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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April, 2024

2024.4.4 (목) 왕상1: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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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4 (목) 왕상1:38-53 성경은 사람들의 선택에 따른 상반된 결곽를 매우 극적으로 분명하게 보여 준다. 솔로몬과 아도니야의 달라진 처지를 보면서, 우리가 선택하고 행동하기 전에 결과를 내다보고 상고하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다. 1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고 솔로몬의 왕위 등극을 공포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솔로몬이 마침내 왕이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무는 자는 복된 결과를 경험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의 재림 때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는 심판주요 왕으로 오시다. 그 날에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의 왕 되심을 기다리며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며 살았던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즐거움과 영광을 누릴 것이다. 2 아도니야는 한껏 들뜬 기분으로 자신이 초대한 사람들과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전하는 솔로몬의 왕위 등극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나 아도니야를 비롯해 향연에 모였던 모든 사람이 혼비백산했다. 아도니야는 자신의 망령된 행위가 죽음을 불러왔음을 비로소 깨닫고, 두려움 속에 달려가 제산의 뿔을 움켜잡았다. 이 행위는 고의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구제하는 수단이었는데(레4:7), 권력을 탐하며 반역한 아도니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규례였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하지 않고 자기 소욕대로 사는 자의 최후는 어떨까?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아도니야와 같이 자기가 왕 노릇하며 심판을 향해 가는 이웃을 참되고 유일한 왕이신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왕으로 다시 오시는 날 얻을 영광을 생각하며 오늘도 순종과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4.4.3 (수) 열왕기상 1: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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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3 (수) 열왕기상 1:28-37 말년이 되도록 후계를 정하지 않아 논란의 원인을 제공한 것 같은 모습과 달리 다윗은 솔로몬을 후계로 정하는 모든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한다. 말로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행력이 떨어지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뭘까? 1 인간의 사심과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 다윗은 말년에 수많은 고난을 겪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항상 자신을 환난에서 건지셨음을 고백하는 무게감 있는 멩세를 통해 솔로몬을 왕위 계승자로 확정했다. 왕위 승계를 자신의 사후로 미루지 않고 즉각 선포하게 함으로 상황을 다시 역전시킨다(30).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사심과 달리 구별된 성도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2 다윗은 아도니야의 반역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신하들을 부른다. 오랫동안 왕국 수비를 맡았던 브나야,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다(32). 다윗은 솔로몬의 즉위식을 합법적 절차로 진행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한다. 특히 제사장의 기름 부음으로 신정 국가의 왕위 즉위식을 진행하고, 뿔 나팔을 불어 솔로몬에게 왕위가 승계되었음을 만천하에 공포하게 한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조급해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진행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3 본문은 브나야의 반응만 기록하고 있다(36-37). 대세인 아도니야의 반역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상황 속에서 아멘을 외치며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세를 따르거나 양다리를 걸치며 이해득실을 따지는 세상 속에서 우직하게 충성하며 명령에 순종하는 태도는 믿음의 눈이 열려 잇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를 현혹시키는 보이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삶에 풍성히 이뤄진다. 주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하며 나아가게 하셔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

2024.4.2. (화) 왕상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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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2. (화) 왕상1:11-27 다윗은 노쇠하여, 신복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점점 아도니야에게로 흘러간다. 이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나단 선지자는 꿋꿋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 왕의 승계는 국가적 중대사다. 그런데 다윗은 건강상의 문제로 아직 왕위 계승을 확정 짓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조바심이 난 아도니야가 다윗도 모르게 스스로 왕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나단이 보기엔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은 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한 것에 불과했다. 이에 솔로몬의 어머니이자 다윗의 아내인 밧세바에게 이 사실을 알려 바로 잡을 잡을 것을 조언한다(13-14). 성도는 늘 깨어서 기도함으로 상황에 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2 밧세바의 행동은 무척이나 용감하다. 주저 없이 다윗을 찾아가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라 공포한 일을 왕에게 소상히 아뢴다. 대세를 본다면, 오히려 자신과 솔로몬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아도니야의 눈치를 살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밧세바는 선지자 나단의 조언을 따르는 믿음을 보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땐 하나님께 묻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주님이 뜻을 분명하게 알려 주신다면 지체 없이 행동해야 한다. 3 선지자 나단은 밧세바와는 또 다른 경우의 수를 가지고 다윗에게 나온다. 다윗에게 왕위 계승은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음을 다윗왕에게 조언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 국론의 분열과 국정의 혼란이 야기될 것이란 사실을 다윗이 분명히 알도록 은근히 상기시킨 것이다(26). 밧세바와 동역을 하면서, 사람의 욕심으로 밧세바의 아들 문제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어야 함을 강하게 권면한 것이다. 사람들은 동역보다 홀로 주목받는 주도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의 뜻이 이뤄져 영광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서로 힘을 주는 동역은 주 안에서 아름다운 일

2024.4.1. (월) 왕상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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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1. (월) 왕상1:1-10 자만심은 우리를 어리석은 길로 이끄는 악이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과 그 뜻을 거역하며 자기 소욕대로 살아가는 길, 두 가지 상반된 길이 존재한다.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 이유가 뭘까? 1 다윗이 늙자 가문에서는 자연스럽게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었을 것이다. 아도니야는 발 빠르게 움직이며, 마치 자신이 후계자로 내정이나 된 것처럼 왕권을 나타내는 병거와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사람들을 늘 의식했던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은 아도니야와 함께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경과 외모를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면 엄청난 자만심에 빠진다. 자만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어리석은 선택으로 이끌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2 올바른 책망은 지혜롭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그런데 아도니야 주변에는 그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에 대해 책망하거나 조언하는 사람이 부재했다. 노쇠해진 다윗 역시 아버지의 역할을 재대로 할 수 없었다. 요압 장군과 제사장 아비아달 역시 악한 조력자였다. 충언해 줄 사람이 없으면 마음의 소욕대로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전7:5). 반드시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경건한 지체들의 음성을 듣고, 또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과시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주여, 하나님의 뜻을 겸비한 마음으로 받고 열린 귀로 들어,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2024.3.30 (토) 롬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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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30 (토) 롬5:6-11 창조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확증이라면(롬1:20),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릴 향한 사랑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하나님 사랑의 확증인 십자가로 우리의 구원도 확증을 얻었다. 1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8).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릴 향한 하나님 사랑의 가장 분명한 증거다. 살면서 하나님에 대한 의문과 원망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클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흔들림 없고 가장 확실한 사랑의 확증이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확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에서 확실히 구원받을 것입니다”(9).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고, 그 결과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이다(갈3:13).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지 않는다(롬8:33-34).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의 확증인 또 다른 이유는 십자가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10). 십자가의 결론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의 구원이 확증된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확증이며, 구원의 확증인 주님의 십자가를 어떤 상황에서도 놓치지 말고 굳게 붙잡고 살아가게 하소서!

2024.3.29 (금) 눅23: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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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9 (금) 눅23:44-56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건이며, 그 십자가 앞에서 참 제자가 드러난다. 1 주님의 십자가는 우주의 초점이다. 정오부터 3시까지는 해가 가장 밝을 때지만, 온 세상이 캄캄해졌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극적으로 반영한 초자연적 현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상한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성소 휘장이 이때 찢어지는 일이 생겼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던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 사라졌다(히10:19-20). 이제 우리는 은혜의 자리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 처형을 주관하던 이태리 장교는 예수님의 운명하심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이 의인이심을 고백했다. 주의 십자가는 철옹성 같던 영혼도 변화시키는 구원의 사건이다. 2 예수님께서 운명하셨을 때, 제자들은 현장을 피해 모두 숨어버렸다. 이때 아리마데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고, 시신을 받아 장례를 치르고 자신의 무덤에 안정했다. 유대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 중 한 명이었던 그는 하나님 나라를 진심으로 소망하던 자였다(51).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드러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주저하던 신앙이,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름으로써 참 제자임을 드러냈다. 이 또한 600여년 전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이 성취된 부분이다 (사53:9; 마27:57). 비록 요셉 자신은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쓰임 받은 선한 일꾼이 된 것이다. 주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쓰임 받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4.3.28 (목) 눅23: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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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8 (목) 눅23:33-43 진리와 복음이 선포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 예수님의 양쪽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죄수들은 최고의 행운을 얻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33). 하나님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34a).이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라보며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얻느냐, 아니면 영원한 절망의 심판에 떨어지느냐가 결정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져 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영원한 심판에 빠질 것이다. 2 십자가 앞에 선 자들에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38).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구경만 할 뿐이다. 조롱하는 자들도 존재한다(35-37). 두 죄소중 한 명도 종교지도자나 군인들의 행위를 따른다(39). 어리석은 자들은 예수님이 용서와 구원의 길을 여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으로 오염된 세상의 상식에서 나오려 하지 않고, 영원한 파멸의 길로 걸어간다. 3 또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고백하는 자도 있다. 그는 자신이 처형당하는 것은 범죄에 대한 형벌로 당연하지만, 예수님께는 죄가 없음을 인정했다. 이는 구원에 이르기에 합당한 신앙고백으로 여겨졌다(40-41). 예수님의 죽음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 때문이라는 고백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다. 이어 이 죄수는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주소서’라고 간구한다. 그에게 구원은 먼 미래가 아닌 ‘오늘’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 편에 서는 것이다. 주님, 지금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과 복음을 비웃지만,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이 걸어

2024.3.27 (수) 눅23: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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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7 (수) 눅23:13-25 예수님의 재판은 불의한 군중의 함성이 진실을 가린 불의한 재판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무리의 강요에 따른 빌라도의 불의한 판결을 순순히 따르셨다.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와 가룟 유다의 배신과 빌라도의 그릇된 십자가형 언도의 결과였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란 것을 알았지만, 군중들을 요구사항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들의 소리에’ 굴복한 것이다 (23). 군중의 소리가 정의의 소리보다 크게 들렸던 것이다. 우리는 들어야 할 소리, 따라야 할 소리를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2 예수님의 석방도 자신의 정치에 이용하려는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동정심을 자극할 방안을 생각해 냈다.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석방하는 유대 전통을 언급하며, 살인을 저질러 옥에 갇힌 바라바는,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그가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한 명을 선택하라고 했을 때, 예상과는 반대로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군중은 요구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다. 바라바가 자유를 얻는 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신 것이다. 주님, 바라바처럼 주님 때문에 자유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세상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4.3.26 (화) 눅22:3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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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6 (화) 눅22:39-53 예수님은 체포되시기 직전까지 기도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다. 반면 제자들은 기도에 깨어 있지 못했다. 그 결과 칼을 을 휘둘렀음에도 시험에 넘ㅇ어지고 말았다. 1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감람산에서 기도하신 것은 특별한 행동이 아니었다. 주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신 것이다(39). 주께서 이곳을 자주 찾으시는 것을 가룟유다로 알 정도였다(21:37). 가장 중요한 위릅한 순간에 기도로 승리하기 위해선 평소에 기도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다니엘 역시 왕의 조서가 내려졌지만 늘 하던 대로 기도했던 하나님의 사람이다(단6:10). 그의 기도 습관은 왕의 조서보다 강했고, 사자의 입도 막았다. 예수님의 기도 습관은 십자가를 앞둔 큰 위기에서 승리하게 했다. 2 주님은 같은 기도를 세 번 반복하셨다(마28:44).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고 그러나 내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란 기도였다(42).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주님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고후5:21)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시는 영적 고통 때문이다(갈3:13). 3번이나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신 것이다. 가룟유다가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베드로는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베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 뜻을 구했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온전히 십자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3 제자들이 피곤한 상태였으니(마26:43), 예수님도 당연히 피곤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의 피곤함에 굴복하지 않고 더욱 간절히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기도로 올리셨다(히5:7).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께 힘을 더하게 하셨다.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 떨어졌다. 사력을 다한 기도였던 것이다. 피곤에 지쳐 기도할 힘도 없는가? 주님은 치명적인 시험을 아시고 기도하려 명하셨다. 기도에 실패하

2024.3.25 (월) 눅2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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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모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님의 적극적인 순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권세 잡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의 모범이 되셨다. 1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모의를 시작했지만, 백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1-2; 19:47-48),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가룟 유다였다. 유다가 배신하는 장면에서 누가는 ‘사탄’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마치 욥과 같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참소로 고난을 당하셨다(3; 욥1:6). 예수님을 넘기는 대가로 돈을 받은 유다는, 악인들이 두려워하는 무리가 예수님 주위에 없을 때를 찾아서 알려주는 것이다. 세상에는 사탄의 음모를 따르는 악한 무리들이 있다. 예수님은 이처럼 세상의 악한 자들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고, 그들의 모의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다시 살아나셔서 사탄의 권세를 파괴하셨다. 2 지금까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되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유월절 양으로서 죽임을 당할 준비를 하신다 (7; 막14:12). 유월절 식사 장소를 얻는 것도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남자’를 통해 순례인들로 붐비던 예루살렘에서 빈방을 찾을 수 있었다(11-12).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제자들이 계속 경험하게 하심으로 이 식사가 일반적인 유월절 식사가 아나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특별하게 준비된 것임을 알려 주신다. 당신을 죽이려는 모의를 모르실 리 없으신 주님은 그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시며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셨다. 주님, 이 고난 주간이 예수님을 따라 그 영광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깨닫고 예수님만을 따르기로 다시 헌신하는 계기가 되게 하소서!

2024.3.23 (토) 시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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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3.23 (토) 시60:1-12 본 시편은 다윗의 신하 요압이 에돔에게 크게 승리한 사건이다. 1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흩으시고, 그들에게 분노하셨다고 탄식한다. 주의 백성을 어려움에 처하게 하셨다고 탄식한 것을 볼 대,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해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임을 의심치 않았기에 담대히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의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다. 2 다윗의 탄식과 간청 후에 하나님이 주신 승리이 약속들이 제시되고 있다. 다윗은 언급된 이스라엘의 모든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한 후, 누가 자기를 견고한 성, 에돔으로 인도하겠느냐고 탄식한다. 마치 하나님께 당장 약속을 이행해 달라는 요구처럼 들린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것만큼 미숙한 신앙도 없다. 날마다 주와 친밀한 관계를 누려야 어려움 앞에서도 담대히 기도할 수 있다. 3 다윗은 하나님께 ‘왜 우리 군대와 함께하시지 않느냐’며 원망한다(10). 자신들의 힘으로는 에돔을 정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용감하게 싸우겠다는 다짐과, 하나님이 결국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는 노래로 마친다(12). 다윗은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불평과 원망의 표현까지 써 가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주께 시선을 고정할 때, 하나님은 놀라운 승리를 허락하신다. 주님, 모든 상황 속에서 다윗처럼 하나님께 담대하게 간구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2024.3.22 (금) 시5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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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2 (금) 시59:1-17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원수에게서 건지시며 당신의 다스리심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비록 우리가 삶에서 빛과 어둠의 갈등을 경험한다 해도,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다. 1사울이 사람을 보내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 시편이다 (삼상19:1119).비록 다윗이 어떤 잘못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호소한다. 악을 악으로 맞서지 않는 것은 아름답다(벧전2:19-20). 하나님의 백성은 원수에게 악을 되갚지 말고, 만군의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5).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7). 하나님은 반드시 주의 백성을 건지신다. 완전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자. 2 이 시에서 다윗은 원수들을 심판하실 때, 죽이지는 말라고 간구하는데, 그 이유는 주의 백성이 하나님이 원수를 보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11). 단순히 원수에 대한 보복이 다가 아니라, 주의 백성이 꼭 알아야 할 진리를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진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관자란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 전능하심을 증명한다. 이로써 진리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시58:11). 심령의 평안은 하나님이 주신다(16-17). 세상을 향해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로 맞서 승리하는 굳센 믿음으로 오늘도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자. 주님, 우리의 순종과 하나님을 신뢰함을 통해 하나님이 온 세상을 진리로 다스리심을 분명히 드러나게 하소서!

2024.3.21 (목) 시5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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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1 (목) 시58:1-11 온갖 불의와 범죄의 소식이 난무한 이 땅에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케 하시기 위함이다(롬13:4). 그러나 완전한 정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만이 정의로운 심판주가 되신다. 1 하나님은 통치자들에게 권세와 더불어 사명도 주셨다. 그런데 정의를 말해야 할 때 침묵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야 할 때 유보하는 것은 죄다. 불의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갖고 태어나지만, 시인은 악인이 모태에서부터 죄인이라고 말한다. 회개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악한 행위다. 죄인에게 주시는 용서의 복음을 듣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와야 한다. 통치자가 정의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는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는 악인의 모습과도 같다. 2 시인은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6-7). 왜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셔야 할까? 물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선하셔서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햇빛과 물을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의인을 신원하시며,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고 고백한다(11). 하나님의 심판은 무고한 고통을 받는 자에게는 위로와 소망이요, 혼란과 불법으로 치닫는 세상으로 하여금 그 악에서 돌이키도록 한다. 주님, 죄와 불의가 있는 세상의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완전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