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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March, 2021

2021.3.3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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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수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31 (수) 마27:11-26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죄성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깨닫고 늘 깨어서 회개하는 심성으로 살아야 한다.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을 극악한 죄수로 몰아 죽이는 악행은 타락한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의 결과다. 1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법적 책임은 재판관이었던 빌라도 총독에게 있다. 그는 예수님께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풀어주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무책임한 결정을 한다. 바라바를 대신 풀어주면서, 자신은 손을 씻으면 무죄한 핏값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선 용기와 희생이 필요하다. 우리는 때로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선택하고 그 길로 당당히 나아가야 한다. 2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예수가 기적을 행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해 많은 사람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것에 위협을 느낀 것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다. 예수님 체포와 거짓 증인을 세우고, 군중을 선동하고 십자가형을 끌어내는 일을 주도한다. 빌라도를 협박하기까지 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도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은 가장 거룩한 척하면서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이런 악행의 이유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욕망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욕망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3 군중은 한때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이적에 칭송과 지지를 보냈던 자들이다. 그러나 그분이 연약한 모습으로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되자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댄다.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자신들의 욕망이 채워지지 못할 것으로 보이자 대적이 되었다(요6:26). 오늘날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로 여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자신을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드려 하나님을 기쁘

2021.3.3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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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30 (화) 마27:1-10 이제 예수님은 대제사장에 의해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지셨다.  1 대제사장을 비롯한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지만(1), 사형선고는 로마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새벽에 공회가 모이는 것이 유대법으로 불법이기도 하고, 무고한 주님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유월절은 지키려고 하는 왜곡된 신앙을 발견한다. 신앙이 종교행위가 된 분명한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교회도 다니고, 예배는 참석하지만 일상에서 거짓과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면 하나님은 가증한 자로 여기실 것이다. 일상에서 의를 이루기 위해 힘쓰고, 불의와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2 마태는 가룟 유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선언한 것을 기록했다.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27:25)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음도 본다(4). 유다가 은 삼십을 성전에 던져 넣지만 그것이 성전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데 사용된 것 또한 스가랴11:13의 성취이기도하다. 이처럼,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있음을 본다. 3 스가랴 선지자의 경험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험이 합쳐져서 말씀이 성취되었다. 스가랴는 자기가 치던 양떼를 버리는데, 그때 어떤 이들이 그 양떼를 끌어가면서 스가랴에게 은30을 대가로 지불한다. 하지만 스가랴는 그 돈을 토기장이에게 준다(슥11). 예레미야는 토기장이를 하나님으로 비유했고(렘18:1-12; 19:1-15), 또 땅을 사기도 했다(렘32:6-9). 유다는 예수님을 버린 값 은30을 자기가 갖지 못하고 성전에 던졌고, 마치 예레미야가 땅을 산 것처럼 그 돈은 성전에서 쓰이지 모하고 땅을 사는데 사용된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을 통해서라도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 주여,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심판의 자리에 들지 않게 하시고, 항상 믿음의 길을 가게 하소서!

2021.3.2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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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 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29 (월) 마26:69-75 기도로 준비한다는 것은 참 중요하다. 앞에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과 적들 앞에서 전혀 두려움 없이 당신의 정체성을 밝히심으로 그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깨어 있지 못했던 베드로는 자기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1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그것도 점층적으로. 한 여종 앞에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했고(69),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며 여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둘려댄다(70). 아무리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았다 해도(16:16),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각오했다고 공언해도, 결정적으로 겟세마네에서 실패한 것이 이토록 자신을 연약하게 만든다. 성도에게 기도는 이처럼 중요하다. 2 첫째 여종은 ‘갈릴리 사람 예수’(69)라고 불렀는데, 둘째 여종은 ‘나사렛 예수’라고 더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뜰 밖으로 도망가려는 베드로의 정체를 더 잘 아는 여종이 묻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한다(72). 도무지 맹세하지 말고 모든 말이 진실이 되게 하라고 가르치셨건만(5:33-37), 베드로는 맹세하면서 거짓말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깨어 기도하지 않을 때 어떤 상태로까지 전락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3 이제는 여종이 아닌 주위의 사람들이 더 구체적으로 증거까지 제시하며 베드로의 정체성을 추궁한다. 베드로의 갈릴리 방언이 부인할 수 없는 증거라고까지 말한다(73). 하지만 정작 베드로는 점점 더 강하게, 심지어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베드로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없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세상에서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온 지난 과거를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의 제자임을 밝히 드러내야 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 베드로의 비참한 실

2021.3.2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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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토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27 (토) 마26:47-56 보통 사람의 눈에는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교권자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 반란 주동자 정도로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1 ‘열두 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예수님께 가장 가까운 자에게 배신당하셨음을 부각시킨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많은 무리가 무장하고 나타났다. 그는 예수님께 입 맞추는 것을 신호로 배신하는 장면에서 유다의 야비함을 느낀다.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 중 그 누구라도 배신자가 될 수 있으며,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겠다고 고백하는 우리 역시 유다의 자리에 서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늘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 2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칼을 휘두르며 저항한 제자 베드로를 저지하시면서(요18:10),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가르치신다. 주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님을 가르치신 것이다(51-52).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군대를 동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주님은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즉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죽임을 당하시는 길을 선택하신 것이다(53-54).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선택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따라야 한다. 3 사실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은 성전에서 더 쉬웠을 것이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체포가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예수님의 주도적 선택으로 이뤄졌다는 증거다. 오직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성경을 이루기 위해 잡히셨던 것이다. 함께 깨어 기도하라는 요청도 들어줄 수 없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가 버렸다.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에 절대 동참할 수 없었다. 결국 예수님은 이렇게 홀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의인으로 말씀을 온전히 이루셨다. 주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기꺼이 걸어가신

2021.3.2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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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금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26 (금) 마26:36-46 십자가의 때가 눈앞에 닥친 시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하신 두 가지 부탁을 모두 들어드리지 못했다. 1 예수님은 제자들과 겟세마네 (“기름 짜는 곳”) 동산에 가셨다. 당신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이 그곳에 함께 있기를 원하신 것이다. 또 변화산에 동행했던 세 제자(17:1)들을 조금 더 가까이 데리고 가셔서, 당신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거기 머물러 함께 깨어 기도할 것을 부탁하신다(37-38). 여태껏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을 언급조차 안하시던 분이 이때는 하나님의 섭리를 피하고 싶다고 하실 정도로 심각한 고통을 겪고 계셨다(39). 이런 상황에선 그 누구라도, 그분의 곁을 떠나지 말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다짐하고 장담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연약한 육신은 시험을 이겨 낼 수가 없다(40-41). 깨어 기도함 없이 세상의 공격을 이길 수 없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부탁을 우리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2 주님의 둘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잔을 마시겠다는 결단이 중심에 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잠에 빠져 주님을 기도로 도와드릴 수가 없었다. 이들을 주님은 책망보다는 안식을 주신다(45). 또 제자들에게 “함께 가자”라고 하신 말씀은 마치 아가서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사용한 사랑 표현 같다(아2:10, 13). 제자들은 잠만 잤는데도,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신다.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 주님과 함께함이 우리에겐 큰 복이기 때문이다. 주님, 제자들의 실패를 교훈 삼아 주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늘 깨어서 함께 기도하고, 주와 함께 걸어가는 제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1.3.2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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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목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25 (목) 마26:17-35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하나님 아들의 권세로 12제자와 새 언약을 맺으셨다. 1 유월절 만찬 중에 예수님이 12명 중 한 사람이 당신을 팔 것이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20-21).  예수님은 바로 곁에 있던 가룟유다의 배신을 아셨다. 이는 유다에게 내미시는 주님의 마지막 손길이었는데, 가룟 유다는 끝까지 주님의 ‘새 언약’을 받지 않고 배반의 길을 선택했다 (23; 요13:25-30).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고 당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 2 주님은 유월적 식사의 떡과 포도주로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신다. 유월절 식사 때 사용하는 떡을 당신의 몸, 포도주를 당신의 피라고 하시면서 이를 먹고 마심 (믿고 받아들임)으로 당신과 하나가 되는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26-28). 예수님은 임박한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당신을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셨으며, 성부의 나라에서 제자들과 함께 새것으로 함께 마시는 그날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은 ‘나실인 서원’을 상기시킨다(민6:3-4). 우리는 이처럼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 바치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섬기고 따르는 신실한 새 언약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3 제자들이 모두 도망갈 것까지 알고 계셨지만(31; 슥13:7), 주님은 부활 후에 그들을 다시 만나시기 위해 갈릴리로 가실 것이다. 배반하고 도망갔지만, 주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찾으시고 사랑하셨다. 모두들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지만(33, 35), 주님은 제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를 능력이 없음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더더욱 주님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릴 구원하셨음이 그저 은혜일 뿐이다. 이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각자의

2021.3.2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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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 수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24 (수) 마26:1-16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으실 때 그 배경에 주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자들과 기름 부음에 반대하는 제자들이 있었다. 1이제 예수님은 유월절에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3-4). 유월절 명절 기간에는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려 했지만(5), 실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는 주께서 음모에 ‘당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예수님이 주도하신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비참한 십자가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광의 자리로 바꾸는 섭리를 이어 가셨다. 2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제자들은 이를 낭비로 여기고 분개하면서 기름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이는 이 기름 부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기름 부음은 주님의 ‘장례를 위함’이며, 왕이신 분이 곧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제자들도 미처 깨닫지 못할 정도로 초라한 곳에서 간소하게 치뤄진 주님의 기름 부음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서나 계속 전해질 중대한 사건이다. 대적하는 종교지도자들 무리와 제자들의 분개와, 유다의 배반 가운데 주님은 장차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왕이 되실 것을 여인의 기름 부음을 통해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뤄진다. 3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신하고, 의도적으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얼마를 주겠느냐?’고 제안함으로 노에 한 명 정도의 가격인 은 30세겔을 받고 자신의 스승을 팔아 넘겼다(15). 예수님을 열심히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떠나는 배교자가 될 수 있음을 마태는 경고한다.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그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주님, 탐욕을 좇아 멸망의

2021.3.2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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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23 (화) 마25:31-46 진정한 사랑은 갚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우릴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베푸는 것이 사랑받은 자의 마땅한 모습이다. 1 예수님은 영광으로 재림하시면 모든 민족을 모으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구분하실 것이다(31-32).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보좌 오른편에 서기를 원하신다(딤전2:4). 그것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고, 전도자들을 보내셨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반대편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오른편에 서도록 이끌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2 오른편에 속한 자들에게는 주어지는 상은 바로 ‘나라’다. 오른편에 설 수 있는 자의 자격은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35-40). 바로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의 의미를 주님은 6가지에 걸쳐 설명하신다. 곤궁한 처지에 있는 ‘형제’를 돌보는 것이다. 선행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선행과 구제의 여부로 심판하시는 이유는, 온전한 믿음이 온전한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온전한 삶이 없는 것은 그 안에 온전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3 반대편 사람들을 표현하는 단어는 ‘저주’다. 그들에게 예비된 것은 마귀와 영원한 불이다(41). 이들의 죄목은 의인들이 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괴롭히고 강탈해서가 아니라 그저 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충격이 아닐 수 없다(42-45).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책망받은 것처럼, 이들은 작은 자들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아서 심판을 당하게 된 것이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약하고 가난하고 도움이 절실한 사람에게 손을 펼치는 행위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실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임에 틀림없다. 주님을 믿노라 고백만 하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

2021.3.2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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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22 (월) 마25:14-30 예수님의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그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1 다른 나라에 가게 된 주인이 종들에게 5 달란트, 2달란트, 1 달란트를 맡겼다. 1달란트는 일용 노동자의 하루 품삯(데나리온)의 6000배다. 약 16년 동안의 품삯에 해당하는 거금으로, 충분히 사업을 벌일 수 있는 액수다. 첫 두 종들은 열심히 장사해 각각 5달란트, 2달란트를 남겼다. 이들은 주인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았다(19-23). 이처럼 우리가 받은 재능이나 처한 환경이 모두 다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당하는 역할이 달라도 주님이 보시기엔 모두 동등함을 기억하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재능을 작게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섬기는 데 있다. 2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다른 결말을 맞는다. 그는 주인의 돈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다고 핑계를 댔다(24-25). 그는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곡식을 모으는’ 불로소득을 구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혹시 자기가 장사를 하다 손해를 봐서 주인에게 벌을 받는 것보다는 그저 손해 없이 돌려주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인이 불로소득을 바라는 자로 판단했다면 그 돈을 돈놀이하는 자들에게 맡겨 이자라도 남기는 것이 맞다(26-27). 화가 난 주인이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었다. 사실 주인은 종들에게 맡겼던 달란트와 장사해 남긴 달란트를 모두 종들이 갖도록 한 관대한 사람이었다(28-29). 그러나 주인을 오해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게으른 종은 밖으로 내쫓김을 당했다(30).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주께서 맡기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열심히 섬겨 더 많이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이다. 주님, 주께서 제게 맡기신 사명을 위해 허락하신 달란트를 헤아리고

2021.3.2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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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토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20 (토) 마24:36-51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은 분명하다. 문제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알려 주신다. 1 그 누구도 주님의 재림 시기를 알 수 없다. 오히려 늘 주님의 재림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른 자세다. 그러지 않는다면 재림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재앙과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37-39). 문제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져도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징조가 보이지 않기에, 같이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될 것이다(40-41).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강조하셨다(42).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의 재림이 임해도(43-44)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매일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적 긴장감을 절대 늦춰선 안될 것이다. 2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방법은 바로 주인 되신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밖에 없다 (45-46).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면 다시 오실 주님께 큰 상을 받는다고 약속하셨다(47).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주를 섬기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절대로 재림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고, 두려운 책망이 있음을 우리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가? ‘언젠가 오시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만 같고, 그 믿음이 내 생활방식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당장 고치자! 실제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자! 주님, 주님 다시 오시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가치 있게 사용하는 지혜와 결단을 주소서!

2021.3.1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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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금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19 (금) 마24:29-35 지금도 자기가 재림한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이지 종교 지도자나 시한부 종말론을 가르치는 집단들이 많이 있는데, 과연 성도는 주님의 재림을 어떤 자세로 기대해야 하나? 1 주님은 재림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분명히 알려 주셨다. 대환난이 끝나고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지는 이전에 없던 현상이 일어난다(29).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같은 천체가 변하고 하늘에 징조가 나타난다. 승천하셨던 모습처럼 구름타고 (행1:11)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신다. 큰 나팔 소리가 들리고 천사들이 온 세상의 선택된 자들을 모을 것이다(31). 예수님의 초림은 평범한 목수의 아n들로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지니고 임하실 것이다. 우리 마음에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2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나오는 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듯이 재림의 때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32). 정확하게 몇일부터 여름이 시작인지는 모르지만 여름이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시대의 상황을 보면서 재림이 가까왔음을 인식하고 천국의 일꾼으로 살아가라고 당부하신다(33).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37년후 예루살렘이 함락(AD 70)되었듯이, 모든 일들의 징조가 이미 시작되었다. 지금 언제라도 주님 오심을 준비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재림을 준비하지 않고 재림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도의 마음에는 언제나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한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에 대한 기대를 회복하고, 오늘 이 땅에서

2021.3.1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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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목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18 (목) 마24:15-28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세상의 종말에나 있을 법한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 함락이 단지 구속 역사의 중심축이 옛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이동하는 계기일 뿐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1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우상이 선 것을 보면 즉시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신다(15-16). 마치 룻이 소돔을 빠져 나올 때 주저하거나 뒤돌아보지 말아야 했던 것처럼, 그곳을 빠져나올 때 주저하지 말라고 하신다 (17-18; 창19:17). 임신한 여인들이나 젖먹이 아이를 둔 여인들에게는 큰 어려움이 되기에 주의를 집중해 대비해야 했다 (19-21). 실제로 AD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무너뜨렸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새 시대가 시작되는 사건임을 분별하고 도망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우리는 전통과 상징에 얽매여 새 시대를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선 안된다. 2 성전 파괴는 유대인에게 기존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종교적 정체성이 뿌리 뽑힐 사건이다. 이렇게 사상적 기틀이 무너지면 각종 거짓 가르침이 나타나기 마련이다(23-24).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엘리에셀 벤 야일이란 사람이 그리스도를 자처하여 유대 열심당원들을 ‘마사다’란 곳으로 집결시켜 결사항전을 벌였다. 성도는 예수님이 다시 오셨다는 식의 거짓에 속아선 안된다. 주님의 재림은 결코 일반적인 모습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 전역에서 동시에 알 수 있게 이뤄질 것이다(27).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거짓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있어야 한다. 주님, 부수적인 것에 마음 빼앗겨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말씀에 집중하여 분별력을 갖고 살아가게 하소서!

2021.3.1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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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수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17 (수) 마24:1-14 성도는 말세의 징조를 잘 파악하여 멸망 받을 자들과 정반대의 길로 행하여 영적 승리를 거둬야 합니다. 1 성전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가장 큰 상징이었다. 헤롯대왕은 스룹바벨이 지었던 성전을 거창하게 중축을 시작했고, 그의 사후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예수님 당시에도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규모와 화려함을 제자들이 보고 놀라워했다. 그러나 주님은 정작 모두 무너질 것을 선언하셨다.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신다(4). 돌로 세운 성전은 무너지고 참된 성전, 곧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고난을 당할 것을 예견하셨다. 2 말세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말세에는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그것을 미워하는 세상의 영적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자연히 교회 안에서도 배신자가 나타나 서로 미워하는 일도 일어나고(10), 거짓 선생들이 미혹하며 사람 간의 사랑이 식고 불법이 성행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11-12).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들, 즉 복음을 모든 민족 가운데 증거하며 갈등과 어려움을 견디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13). 참된 끝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이후에야 올 것이다(14). 결국 우리의 관심은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맡은 사명을 감당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있어야 한다. 주님, 세상을 향한 시야가 넓어지고, 교회가 온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며 구원할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소서!

2021.3.1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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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16 (화) 마23:25-39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신했다. 그들 중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는 인정을 받았는데, 정작 하나님께 버림받을 자들이었다. 1 다섯째(25-26)와 여섯째(27-28) 저주를 통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만 깨끗한 척하는 외식을 꾸짖으셨다. 주님은 내면의 청결을 강조하셨다(26). 당시 무덤은 종종 회칠을 해서 사람들이 부정한 무덤에 접촉하지 않도록 했는데, 이런 무덤처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실제 삶이 그러함을 책망하신 것이다. 이처럼 신앙의 핵심은 우리 내면에 있다는 진리를 절대 잊어선 안된다. 2 예수님의 마지막 저주(29-30)에서 자기들은 조상들과 같이 예언자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기념비를 꾸며도, 하나님이 보내신 세레요한과 예수님은 거부했다. 결국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악한 자들이었다(31-32). 예수님은 이들을 ‘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욕설로 이 모든 저주의 결론을 내리셨다(33). 하와를 꾀었던 뱀이 심판을 피할 수 없었듯이, 이들도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천국 백성은 머넞 자신이 주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겸손히 회개하는 자다. 3 종교지도자들은 이후에도 주님이 보내시는 일꾼들을 박해할 것을 예언하신다(34). 이후 교회가 당할 핍박을 예언하신 것이다. 교회를 박해하는 자는 결국 영원한 심판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35-36). 저주의 말씀을 마치신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죽인 예루살렘을 저주하신다(37-39). 특히 여기서 ‘내가’란 표현으로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다. 이제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의 지체가 된 우리의 몫으로 떨어졌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성읍의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주님, 겉으로 거룩한 척, 신앙생활 잘하는 척하

2021.3.1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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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15 (월) 마23:13-24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일곱 가지 화를 선언하셨다(13-36). 7은 완전수이기에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그 화로 인해 철저히 망하게 됨을 뜻한다. 1 첫번째 화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과 가르침이 불러일으키는 결과다. 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지 사람들 앞에 보임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진리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는 외식적인 신앙을 가졌다. 두번째 선언하신 화는 새로운 교인을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전도를 받은 이방인이 와서 유대교로 개종을 했으면, 이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데 왜곡된 말씀을 가르친 것이다. 결국 이방신을 섬겼던 옛 습성에 왜곡된 가르침까지 더했으니 바리새인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처럼 잘못된 가르침과 행동을 일삼는 자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크나큰 비극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복음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딤전2:7). 2 세 번째 화는 맹세에 관한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맹세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절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않았다. 혹시 지키지 못해 재앙이 올까 두려웠던 것도 있었고, 맹세를 지키지 않을 것을 대비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으로 맹세를 하든, 그것은 하나님을 걸고 맹세하는 셈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꼭 맹세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면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 맞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네 번째 화는 십일조에 관한 것으로, 바리새인들은 아주 작은 수입원의 십일조까지 바치면서도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외면하고 소홀히 여겼다. 주님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는 것과 아울러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놓치지 않는 것 모두 소홀히 해선 안된다고 책망하셨다. 믿음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히11:6). 주님, 나의 신앙에 혹시라도 위

2021.3.1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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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토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13 (토) 마22:34-46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공략하는 것에 실패하자, 다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 그러나 주님은 저들의 질문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 드러내신다.   1 율법 전체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어떻게 될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은 신6:5과 레19:18을 ‘사랑’으로 연결시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율법을 요약하셨다((37-39).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 노력했지만, 그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다. 주님은 저들의 위선적 사랑을 지적하셨다. 행동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대한다면 율법이 이뤄진다. 사랑 안에 모든 율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롬13:9). 우리가 힘써 사랑할 때 하나님의 뜻은 이뤄지기 때문이다. 2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임을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다윗이 강한 힘으로 나라를 다스렸듯이, 오실 메시아도 다윗처럼 강한 힘으로 로마를 몰아낼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영적인 해방은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란 질문을 던지셨다. 시110:1을 인용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정체를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로, 원수를 발 아래에 둘 때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을 발로 밟아 완전한 승리를 거두실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도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성)으로 오셨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밟아 승리하신 하나님의 아들(신성)이시다. 주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게 하시고,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으로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2021.3.1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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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금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12 (금) 마22:23-33 종교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한 공격을 실패하자, 이제는 사두개인들이 와서 부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해당된다.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성도의 부활과 내세의 삶에 대한 진리를 다시 확신해보자. 1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  다윗 시대, 사독 제사장의 후예로 여겨지는 이들은 구약의 모세오경만 믿었고, 부활, 영혼 불멸, 내세를 믿지 않았다. 당연히 부활의 말씀이 있는 이사야, 다니엘, 시편 등은 무시했다. 또한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졌기에 내세에 대한 열망이 크지 않았다. 현실에서 누리는 삶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타났다.  ‘메시아’라는 예수님이 분란을 일으키면 로마가 개입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게 될 위험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걸고 넘어져야 했다. 신명기(25장)에 나오는 ‘수혼법’을 들어 예수님께 질문했다(24-28). 세상의 부와 권력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따르지 못하고, 현실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2 예수님은 사두개인이 성경을 온전히 믿지 못해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을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셨따(출3:6).  이들이 과거 사람이었기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라고 해야 맞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 시제 동사를 사용해 하나님의 현재성을 강조하셨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현재에도 살아 있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능력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셨고, 동일한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고전6:14). 부활한 성도는 현세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사두개인들은 현세의 삶과 부활 이후의 내세 삶을 같은 수준으로 생각한다. 아니

2021.3.1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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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 목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11 (목) 마22:15-22 예수님을 시험해 넘어뜨리려는 자들이 이제는 종교적 주제를 넘어 정치적 주제로 공격해왔다.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가르치신다. 1 바리새인은 ‘구별된 자들’이란 뜻으로, 유대 사회에서 신앙적으로 영향력 있고 존경받던 집단이었다. 민족주의가 강하고, 율법을 엄격히 준수했고, 경건한 삶의 방식을 철저히 유지하려고 노력했기에 유대인들의 전적인 신뢰를 얻었다. 반면 헤롯당은 헤롯왕을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유대왕이 된 헤롯을 추종했고, 로마법을 지켰다. 전혀 함께 하지 않던 자들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연대한 것이다. 로마 정부에 납세하는 문제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 원래가 신앙 문제로 안되면, 세상의 문제로 넘어뜨리려 하는 것이 사탄의 방법이기도 하다. 성도는 이를 잘 알고 지혜롭게 대비해야 한다. 2 당시 남자는 14세부터, 여자는 12세부터 65세까지 로마에 인두세를 내야 했다. 당시 평균수명을 생각하면 평생 내야할 세금이다. ‘인두세’를 내야 한다’고 대답하면 로마제국에 납세하는 것을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고, ‘내지 않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헤롯당에게 공격당하도록 판을 짰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의 외식과 위선을 아셨다. 자기들이 세금의 정당성을 물으면서, 정작 로마의 주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고, 그 질서 속에서 사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세상 권세와 그 집권자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삶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주님, 물질을 포함하여 세상의 문제에 끌려 다니지 않도록 저의 마음을 굳게 하셔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세상 질서에서도 본이 되게 하소서!

2021.3.1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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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수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10 (수) 마22:1-14 혼인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한 왕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오늘 본문이다. 여기에 가난한 자, 몸이 불편한 자, 이방인들이 초청받았다(눅14:21). 이 비유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며, 초대받은 자들은 어떻게 택함을 받았나? 1 천국은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 잔치와 같다. 왕은 하나님, 아들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천국)잔치에 초대하셨다. 유대의 잔치는 7일 동안 진행되기에 참석하기가 사실 여유로울 수 있다. 매일 일하는 품꾼이나 농부는 어렵다. 그런데 초청받은 자들이 초청을 거절한다. 다시 종을 보냈지만, 각자의 핑계로 오지 않고, 심지어 어떤 자들은 종들을 죽였다. 이에 왕은 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랐다 (예루살렘이 AD70에 파괴됨). 완벽한 심판이다. 하나님의 천국 초대를 거절하면, 그 선택의 결과는 심판이 따른다. 2 왕은 종들에게 다른 명을 내렸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초대하라는 것이다. 이에 종들이 가서 만나는 자들 마다 초대하여 혼인 잔치에 데려왔다. 그 결과 혼인 잔치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초청은 은혜다. 성품과 인종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우리는 가서 초대만 하면 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지만 혼인 잔치에 들어왔다고 해도 모두 택함(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참석한 자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택함을 받기 위해선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 자기 공로, 자기 의, 노력으로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지금도 우리를 세상 곳곳으로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주님, 전도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회개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기꺼이 감당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2021.3.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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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9 (화) 마21:33-46 포도원 농부 비유를 통해 악한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심판을 선언하신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1 집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으로 떠났다. 수확 때가 되어 종들을 농부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때리고, 죽이고, 마지막 한 명은 돌로 쳤다.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과 같다. 더 많은 종을 주인이 보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아들을 보냈더니,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죽였다. 주인은 하나님, 농부들은 종교 지도자들, 포도원은 이스라엘, 종들은 선지자, 아들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악한 종교지도자들의 죄를 신랄하게 지적하셨다. 회개하여 회복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려 주실 때는 기회다. 2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는 심판이 임한다. 악한 농부들은 모두 진멸당할 것이다. 그 역할을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에게 넘기실 것이다(41).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별 볼 일 없는 돌과 같았지만,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머릿돌처럼 귀한 존재이시다. 건물의 기초석과 같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돌 위에 떨어져 깨질 것이다(사8;14). 불신자들 위에 임하신 주님은 그들을 가루처럼 흩어 버리실 것이다. 마지막이 되기 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가 자신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렸지만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회개치 않았다. 주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 곧바로 돌이켜야 심판을 면한다.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예비된 것은 심판뿐이다. 주님, 믿음의 백성 되어 주께서 맡기신 일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지혜와 성실함을 주소서!

2021.3.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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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8 (월) 마21:23-32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주님은 맨 먼저 성전을 정화하셨다. 이 일로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이 벌어졌다. ‘권위’에 대한 논쟁이었다. 우리는 권위 있는 이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1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했고, 누가 그 권위를 줬느냐?’며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이에 주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물으셨다. 예수님의 질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이 받은 권위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하늘로부터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셨다. 주님께 하나님의 동일한 권위가 있다. 예수님은 되묻기 방식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헛된 권위를 터뜨리셨다. 2 두 아들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첫째는 가겠다고 답하곤 가지 않았다. 당시 유대규범으로는 일단 아버지 앞에선 말로 순종해야 한다. 말로 불순종하면 처벌받는다. 첫째는 예의는 다했다. 반면 둘째는 싫다고 답했지만 후에 뉘우치고 가서 일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동한 것은 둘째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 말로 순종하는 척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았다. 권위가 저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경멸했던 세리와 창녀는 회개하고 순종했다.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 하셨다. 끝내 회개함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32). 성도는 ‘내 권위를 어떻게 세울까’ 고민하는 존재가 아니라 ‘권위 있는 예수님께 더더욱 순종하겠다’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자들이다. 주님,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주님께서 나의 삶의 왕이심을 기억하고 모든 일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2021.3.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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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토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6 (토) 마21:1-1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신 사건이다. 1 감람산 벳바게에 도착하신 주님은 제자 두 명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 매인 나귀 새끼와 나귀를 끌고 오라 하신다. 누가 물으면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는 답변까지 일러 주신다. 이는 ‘왕이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다’는 스가랴9:9의 예언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다. 전쟁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대속물로 드려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또한 이름도 없이 등장하는 묵묵히 순종한 나귀 주인의 순종 또한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우리가 꼭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다 알아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단순하게 순종할 때, 하나님의 크신 계획의 한 부분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2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니 온 성이 소동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이 누구요?”라고 묻자 한 무리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라고 대답한다. 진짜 예수님을 알지 못했으니 결국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전 재산과 같이 여겨지던 겉옷을 깔았다는 것은 ‘당신을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라는 뜻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말로 찬양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다. 진정한 성도는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알고, 나의 삶을 바닥에 내려놓고 ‘호산나’ 외치며 찬양하는 삶을 통해 주의 다스리심을 세상에 보여줘야겠다. 주님,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맘 속의 묵상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하소서!

2021.3.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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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금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5 (금) 마21:17-34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짜 중요한 마지막 구속 사역을 알려주시고자 한다. 1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불러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신다. 앞서 두 차례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이번엔 어떻게 수난을 당하고 죽게 될지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먼저 로마 군인들로부터 린치를 당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넘겨져 심문을 당하신 후, 로마 당국에 넘겨져 십자가 형을 당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사흘 후에 부활하신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우리는 명확히 알고 믿어야 한다. 2 이런 상황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와서 청탁을 했다. 주의 나라가 세워지면 한 아들은 우편에, 다른 아들은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십자가의 잔을 의미하시는 것을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다른 제자들이 화가 났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영광은 십자가를 진 후에 경험한다.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다. 3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따라오는 두 맹인을 예수님이 치료해 주셨다.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버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오신 메시아로 알고 있는듯하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만 알고 있다. 3년을 함께한 제자들이 진짜 맹인같다. 예수님은 두 맹인의 ‘눈’(옴마톤, 34)을 만지신다. 이 눈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눈’(옵쌀모이, 33)과 달리 마음의 눈, 신앙의 눈으로 풀이된다. 예수님을 세상 왕 정도로 보는 눈은 신앙의 눈으로 치유되어야 한다. 주님, 세상의 눈으로 나와 주변을 보지 말게 하시고, 육체의 눈을 치료받아 신앙의 눈으로 보고, 주의 길

2021.3.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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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목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4 . (목) 마20:1-16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 구원’, ‘보상의 역전’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부자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19:30), 여기서는 품꾼 비유를 통해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다시 강조하신다(16). 1 고대 팔레스타인에는 소작농이 많았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6시)에 나가 품꾼들을 만나 하루 품삯을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낸다. 제 삼시(9시)와, 제 육시(12pm), 제 구시(3pm), 제 구시(5pm)에도 그렇게 했다. 주인의 마음은? 한 명이라도 더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것이다. 품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계속 애쓰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천국에 보내고자 이른 아침에 나가신다. 계속해서 나가 보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한 영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2 삯을 줄 시간이 되어, 주인은 가장 늦게 와서 일한 품꾼부터 한 데나리온을 준다. 이른 아침부터 온 자들은 ‘한 시간 일한 품꾼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자 이들은 주인을 원망했다.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이에 주인은 ‘내가 잘못한 것이 없고, 약속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말한다. 구원은 은혜다. 우리가 공로를 쌓아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천국에 가는 것이다. 몇 시에 택함 받았든 주인이 은혜로 포도원에 들여보내 주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주인 되신 하나님이 택하셔서,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나중 된 자로 먼저 된 신비이다 (16). 주님, 제11시에 택함 받은 자들인 저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힘입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조건 없이 나누게 하소서!

2021.3.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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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수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3 . (수) 마19:23-30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규정에 따르면,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도울 때 재산의 20%를 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무엇을 알려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셨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이들은 어떤 영광을 받는가? 1 부자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가르침에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말씀하신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신다. 충격 받은 제자들이(25)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했더니,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선 다 하실 수 있다”고 답하신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믿기에,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2 부자 청년이 떠나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자신들은 무엇을 얻느냐’며 베드로가 질문한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고, 버린 것보다 여러 배를 더 받을 것이라 대답하신다. 로마제국 당시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은  전쟁에서 함께 싸워 승리한 자기 군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했다.  주님 오시는 날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는’(고후2:14; 새번역) 대역전승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행렬의 맨 마지막 포로처럼 끌려가는 것 같아도,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될 것이다.”  내 모든 것을 주께 드리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 모두 최후의 날,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의 앞에 서서 대승리의 축제에 참여할 것이다. 주님, 이 땅에 살면서 재물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 자가

2021.3.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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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2 (화) 마19:13-22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통해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신다. 1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는 여성과 아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인구조사를 할 때에도 어린아이의 수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예수님께 안수기도를 받으려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이들을 꾸짖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온전히 의지하듯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가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세상 관습과 유행을 좇아가는데 여념이 없지는 않은지, 말씀을 세상보다 더 사모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2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했다. “영생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내가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는 행위 구원 사상이 담겨 있다. 율법 준수로 구원을 받겠다는 잘못된 생각이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계명을 지키라고 주님이 권면하시자, 부자 청년은 이미 계명을 지켰다고 답한다. 예수님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21)고 도전하시자,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나간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아닌 재물을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순종할 수 없었다. 사람은 율법을 완전히 준수할 수도 없고, 율법준수로 영생을 얻을 수도 없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의존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은혜로 구원받는다 . 주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주시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1.3.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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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3.1 (월) 마19:1-12 제자들과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성도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본문이다. 이혼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인 상황에서 주님의 교훈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1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유가 된다면’ 이혼이 적법한 것인지를 예수님께 질문했다. 당시 유대에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써 주고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라(신24:1) 말씀을 각기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힐렐 학파는 남편이 못마땅해하는 것이 뭐든지 이혼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한 반면, 샴마이 학파는 아내가 간음했을 때로 한정했다. 어떤 대답을 해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질문이다. 이 상황에서 주님은 하나님이 이루신 한 몸을 사람이 나눠선 안됨을 강조하시면서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인권을 먼저 말씀으로 보호하셨다. 비록 이혼이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주신 차선이지만, 결혼은 엄연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부부가 한 몸을 이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 당시 유대 남성들은 결혼한 후 아내와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는 것이 남성의 권리라 여겼다. 그런 사회적 구조를 예수님은 말씀으로 근본적인 기준을 주신 것이다. 이에 결혼이란 것에 큰 부담을 갖게 된 제자들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하자, 주님은 독신은 타고난 자라야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의 인도하신 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베드로처럼 결혼하면서 사역할 수도 있고, 바울처럼 독신으로 사역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살아가면 된다. 주님,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창조의 말씀과 질서 속에서, 또 각자의 인도하심을 따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