로잡으려 가르치는 자의 태도에서 소발의 한계를 분명히 발견한다.  1 소발은 욥을 ‘미련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12), 네 마음을 다잡으라고 결론 내린다. 소발은 욥이 자신의 죄를 잊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주를 향해 손을 들면 죄악이 생각나리라고 기대했다. 욥이 분명히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욥이 깨닫지 못하는 불의가 있기에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14).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면서(15; 참10:15), 죄악을 버리라고 촉구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오묘해서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더니, 지금은 그 지혜를 온전히 깨달은 듯 말한다.  2 ‘땅은 어둡고 빛도 어둠 같다’(10:22)는 욥의 탄식에 반박하면서 욥이 죄악을 기억하면 남은 날들이 정오의 빛보다 환하고 어둠 또한 아침처럼 밝아질 거라고 소발은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말에 ‘악인’을 언급하면서 만약 욥이 계속 자기의 입장을 고집하면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죽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게 된다고 경고한다(20). 결국 소발은 ‘욥이 자신의 죄악을 던져 버려야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죄를 지었으면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 가운데 깊이 숙고하지 않은 채 적용한다면 진리가 오히려 어리석음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주님, 나의 얄팍한 지식을 자랑하지 않으며,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도록 힘쓰게 하소서!

2021.10.2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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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22 (금) 욥11:1-11  엘리바스와 빌닷에 이어 소발이 욥의 탄식을 문제 삼으며 욥을 지적하고 책망한다.  1 소발은 욥이 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지적하면서 자기는 그저 듣기만 하려 했는데 욥이 말을 많이 하기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이 많은 자는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2-3). 욥의 친구들이 애초에 욥을 위로하려 왔기에 당연히 욥의 탄식을 들어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옳다. 소발 역시 나름대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자였겠지만, 그 역사 아픔을 당한 친구를 위로하지 못하고 자기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남을 탓하는 오류를 범했다.  2 소발 역시 재앙은 죄 때문이라는 확신에서 갖고 그나마 이정도가 다행이란 식으로 말한다(5-6). 그러면서 ‘하나님이 욥의 죄의 얼마를 잊는 은혜를 받았다’는 묘한 해석을 제시한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배치되는 주장이다. 죄를 잊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그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다.  3 엘리바스는 자신의 환상 경험에, 빌닷은 전통에 근거를 두어 논지를 전개했다면, 소발은 ‘하나님의 ‘비밀/오묘함’(7)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하나님은 의인에게 재앙을 주시지 않는데 욥이 이보다 더  극심한 재앙이 아닌 것을 오히려 다행처럼 말한다(5, 6). 하나님이 재판을 통해 욥의 악한 일을 다 보셨기에(10-11)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그저 하나님의 ‘오묘함’이라 말한다. 소발이 하나님에 대해 욥을 가르치지만 결국 자기는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른다고 고백하므로 그 역시 모순과, 역설의 논리에서 빙빙 돌고 있다.  주님, 말만 내세우는 삶이 아니라 삶으로 체험한 말씀의 지혜를 갖고 그것으로 주변을 돕고 섬기게 하소서!

2021.10.2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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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21 (목) 욥10:13-22  평소에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큰 고난을 당하면 신앙에 회의가 생기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의도를 해석하며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볼 것이다. 욥의 고백은, 우리가 영적으로 방황할 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1 욥은 하나님을 ‘사자’와 ‘군대’에 비유하여, 하나님이 막강한 힘으로 자기를 공격하기만 하시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고 한탄한다. 당연히 하나님의 의도를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다. 그래서 욥처럼 억울해할 때도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할 때도 있다. 하지만 영적 방황 끝에는 반드시 더 실질적이고 확고한 믿음이 남겨져야 한다. 결국 욥도 이런 과정을 거쳐 큰 깨달음을 얻고(42:5),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 서게 된다.  2 욥의 믿음을 하나님도 인정하셨지만, 욥은 매우 처절한 상황 속에서 극단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낙심, 슬픔, 우울, 아픔, 고통 가운데 있어서 죽음의 땅으로 내려가기 전에 잠시나마 쉴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낙담하기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 봐 겁낼 필요도 없다. 주의 구원만을 가장 간절히 바랄 때가 바로 이런 때다. 우리의 힘이 완전히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를 주님은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른다. 우리가 완전히 낙담했을 때, 주님의 섭리가 아니라면 납득할 수 없는 구원의 길이 우리 앞에 펼쳐지길 기도하자.  주님, 낙심하고 방황하는 그런 과정을 지날지라도 주께서 함께하셔서 결국 굳센 믿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믿고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하소서!

2021.10.2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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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20. (수) 욥10:1-12  욥이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모두 다 토로하는 것을 통해 그가 얼마나 깊이 하나님과 교제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욥의 고백을 통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더 간구하는 믿음을 소유하길 소망한다.  1 욥의 신앙은 고통 중에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꾸밈없이 그저 불평하고, 괴로움을 말하겠다는 욥의 태도는 지금껏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가깝게 느끼고 있었던가를 방증한다(1). 자기를 정죄하지 마시라고 요구하면서 대체 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려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과 지금껏 친밀한 관계였기에 거리낌 없이 나아가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이처럼 주님과 가깝게 교제하고 있던 사람은 하나님께 위로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2 욥은 답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따지듯 질문했다. 왜 악인이 더 지혜롭게 되기를 좋아하시며, 왜 사람처럼 왜곡된 시야를 갖고 계시냐며 멈춰 달라고 요구한다. 욥은 그만큼 하나님을 친밀히 느끼고 있던 것이다. 욥은 주님은 자신을 악하게 여기지 않으시며, 자신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런 확신은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지식에 근거한다. 또한  지금 자기에게 재앙을 주시는 것과 걸맞지 않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이토록 자신을 잘 아시는 분임을 욥이 잘 알고 있었기에 이처럼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었다.  주님, 욥이 비록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고 결국 회복되고 갑절의 은혜를 얻을 수 있었듯이,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2021.10.1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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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19 (화) 욥9:25-35  욥의 탄식을 들어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절망인지를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이 인간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면 경주자, 빠른 배, 독수리처럼 빨리 지나가 버리는 인생의 시간 가운데 아무런 복을 누릴 수가 없다고 욥은 탄식한다(25-26). 인간이 잠시라도 행복을 찾으려 해도 고통을 피할 수 없음은 인간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27-28). 종착점이 하나님의 심판대라면, 아무리 열심히 인생을 살들, 즐겁게 살았다고 한들 절대로 인생에서 큰 의미를 갖기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인생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음을 주위에 전해야 한다.  2 살면서 우리는 여러 종류의 고통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나 자기가 선악의 기준이 된다 해도 인간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결코 죄로부터 깨끗해질 수 없음을 욥은 탄식한다. ‘눈 녹은 물’은 당시 사람들이 가장 깨끗한 물로 여겼던 물이고, ‘잿물’은 세탁용으로 쓰였던 물이다. 이것들로 깨끗이 씻어도 결국 인간은 죄의 시궁창에 빠지게 마련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멀어지면 더러운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무가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3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현실 세계에서는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과 싸워야 할 경우 법원 등의 힘을 빌려 재판을 하는데, 온 우주에 하나님보다 더 강한 존재가 없으니 하나니모가 재판을 해서 이길 수도 없다(32-33). 욥은 자기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회초리가 빨리 사라지고, 하나님의 두려우신 위엄을 조금이라고 피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얻어맞고 있다고 느끼며 이런 탄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 죄를 범하고 또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저 고통과 절만밖에 남는 것이 없다.  주님, 우리 인생의 항해가 의미 있고 행복하기 위해선 그 목적지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복락이어

2021.10.1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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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18 (월) 욥9:11-24  사람이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선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하게 보이는 것은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욥의 고백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약함을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1 욥은 하나님이 앞에 지나가셔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움직임도 깨닫지 못한다고 진술한다. 또한 무엇을 빼앗으시면 아무도 막을 수 없고 항의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광대하심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겸손한 자세를 지녔기에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여 교만에 빠지고 함부로 말하여 하나님 앞에 입술로 죄를 범하기 쉽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앞에 자신은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2 욥은 자신이 의로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고, 단지 심판하실 하나님께 간구할 뿐이라고 고백한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권리도 내세울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 긍휼과 은혜를 간구하는 것만이 죄인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임을 의미한다. 성도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식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3 욥은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다고 탄식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 있음을 진술한다. 이는 욥이 의롭게 살았으나 사탄에게 재앙을 당하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것 또한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일어난 일임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기에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시며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망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악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을 잃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해야 한다.  무지하고 무능한

2021.10.1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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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16 (토) 욥8:8-22  앞서 엘리바스는 자기가 개인적으로 체험한 환상에 근거하여 주장을 폈다면, 빌닷은 자신이 지금까지 익히고 배운 전통에 근거하여 주장을 펼쳐 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빌닷의 결론 역시 어정쩡하다.  1욥을 격려하러 온 빌닷의 말은 욥을 책망하고 정죄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빌닷은 옛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8, 10). 인간이 짧은 인생 가운데 배울 수 있는 지식이, 오랜 세월동안 축적된 지혜보다 나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9). 나름대로 옳은 말이라 할지라도 어떤 상황에든 다 적용할 수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2 빌닷은 왕골과 갈대가 늪에서 무성히 자라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면 순식간에 시들어 버리는 것을 비유로 들면서, 욥이 이전에는 크게 번성했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갑작스런 재앙으로 망했다고 주장한다(11-13). 계속해서 그는 욥이 믿는 것과 의지해 왔던 것이 허망하여 넘어지고, 번성한 것처럼 보여도, 뽑히는 순간 왕골과 갈대처럼 시들어 버린다고 조롱한다(14-17). 오래된 진리를 제시하지만, 결국 욥을 위로하기 보다는 비난으로 결론을 내린다.  3 욥이 당대의 의인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빌닷은 ‘욥, 당신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는 식으로 슬그머니 수습하면서, 욥은 온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란 결론으로 수습한다(20-21).  즉 의인인 욥은 회복되고, 악인은 재앙을 당하게 된다고 얼버무린다. 하지만 지금 욥이 악인과의 갈등 때문ㅇ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기에 빌닷의 주장은 전혀 경우에 맞지도 않고, 욥에게 위로도 되지 못한다.  주님,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나의 교만을 없애시고, 남의 상황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규정하지 말고, 오히려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위로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2021.10.1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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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15 (금) 욥8:1-7  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빌닷이 욥을 정죄하기 시작한다. 욥을 책망하는 빌닷의 논리 속에는 합당하지 않은 관점이 있다. 우리 역시 빌닷과 같은 관점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곤 한다. 우리가 버려야 할 잘못된 관점들이 무엇일까?  1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이고 인간은 언제나 불의한 것은 맞다.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길 경우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빌닷은 욥이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공격했다. 고난의 원인이 죄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것 때문일 수도 있다. 무조건 죄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오만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 고난 가운데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며 진리의 길을 가도록 위로해야 한다.  2 욥의 자녀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고 빌닷은 정죄했다. 그러나 그는 욥의 자녀들에 대해 어떤 정보도 가진 것이 없다. 우리는 욥의 자녀들이 죄 때문에 아님을 안다. 인과법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고, 죄의 결과는 분명 사망인 것은 맞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 주님은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아 결국 자신이 받았던 은혜를 박탈당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넘치는 은혜와 용서를 받았다. 서로 용서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에 우리는 머물러야 한다.  주님, 온전하지 못한 지식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음을 알아, 은혜로 다가가고 연약한 자들을 품어주는 자로 쓰여지게 하소서!

2021.10.1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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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14 (목) 욥7:11-21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아왔던 욥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앞에서 원망을 시작한다. 극심한 고난과 극한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호소한다.  1 욥은 자신의 영혼이 아프고 마음이 괴로우므로 불평하겠다고 선포한다. 자신에게 가해진 고난이 부당하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바다, 바다 괴물)처럼 취급 받고 있으며, 하나님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쉴 수도 없기에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그만 끊어 주시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생명을 끝내거나 결정짓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자는 자신의 원망과 불평까지도 하나님 앞에 갖고 나아간다(사1:18).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그 모든 것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2 욥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기에 하나님이 이토록 괴롭히시냐고 따지고 있다. 17-18절은 시8:4-5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자신의 인생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욥의 불평과 원망은 여전히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을 나타낸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여, 때로 나의 믿음이 무색해질 정도로 나를 무너뜨리는 고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소서!

2021.10.1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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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13 (수) 욥7:1-10  친구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호소하던 욥은 하나님께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삶의 고됨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욥의 호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내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사람은 살아가면서 노동은 필수다. 낮에 일터에서 수고한 사람들에게 밤은 유일한 안식의 시간이다. 그런데 욥은 이런 기본적으로 누리는 안식조차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음을 비관한다. 육신의 질병 때문에 낮이나 밤이나 고통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고 탄식한다. 안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하나님을 향해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참된 안식이 필요하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에게 참된 쉼을 약속하셨다.  2 욥은 계속 인생의 허무함을 토로한다. 마치 생명이 바람이나 구름과 같기에 자신은 무덤으로 사라질 운명이라고 탄식하고 있다. 인생이 이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하나님이 속이 도우셔서 자신이 엮고 있는 고난을 없애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짧다. 이렇게 짧은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는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짧은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삶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우리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욥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신다.  주님, 소망 없는 세상의 방법들을 버리고 생명의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참된 구원의 은혜를 넉넉히 누리게 하소서!

2021.10.1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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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12 (화) 욥6:14-30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을 향해 죄에서 돌이키라고 권고했다.  욥은 친구들의 태도와 권면에 몹시 괴로워하면서 자신의 실망스러운 마음을 전한다.  1 진정한 친구는 내가 부족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나를 위로하고 동정하는 마음을 가져 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가르침은 동정이 아니었다. 욥은 이들을 ‘내 형제들’이라 부르면서 그들이 ‘흘러가는 시냇물(와디)’처럼 변덕스럽다고 말한다. 우기가 지나면 건천으로 변하는 개울처럼 도움이 필요할 때는 정작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친구들을 비유한 것이다. 이들이 욥의 상황을 보고 겁을 내며, 자신들도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을 본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면 결국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우리 마음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 깊은 사귐을 통해 동정과 위로가 넘쳐야 한다.  2 욥의 친구들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욥을 정죄하고 자신들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 욥은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책망의 근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 보라고 도전한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대화하자고 말한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은 정죄나 판단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죄인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향할 때 우리는 참된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주님, 정죄와 판단의 말이 아니라 이해, 공감, 위로, 격려하는 말을 통해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소망의 주께로 인도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2021.10.1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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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11 (월) 욥6:1-13  욥은 친구들을 향해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친구들이 자신의 고통의 깊이를 헤아려 주고 자신의 감정에 공감해주기를 바랬다. 우리가 고난 당하는 자들의 심정을 제대로 안다면 참된 위로도 가능할 것이다.   1 욥은 자신의 고난과 그로 인한 괴로움이 바닷가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탄식한다. 고난으로 인한 억울함과 낙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말들을 불평 섞인 어조로 쏟아 낸다. 사실 친구들이 자신의 비참한 심정을 알아주길 바랬다. 만약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쏟아 놓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듣는 것이 힘겨울 수 있다. 저들에게 귀 기울이며 위로하는 말로 다가간다면 고통 가운데 낙심하던 자들이 힘을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하자.  2 욥은 더 이상 자신에게 견딜 힘이 남아 있지 않음을 한탄하며 우울해한다. 자신의 육신도, 영혼도 무력해져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죄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자신의 생명이 끝나길 바란다고 하소연한다. 고통을 참아 낼만한 육신의 기력도, 정신의 기운도 남지 않은 상태를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때 이들을 책망하기 보단, 그들이 자신을 돌아보며 깨닫도록 이해와 사랑을 가지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언젠가 하나님이 그의 삶을 회복시키셔서 새로운 힘이 생기게 되면 그제야 자신이 했던 말들을 되돌아볼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 처한 자들이 무기력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도록 도우려면 그들의 곁에서 함께 슬퍼해 주어야 한다.  주님, 시련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기댈 수 있도록 따뜻한 위로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도와주세요!

2021.10.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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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9 (토) 욥5:1-16 점점 강한 어조로 욥을 정죄하는 엘리바스. 자신이 환상 중에 들었든 음성을 욥의 고난에 그대로 적용하며 욥을 꾸짖는다. 1 엘리바스는 죄인은 당연히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욥의 탄식은 분노와 시기에서 나온 것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과도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러한 자들 앞에서 의롭게 살아왔다고 자랑하고 있다. 어찌 사람이 겪는 모든 재난과 고난이 그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겠는가? 예수님은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다’(마7:2)라고 하셨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거기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친구를 긍휼히 여길 줄 모르는 것은 교만이요, 어리석음이다. 2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여 그분께 나아가라고 권면한다. 자신이라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의탁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근거로 회개를 촉구하고 은혜를 구하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때와 상황을 분별하지 못했고, 도움보다는 욥을 정죄했다(12-16). 엘리바스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뽐냈지만 사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웃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권면과 정죄하고 판단하기 위한 비난은 전혀 다른 것이다. 주님, 나의 의와 지혜를 뽐내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도울 수 있게 오늘도 주의 목적을 위해 나를 사용하소서!

2021.10.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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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8 (금) 욥4:12-21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욥을 판단했다. 악인들은 벌을 받고 의인들은 형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욥이 당하고 있는 특수한 고난을 일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 1 엘리바스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자기 말에 어떤 신적 권위가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는 꿈에서 본 어떤 영적 존재의 등장으로 크게 두려워했다고 한다. 종종 성경에서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는 통로로 사용되었었다.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바르게 계시되고 있다. 아직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꿈과 환상을 갈망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답을 주셨다. 2 당연히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으며 깨끗할 수 없다. 엘리바스의 주장은 욥이 아무리 잘나고 의롭다고 한들 진흙 집에 살며 하루살이보다 덧없는 인간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인 욥의 인생이 비극을 맞이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욥이 죄인이기에 당연히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판단하기 보다는 큰 고난을 당한 욥을 위해 중보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맞다.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엘리바스는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심판도 하시지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죄를 지를 짓지 않아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기에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을 정죄하거나 잘못 판단하기 보다 그 아픔을 헤아리며 중보기도하게 하소서!

2021.10.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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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 음성링크는 제공 되지 않습니다.  2021.10.7 (목) 욥4:1-11 욥의 푸념과 탄식을 들은 엘리바스는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삶의 연륜과 지혜가 쌓인 연배로 추정되는 그였지만 친구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했다. 고통 당하는 욥을 비난하는 엘리바스를 보면서 위로해야 할 사람이 피해야 할 행동은 어떤 것이 있을까? 1 욥의 탄식에 불편함을 느낀 엘리바스가 주저하며 말을 꺼낸다. 그는 경건하고 온전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실 것이기에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라고 말한다. 엘리바스에게는 선한 사람이 세상에서 불행한 결말을 맞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욥이 힘들어하던 이웃에게 했던 조언을 왜 스스로는 실천하지 못하느냐고 지적한다. 욥이 고통을 당하자 태도가 달라진 것으로 그를 비난했다. 우리 역시 상대방을 나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상대방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2 엘리바스는 계속해서 욥을 비난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실을 보시고 판단하시며 그에 따라 상벌을 정하신다는 것이다.  욥이 선한 사람으로 행세해 왔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악한 행위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 말이다. 인과응보 사상으로 욥을 비난했다. 그러나 살에서 항상 인과법칙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사건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법칙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선 안된다. 하나님의 공의도 있지만,  우리에게 베푸신 한없는 은혜와 자비로 고통 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돕고 세울 수 있도록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주님,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우리 역시 판단받을 것임을 기억하고,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기 보다 따뜻한 사랑으로 바르게 세워줄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하소서!

2021.10.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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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6 (수) 욥3:11-26 욥이 불안과 고통 속에서 느낀 혼란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본다. 그의 심리적 혼란에 공감하면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운다. 1 욥은 크나큰 고난을 겪으며 이 땅의 삶에서는 참된 만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듯하다. 자신이 태어난 그 순간마저 탄식하고 있다. 만약 자신의 삶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끝났다면 지금의 이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되었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과장된 표현을 했다고 볼 수 없다. 너무나 큰 아픔을 겪고 있을 때 우리도 욥처럼 한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이 닥치지 않았을 때 주님 안에서 안식했듯이, 고난이 닥칠 때에도 주 안에서 한탄하자.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사람을 돌보신다고 약속하셨다(사66:2). 2 욥은 자신이 지금 바라는 유일한 소망은 죽음 뿐이라고 말한다. 이세상에서는 만족과 위로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차라리 죽음이 가져다 줄 평안을 갈망한 것이다. 즉 죽음 이후의 평안을 구한 것이다. 욥의 탄식은 모든 사람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탄식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고, 인간이 누리는 부귀영화도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할 수는 없다. 죄 아래서 죽는 모든 인간은 영원한 절망과 고통 속에 던져지지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안식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주여,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안식을 줄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리며 그 평안을 전하는 복음의 증인의 사명을 매일같이 감당하게 하소서!

2021.10.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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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5 (화) 욥3:1-10 욥이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을 쏟아 놓는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그의 모습과 많이 달라 보이지만, 마음 속에 일어나는 고통을 표현하는 욥을 통해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하고 다뤄야 하는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것은 결코 그의 부모를 저주한 것도, 하나님을 저주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한 반응이다. 자신이 현재 당하는 시련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마음의 상태를 외면하다가 결국 더 깊은 낙심과 절망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건강하다. 살면서 고난이 닥쳤을 때 우리 안에 생기는 두려움과 슬픔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그러한 감정들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겸손히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누린다. 2 욥은 내면의 고통을 대면했을 뿐 아니라 탄식하며 표현했다. 하나님과 친구들 앞에서 입을 열어 토로했다. 참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정죄당할 것을 염려해서 자기 일을 숨기는 자도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 역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면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인생을 부끄럽게 보내고 있다고 한탄했다(렘20:18). 성도는 인생에서 절망과 낙심을 예외 없이 경험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상실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표현하라. 우리의 탄식에 귀 기울이시며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다. 모든 환란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주님, 다른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더하소서!

2021.10.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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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4 (월) 욥2:1-13 첫 번째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욥. 또다시 불어닥친 시험에서 욥은 건강을 잃고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이런 상황에도 욥은 범죄하지 않았다. 연속되는 시련 가운데 욥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승리의 비결은 무엇일까? 1 극심한 절망과 육신의 고통 속에서도 욥은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슬픔하고 탄식은 했어도 입으로 짓는 죄로부터 자신을 지켰다. 입은 참 다루기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혀를 길들일 수 없을 정도로 힘든 부분이라 말했다(약3:8). 길들이기 쉽지 않은 입을 제어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받으면서 생명의 위협도 많이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달라고 기도했다(시14:3). 우리의 말들은 우리가 당한 고난을 더 악화시키고 관계를 깨뜨리기 쉽다. 그 어느 때보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입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2 욥에게는 아내와 친구들 같이 가까운 관계들이 있었다.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은 욥에게 갑자기 고난이 찾아왔으니 그들도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특히 욥의 아내는 자신의 가정에 찾아온 고난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욥은 흔들리지 않았다. 욥의 친구들 역시 같이 슬퍼하고 크게 동정했지만 그들의 침묵 조차 욥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난이 우릴 찾아오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것이 우리다. 가까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누구도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두려움을 완전히 이해하고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이 순간에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결국 그 시련을 승리하며 통과하게 될 것이다. 주여, 많은 유혹 앞에서 입술을 지키게 하셔서 입술에 원망을 담지 말고, 믿음의 고백을 담게 하소서!

2021.10.0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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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링크 2021.10.2 (토) 욥1:6-12  하나님은 욥을 당신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인정하셨다. 사탄은 이런 평가에 대해 욥을 시험해 보라고 하나님께 도발했다. 과연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의심해 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1 사탄은 욥이 자신의 이기적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모함했다. 하나님이 욥을 보호하시고 그의 필요를 풍성히 공급하시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간다고 주장한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자들에게 복을 내려 주셨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런 복이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하 이유일까? 신앙은 과연 기복 신앙에 기초하는 것일까? 사탄은 우리의 믿음이 이런 복에 연연하며 기복 신앙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래야 주어진 상황이 바뀌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배반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다. 우리의 상황과 조건과 상관없이 예배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2 사탄은 욥에게서 복을 제하면 그가 하나님을 잊고 오히려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아시기에 욥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시고, 욥의 소유물을 사탄의 손에 맡기셨다. 욥의 삶에 닥친 고난이 그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드러낸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삶에 찾아오는 시련은 믿음의 동기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 내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오직 하나님 한 분이 가장 중요했으며 하나님과의 지속적이며 친밀한 관계가 믿음의 본질적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자세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주님, 주와 나누는 친밀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자 이유임을 알아 주를 더 알아가며 주를 더 기뻐하게 하소서

2021.10.0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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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10.1 (금) 욥1:1-5 본문에 욥이란 인물은 얼마나 온전한 삶을 살았는지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온전한 모습은 이후에 일어날 비극적 사건들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킨다. 성경이 온전하다고 평가한 그의 삶이 어떠했나? 1 우스 땅이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 추측하기엔 이스라엘 동쪽 에돔 땅으로 보기도 한다(애4:21). 분명한 것은 그는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이 아니다.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이토록 모호한 것은 아마도 이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유의미한 메시지임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이다. 성경은 그를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묘사한다. 가정을 잘 다스리고, 재산과 많은 종을 거느렸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훌륭하게 경영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2 욥은 관계 속에서도 좋은 본보기가 된다. 자녀들이 생일 때마다 잔치를 열어 형제간에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자기 가족 구성원들이 이렇게 화목하게 지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았고, 모든 자녀가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혹시라도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을까 봐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것을 걱정하여 일말의 범죄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았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 심지어 마음으로 지은 죄까지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 이런 삶을 성경은 ‘온전하다’고 평가한다(1). 주님, 욥의 ‘온전함’이란 표현에 감춰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매사에 경건한 신앙을 잘 지키게 하소서!

2021.09.3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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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9.30 (목) 딤전6:11-21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의 사역을 위임하고 당부하기 위한 서신이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1 바울은 디모데에게 앞에서 말한 ‘이것들’ 즉 돈을 사랑함으로 생기는 유혹, 올무, 해로운 욕심, 고통 (9-10)을 피하고,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를 따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권면한다(11-12). 디모데가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증언했기 때문이다.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치 하나의 의식을 진행하듯 엄숙한 어조로 디모데가 주님 오실 대까지 흠 없이, 책망받을 것 없이 명령을 지켜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14-16). 우리 역시 이 선언문과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교회를 섬기는 자들로 세워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2 마지막 추신처럼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교회에서 가장 급하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두 가지 사역을 강조한다. 하나는 가난한 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특별히 부유한 자들을 독려하는 것이고(17-19), 또 하나는 거짓 선생들을 내쫓은 후 그 영향력이 교회에 남아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20-21). 어리석은 자는 재물이 자신의 생명까지 보장해 주는 걸로 착각한다. 어리석은 부자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하자(눅12:19-20). 성도는 영원하지 않은 재물을 영원한 생명을 위해 투자하듯이 재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취하는 은혜를 덧입어야 한다. 무의미하고 끝없는 논쟁이나 변론은 성도 개인에게나 공동체에게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해가 될 뿐이다. 우리는 번드르르한 말이 아니라 삶으로 경건을 증명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이 세상으로 보내셨으니, 세상 가치를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2021.09.2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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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9.29 (수) 딤전6:1-10  바울은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공적으로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하며 사적으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1 당시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기에 종과 주인이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관한 의문이 교회 안에서 심각한 문제였던 것 같다. 종과 상전이 같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종은 오히려 상전을 이전보다 더 잘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의 가르침이 비방받지 않게 해야 한다(1). 두 사람이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종은 상전을 더 잘 섬겨야 한다(2a). 이것이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사회의 모순을 혁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섬김으로 교회는 극복해 갔다.  2 ‘너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권면하여라’(2b)는 이제 서신의 결론부분에서 중요한 사항을 요약하겠다는 의미다.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거짓 교사들을 징계하고 내쫓는 것이 디모데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책무였다(4). 아무리 겉으로 경건해 보여도 실제로는 거짓 경건을 통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 불과하다(5). 어디서나 주의 사람들에게 악영항을 끼치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의 지도자에게도 공동체에 악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일이 가장 힘들지만 중요한 사역이다.  3 ‘자족함을 지닌 경건은 큰 유익이다’(6)로 읽으면 원문에 가장 가깝다. 바울은 디모데가 모든 성도들에게 재물에 대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이것으로 만족하는’(8) 태도를 갖도록 가르치라고 권면한다. 재물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결국 파멸을 당하는지 모른다(9-10).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와 에베소교회를 사랑했고, 모든 주의 사람들이 참된 부유함을 누리기를 원했기에 ‘자족하는 삶을 살라’고 강조한 것이다.  주님,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함을 깨닫고, 일만 악의 뿌리인 욕심에 이끌려 다니지 않도록 말씀에 따라 경건한 삶을 계속 살아가게

2021.09.2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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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9.28 (화) 딤전5:17-25 교회의 혼란을 수습하고 재정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매우 민감한 장로들에 관한 문제를 언급한다. 지금까지의 교회 리더십과 구제에 관련된 가르침에 비해 장로들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1 ‘장로’(헬. ‘프레스뷔테로스’)는 원래 ‘노인’ 혹은 공동체의 ‘지도자’란 뜻을 가진다. 본문에 의하면 장로는 교회에서의 존경의 대상이며, 특히 설교와 가르치는 장로 (teaching elder or pastor) 혹은 목사에게는 재정적인 지원을 명령한다(17-18). 아마도 거짓 교사들에 의해 촉발된 교회의 혼란과 관련해서 장로/목사들에 대한 ‘고소 문제’를 신중히 다룰 것을 권면했다. 장로들을 존경하고 함부로 의심하지 않도록 하되 범죄 사실이 분명하다면 모든 사람 앞에서 공적인 징계가 이뤄져야 한다. 중요한 직분을 맡았으면 그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 장로들의 죄에 대해 다루는 일의 민감성을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엄히 명령하노니’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디모데에게 편견이나 불공평함 없이 그 문제를 다루도록 했다(21). 함부로 안수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없도록 경고했다(22). 바울이 이렇게 쓴 것은 교인들에게 장로들의 잘못에 대해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비판하지 말도록 가르치기 위함이다. 또한 ‘술’에 대한 경계(3:2, 3, 8)의 말씀과 달리 디모데의 속병을 위해 포도주를 약용으로 조금씩 쓰도록 권했다. 3 교회의 문제는 수학 문제처럼 답이 정확하게 나오는 일이 아니다. 자기 힘으로 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기거나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죄와 선행을 드러나게 하신다고 디모데를 격려하면서,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뢰하며 충성되게 대처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주님, 지도자는 모든 성도에게 본이 되기 위해 힘쓰고, 성도는 지도자를 존중하며 동역하게 하셔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계속해서

2021.09.2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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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9.27 (월) 딤전5:1-16 교회는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임과 동시에 구제함에 있어서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 바울은 구제 사역에 있어 섬김의 대상에 따라 경우에 맞게 대응해야 함을 강조했다.  1 당시 모든 종교의 사제나 제사장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특별한 존재감을 과시하거나 권위주의적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교회 사역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로 교인들을 바로잡는 책임에 더하여 성도들을 가족처럼 대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권위를 갖고 있지만,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권위주의적 태도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 2초대교회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사역이다. 우선 ‘참과부들을 존대하라’고 바울은 명했다(3). 당시 과부들 중에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한 여인들도 있었던 모양이다(6-7). 홀로 되신 어머니나 할머니를 부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의무다(8). 믿음의 공동체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이처럼 세밀하게 살피고 돌봐 줌으로써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해 고통 당하지 않도록 섬겨야 한다. 3 바울은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를 규정하는데, 교회가 공식적으로 후원해야 할 과부들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면서(9-10), 젊은 과부들에 대해 상당한 경계를 보였다(11-13). 아마도 당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휩쓸린 자들 중 젊은 과부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15). 또한 도움을 줄 친척이 없는 과부를 후원하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상황과 형편과 처지에 따라 교회는 우선순위를 정해 도움의 손실을 펼쳐야 한다. 주님, 섬김의 기회를 허락하실 때 섬길 대상을 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른 섬김으로 주의 선을 이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