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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February, 2021

2021.2.2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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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7일 토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27 (토) 마18:10-20  교회는 천국을 세상에 드러내는 거룩한 공동체이긴 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죄인들의 공동체이기에 신앙을 잃고 교회를 떠나거나 다른 지체에게 죄를 짓고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도 생긴다. 공동체 안에서 일탈 행동을 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의 교훈은?  1 지체들 중에 작은 자라도 결코 업신여기지 말라고 강조하신다(10). 잃은 양의 비유(12-13)은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선 ‘잃어버린 한 마리’가 종교적 하층민이었던 세리와 죄인들을 비유한 것이라면(눅15:1), 마태복음에서는 교회의 구성원이었지만 신앙을 잃어버리거나 열정이 식어 버린 사람 또는 사회적, 계층적 이질감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 신앙을 회복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돌봐야 한다(14). 교회는 이런 면에서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관심 갖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교회는 한 영혼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누군가 죄를 범했다면,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혼자 찾아가 권고해야 한다. 만약 그가 그 권고를 듣는다면 형제를 얻게 된 것이다 (15). 그러나 권고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점차 권면하는 자들의 수를 늘려야 한다(16). 그래도 회개치 않는다면 이 사실을 교회 전체에 알려야 한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불신자로 여겨지게 된다(17). ‘교회가 내게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주의 몸 된 교회의 권고를 하나님의 말씀처럼 귀하게 여겨야 한다.  주님, 주의 교회가 연약한 지체를 품으며, 동시에 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여 거룩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2021.2.2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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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금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26 (금) 마18:1-9 예수님으로 인해 천국은 세상에 임했다. 교회는 ‘이미 임한 천국’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천국’의 긴장 상태 가운데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사명을 맡았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려면 세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어떤 차이점을 가져야 할까? 1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란 제자들의 질문(1)에 대한 답변과 여기서 파생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18장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다소 충격적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가고, 또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가장 큰 자가 된다고 하신다(3-4). 교회의 질서 역시 자신을 낮출 때 큰 자가 된다는 의미다. 부끄럽지만 교회의 직분 조차도 이런 연장선에서 보는 것은 예수님의 질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2 예수님은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야말로 천국의 왕,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가르치신다(5). 고대에는 왕이 파송한 자를 영접하는 것을 곧 그를 파송한 왕을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던지는’ 것은 당시 로마에 있던 처형법으로,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게 하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이처럼 중한 죄란 말씀이다. 자신을 낮추고 서로 낮은 자를 예수님 대하듯 섬기는 자가 큰 자로 인정받는 나라에 속한 우리가 누구를 영접해야 하는지 분명하다. 3 천국의 질서와 반대되는 태도는 교만이다. 약한 자에게 ‘세상의 가치관을 주장하여’ 넘어지도록 하는 것은 화가 된다(7). 주님은 자신을 범죄하게 하는 신체부위를 잘라 내라’고까지 경고하신다(8-9). 그만큼 교만한 행동을 하거나 교만한 눈으로 사람을 보는 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이다. 자신을 높이려 하고, 남들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하는 자들을 결코 부러워하거나 따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교회는 . . . 이 땅에

2021.2.25 NAZAZi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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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목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25 (목) 마17:14-27 천국이 이 세상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예수님을 따르기로 헌신한 제자들이 어떻게 천국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1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3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 아래에 있던 나머지 제자들은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14-16). 이는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문제다. 분명 주님이 온 땅을 다스리시지만, 이 땅에는 악의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제자들은 그 세력을 내쫓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 바로 우리 믿음이 작기 때문이다. 믿음이 작은 상태에서는 그 어떤 능력도 행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20)을 듣고도,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 아직 온전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21-22). 우리에게 천국의 권능이 주어졌지만, 문제는 우리가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주님을 믿고 담대히 나아간다면 주님이 모든 일을 이뤄 주실 것이다. 2 성전세를 받는 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라고 요구했다(24). 예수님이 진정한 성전이 되시고, 그분과 성령으로 연합한 공동체가 성전의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성전세 내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독특한 방법으로 세금을 내신다 (27). 엄밀히 따져 예수님과 베드로가 성전세를 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성전세에 대한 법이 그 땅에 유효하므로, 예수님은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 아직 천국이 세상의 법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지혜로 적절한 길을 찾아 나가게 된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셔서 천국을 완성하실 때에는 세상의 모든 법을 폐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통치만 지속될 것이다. 천국이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가 천국에 속한 자들이지만, 이 세상 속에 살기 때문에, 믿음의 권능을 갖고 세상의 모든 악하고 더러운 죽음의 권세와 싸워 이겨 나가야 한다.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

2021.2.2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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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뤌 24일 수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24 (수) 마17:1-13 당시 십자가는 저주스럽고 비참한 죽음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장차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다. 십자가 뒤에 어떤 영광이 숨어있는지를 세 제자에게 보여주신다. 1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선포하신 후 일곱 째 날에 이 세 명은 주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게 변하는 영광을 목격했다(1-2). 이는 마치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선포하신 후 일곱째 날에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갔던 것을 상기시킨다(출24:16).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시내(호렙)산과 관련된 대표적인 두 선지자들이다(3). 베드로는 그곳이 마치 천국과 같다고 여겨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고백했다(4). 우리가 장차 누릴 영광이 이처럼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현재 당하는 고난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 (롬8:18). 2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덮이고 하늘에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이 들렸다(5).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세에 순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제자들이 본 것이 환상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었음을 보여준다. 구약을 상징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 뒤로 사라졌기에, 이제 제자들이 바라봐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님이다. 우리는 제자로서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기꺼이 따라야 한다. 3 십자가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 부활 이전에는 변화산 사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주님은 당부하셨다(9). 아직 예수님의 때가 아니고, 제자들의 이해가 아직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언된 엘리야로 온 세례요한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10-13; 마11:14; 말3:1; 4:5). 제자들 역시 세례요한의 정체를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 이렇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

2021.2.2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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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뤌 23일 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23 (화) 마16:13-28 수많은 표적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첫걸음을 떼시며 제자들에게 그 길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1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은 십자가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셨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16)에 예수님은 그가 복되다고 선포하시고(17), 그의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질 것을 말씀하신다(18-19). 입술로만의 고백이 아니라, 진심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해야 한다. 이런 고백을 드릴 때 어떤 환난과 어려움에도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고 부활을 통해 요나의 표적이 이뤄질 것을 말씀하시자(21), 베드로의 반응은 그가 앞서 선언한 신앙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반대하며 그분을 꾸짖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는 예수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책망을 듣게 된다(23).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나의 생각으로 판단하려 해선 절대 안된다. 어떤 말씀이든 믿음으로 순종하기로 결단해야 한다.  3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산책길이 아니라 자기 부정과 죽음의 길이다(24-25). ‘누구든지’란 말씀은 제자라면 예외가 없단 말씀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제 목숨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25-26). 제자라면 눈앞에 보이는 순간의 승리가 아닌, 종말의 심판 때 얻을 궁극의 승리를 바라보며 주님을 따라야 한다(27-28). 은혜를 입어 영적 시야를 갖는다면 제자의 길보다 더 영광스런 길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 하루하루 성령님을 의지하여 주님을 따라 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1.2.2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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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22 (월) 마161-12 각종 병자와 장애인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누가 봐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 놀라운 일들을 모두 목격하고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했다. 왜 보고도 보지 못했을까? 1 칠병이어 기적 후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했다(1). 선지자가 전한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온 증거가 없으면 죽이란 규정(신18:20)이 있는데,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몰아 죽이려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왜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반박하신다(2-3). 그때나 지금이나 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처럼 생떼를 부리면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말씀하시며 저들을 떠나가셨다. 믿음이 있어야 표적을 보고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믿음이 있어야 제대로 보고 들음으로 제대로 반응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2 제자들에게 저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에 제자들은 자기들이 떡을 챙기지 않아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오해했다(5-7). 제자들 마저 이러는 모습에 예수님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기적을 언급하시며 제자들을 책망하셨다(9-10). ‘먹고 마시고 입는 걱정’(마6:31)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제자들의 작은 믿음을 꾸짖으셨지만 깨닫게 하시고, 계속 함께 동행하신다. 우리 믿음이 약해도 낙심하지 말 것은, 주님을 따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주님이 함께하시면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자라게 하실 것이다. 주님,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로 철저한 믿음으로 주님께 집중하는 제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1.2.2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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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토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20 (토) 마15:21-28 앞 본문에 등장했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과 완전히 대조되는 한 사람, 가나안 여인이 등장한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참된 믿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찾아보자. 1 예수님 당시 두로와 시돈은 유대인들이 이방 땅 중에서도 가장 더럽게 여기며 배척당하던 곳이다. 여기에 한 가나안 여인 (‘수로보니게’ – 시리아-페니키아 여인; 막7:25)이 등장한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의 적으로 멸절 되어야 할 대상이었던 ‘가나안’ 여인이라고 기록함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민족 출신임을 내포한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 ‘주 다윗의 자손이여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라고 계속  따라오며 간청했다. 2 예수님은 제자들과 여인의 요청을 계속 거절하신다. 두 번이나 거절하셨으니 허락 받을 가능성이 없음을 뜻한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으셨다며 주님이 대답하신다(23-24). 심지어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비하하던 표현인 ‘개’란 단어까지 사용하시며 유대인들이 받을 은혜를 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신다 (25-26). 이방 여인을 미워하셔서 이런 태도를 보이신걸까?  모든 인류를 사랑하셔서 죽으러 오신 하나님께서?  오히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가 어땠는지를 보여 주고 계신다. 3 예수님께 철저히 무시당하면서도 이 여인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누리는 은혜라도 나눠 주시기를 원했다(27).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듣고 감탄하시면서 그녀의 소원을 이뤄 주셨다(28). 주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받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  율법도 알고 유대인이라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믿음으로 간절히 구하는 자가 구원받는다. 우리의 중심이 이런 태도가 있어야 한다. 주 앞에 설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이었던 저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으니, 항상 겸

2021.2.1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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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금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19 (금) 마15:1-20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말씀의 진리나 경건 생활 등 본질이 아닌 연례 행사, 교회 조직, 직분 선출 등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경우가 있다. 이는 심각한 문제로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갈 대 생기는 증상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입으로는 자기들의 율법을 준수하는 하나님 백성이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말씀의 본질과 완전히 떨어져 살았다. 1 게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고 계신 주님(14:35-36) 앞에 예루살렘에서 온 여러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나타나서는, 제자들이 식사 전 랍비식 전통으로 손을 씻지 않음을 지적했다(1-2). 이에 예수님은 오히려 이들이 율법을 위반하고 있음을 지적하신다(3). 바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부모를 돌아보지 않는 것(4-6; 막7:11)이었다. 말씀의 본질은 무시하고 껍데기만 치중하는 외식을 지적하신 것이다 (7-9; 사29:13). 말씀의 본질을 붙잡지 않으면 반드시 겉으로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는 절대로 비본질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예수님은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고 (10-11) 당시로선 굉장한 논쟁거리가 될만한 말씀을 하셨다.  사람의 전통을 내세우는 것은 능력이 없다 (13-14).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식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좌우하지 않는다. 인간의 영적 청결은 마음을 어떻게 제어하느냐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17-20). 주님은 우리에게 겉으로 경건해 보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마음 안에 있는 죄악이 가득한 성품을 인정하고 그것을 대적하고 싸우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삼상16:7). 내 안의 본성과 싸워 이기기 위해 우리는 본질을 붙들어야 한다. 주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전혀 선함이 없는 죄인임을 늘 인정하며, 겸손히 주님을 섬겨 나가는 거룩한 생활을 이어가게 하소서!

2021.2.1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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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목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18 (목) 마14:22-36 오병이어 기적 직후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증거다 (참. 막6:46-52; 요6:16-21). 이 사건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1 제자들이 배를 타고 앞서 건너가고,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가셨다(22-23). 제자들이 물 위에서 바람과 물결로 죽음의 위험 앞에 놓였다 (24-25). 이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제자들은 유령이라 두려워했다(25-26). 이때 주님은 즉시 ‘나다’(I AM)라고 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호렙산에서 모세를 만나신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하실 때 사용하신 어구다 (출3:14).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2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고, 말씀에 의지해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주님께 구원을 요청했다(28-30). 그리고 믿음이 없어 의심했다는 책망을 받았다(31).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주님은 멀리 계신 듯하고, 세상의 위협이 우릴 에워쌀 때, 금방 의심하며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즉시 자신을 나타내시고(27) 건져 주신다. 모든 문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임재하심으로써 해결된다 (32-33). 3 주님이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이 치유받는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다. 게네사렛에 예수님이 오시자 사람들은 그 근방의 모든 병자를 데리고 왔고(34-35) 간청한 자들 모두 고침을 받았다. 주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많은 조건을 요구하시지도 않는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받는다. 우리는 이 믿음이라는 놀라운 특권을 가진 것이다. 주님,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주를 온전히 의뢰하여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성도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1.2.1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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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수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17 (수) 마14:13-21 오병이어 사건은 네 복음서에서 모두 기록되었는데, 특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헤롯의 생일잔치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막6:16-29). 세상의 잔치는 선지자의 머리를 소반에 담은 죽음의 잔치라면 천국의 잔치는 바구니에 떡과 물고기가 가득 담겨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는 생명의 잔치다. 1 헤롯은 왕궁에서 죽음의 생일잔치 (5-12)를 했지만, 주님은 빈 들, 곧 광야에서 무리와 함께하는 잔치였다. 헤롯은 잔치 자리의 사람들을 두려워했지만(5),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다(14). 분명 천국 잔치가 세상 잔치에 비해 심히 초라해 보인다. 먹을 것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알아서 사먹으라고 사람들을 흩어 보내자는 말이 나올 정도다(15). 그러나 이 초라한 자리야 말로 기적의 자리요,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였다. 우리는 세상의 화려함에 눈멀어 생명과 진리가 있는 자리를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된다. 2 사람들을 보내자는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16). 즉 제자들이 무리를 먹이는 목자들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신 것으로 여겨진다. 한 소년이 가져다 준 작은 도시락 (요6:9)을 들고 감사기도하신 주님은 작은 것으로도 수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계수 되었던 것처럼(민1), 예수님의 광야잔치에 참여한 무리의 수를 계수해 보니 남자만 5,000명쯤이었다. 우리는 생명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갈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시고, 세상의 유혹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바라게 하소서!

2021.2.1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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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6일 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16 (화) 마14:1-12 세상의 화려함 속에 숨겨진 죄의 파괴력을 무시하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했을 때 일어나는 죄의 파괴력과 결말을 성도인 우리는 결코 간과해선 안된다. 궁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헤롯대왕(2:1, 19)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1)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두려웠다.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다(2). 안티파스의 이복 형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가 이혼하고 안티파스와 결혼한 것은 율법적으로 근친상간이다(레18;16; 20:21). 이를 두고 세례요한은 안티파스를 계속 책망하자(4), 헤롯 안티파스는 그를 옥에 가두고(3) 결국 죽였던 것이다(10).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때로 이런 뻔뻔스런 자들이 강한 힘을 가진 것처럼 여겨져도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 세상의 악인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2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 생일잔치에서 살로메 (헤로디아와 빌립 사이에 태어난 딸)에게 내뱉은 말에 얽매여, 사람들 앞에서의 자기 체면 때문에 세례요한을 죽인다(9).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 나라의 원수로 확증되고 말았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헤롯은 화려한 잔치를 하고 있고 세례요한은 비참하게 죽은 것만 같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이미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며(11:2-3) 자기 사명이 완수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고, 천국의 사역을 온전히 예수님께 위탁할 수 있었다(12). 우리는 악한 세상의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부러워하거나 그들의 화려함을 따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선 안된다. 주님, 자신을 높이며 사람을 두려워하여 악행을 저지르는 불신자처럼 살지 말고, 천국 백성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1.2.1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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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15 (월) 마13:44-58 돈이 뭔지 아직 잘 모르는 어린아이는 지폐보다 동전을 더 좋아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영원한 것을 무시하고 헛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본문은 우리가 과연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1 주님은 천국을 밭에 감춰진 보화와 진주로 비유하셨다. 이 당에서 치러야 하는 희생이 충분히 값어치 있는 것임을 말씀하셨다(44-46).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자기 모든 소유를 팔면서도 기뻐한다. 당장은 많은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없어 보여도, 천국이야말로 영원을 보장하는 절대 가치를 지닌 것이다. 영원을 어디서 보내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47-50). 세상이 우리를 조롱해도 잠깐을 희생해 영원을 얻는 선택은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님을 확신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2 주님은 천국 비유를 마치시면서 ‘천국의 제자 된 율법학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신다. 이 사람은 곧 구약과 신약의 진리를 모두 섭렵한 셈이다. 말씀을 참으로 깨달은 제자는 ‘옛것과 새것을 창고에서 내어 오는 집주인’처럼 풍성함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실로 천국 복음은 구약에 계시된 진리를 토양으로 삼아 자라고 열매 맺어 믿는 자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끼친다. 3 새롭게 임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옛것과 새것을 함께 누렸지만, 정작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새로운 진리를 배척했다. 예수님의 과거 모습만 기억할 뿐이다(53-56).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분이 진정 누구신지 몰랐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유대인들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구약성경에 묻힌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고, 복음이란 진주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다. 성경 안에 있는 보화를 캐내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늘 듣던 진부한 가르침 정도로 여기는 태도는 주님의 능력을 한껏 누리지 못한다. 주님, 그 옛날 유대인들처럼 너무 익

2021.2.1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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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토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13 (토) 마13:18-30 예수님은 비유와 해석을 통해 열매 맺는 성도의 삶을 설명해 주신다. 우리는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1 길가에 뿌려졌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 마음이다. 말씀을 받아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는 완악한 마음을 뜻한다. 그런 마음에는 사탄이 와서 말씀을 빼앗아간다. 돌밭과 같은 마음에 말씀을 받은 사람은 잠시 믿는듯 하지만 환난이 오면 이내 불평하고 떠난다. 가시덤불같은 마음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염려와 유혹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고 떠나 버린다.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지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잘 간직하면 그 열매는 모두에게 유익이 된다. 좋은 땅처럼 말씀을 잘 받아들여 모두를 유익하게 하자. 2 가라지의 모양새가 밀과 흡사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잘 구분이 되지 않다가 밀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모양이 확연히 구분된다. 그때 조심스럽게 가라지를 뽑아내야 한다. 가라지는 독성을 지닌 호밀과 식물이기 에 먹으면 위험하다. 같은 밭에 나쁜 가라지도 섞여 있듯이 거짓 성도들이 참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주님 말씀처럼 그 구분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놔두라고 하신다. 심판자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가 판별하고 결정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저 우리는 주신 말씀 따라 최선을 다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를 맺으면 된다. 주님,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성장케 하셨으니, 말씀을 놓치지 않도록 나의 마음을 붙드시고, 공동체가 믿음을 잘 지키도록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게 하소서!

2021.2.1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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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금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12 (금) 마13:1-17 마태는 13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 여덟 가지를 기술한다.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무슨 이유로 거부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어떤 것인가? 1 먼저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씨가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떨어짐으로 각기 다른 결과를 낳는다. 씨는 예수님의 주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많은 말씀(씨들)을 뿌렸음에도 유대인 대부분은 무관심이나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마음 밭에서 가지, 돌 같은 요소를 제거하고 좋은 땅에 말씀을 품는 것이다. 2 비유는 가진 자(믿는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 주고, 가지지 못한 자(불신자)에게 더 알지 못하게 하는 유익이 있다. 11-12장에 나오는 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도 무슨 말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소수의 믿음의 사람은 비유를 듣고 하나님 나라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 비유를 통해 각자의 미래가 더 명확해진다. 믿지 않는 자는 어두운 곳에 던져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반면에 믿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좋은 땅에 잘 간직해야 한다는 도전을 받는다. 주님, 나의 마음을 가꾸어 좋은 땅에 말씀이 떨어지듯, 끝까지 말씀을 품어, 모두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소서!

2021.2.1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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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목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11 (목) 마12:38-50 11장과 12장은 먼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패턴으로 전개된다. 오늘 본문에서는 심판을 받는 자들이 누구이며, 위로와 초대를 받는 자가 누구인지를 밝힌다. 1 (38-42) 이미 많은 표적을 듣고 보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더 요구한다(마16:1-4 참고). 예수님이 표적을 보이시는 이유는 당신이 메시아 되심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을 모함하려는 이들에게 주님은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가 사흘 만에 나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한 예언이다. 믿음이 없으면 요나 보다 더 크신 이인 메시아가 와도 소용이 없다. 2 (43-45) 요나와 솔로몬보다 훨씬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는 자들을 향해 주님은 귀신 들린 사람의 비유로 심판을 경고하신다. 쫓겨 나간 귀신이 다시 그 사람에게 들어갈 때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같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 사람의 형편이 전보다 악화되었다. 이는 악한 세대를 칭하신 말씀이다.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전보다 좋지 않은 형편으로 전락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믿음 여부로 심판이 결정된다. 우리는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한다 (고후13:5) 3 (46-50)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아마 예수님을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일 수도 있다 (막3:20-21). 이에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이 가족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자기 가족이라고 선언하신다(50).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선언이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를 향한 위로요, 초대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주님의 가족이 되고 영광

2021.2.1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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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수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 2.10 (수) 마12:22-37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에 계속 적대감을 드러냈다. 주의 선한 일들을 비난하고, 주의 권위에 도전하고 했다. 주님은 저들의 적대감을 지적하시면서 사람들이 지극히 경계해야 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 죄는 무엇일까?  1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귀신의 역사라고 공격했다. 처음에는 의심으로 시작했던 것이 이젠 적대감을 갖고 공격하는 악한 단계가 되어 버렸다. 예수님은 그들이 계속 선한 일을 악이라고 비난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리라고 경고하신다. 백성들이 예수님께 환호하는 것에 시기심이 생겨, 성령의 사역을 귀신의 사역이라 비난했다. 시기심은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는 죄다. 만일 우리 또한 다른 지체에 대해 시기심을 갖고 깎아 내리거나 비난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죄임을 명심해야 한다.  2 우리가 부주의하게 많이 짓는 죄 중 하나가 바로 말로 하는 것이다. 말은 마음의 상태와 인격을 모두 반영한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언어 속에서 그들의 악한 본성을 보셨고, 그 말이 결국 그들을 심판하는 기준이 될 것을 경고하신다. 주님의 경고를 생각하고 우리는 언어 사용에 더욱 신중하고 거룩해야 한다. 마음에 선한 것을 쌓기 위해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며, 우리 생각이 말씀에 따라 사랑과 소망과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선한 계획으로 가득할 때, 우리 언어는 자연스럽게 변할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쏟아 내는 말들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칭찬받는 자들이 되어야한다.  주님, 바리새인의 불신앙을 닮지 않게 하시고, 불신앙의 죄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도록 근신하게 하소서!

2021.2.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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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9 (화) 마12:1-2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율법에 매여 고통 속에 사는 자들도 포함한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초대하시고 쉼을 주시는 분이심을 밀밭과 회당에서 증명하신다. 1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걷던 제자들이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 먹었다. 이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한 것으로 간주하고 정죄했다. 유대교 규례인 ‘미쉬나’를 보면 안식일에 해선 안되는 39가지가 나오는데, 그 중에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서, 쭉정이를 알곡에서 빼서, 손으로 비벼 쭉정이를 바람에 날림으로 세 가지 규례나 어긴 것이다. 여기에 주님은 다윗이 진설병(떡)을 먹은 사건(3,4, 삼상21:1-6)과 직무상 제사를 준비하는 제사장들이 안식일 규례를 범해도 정죄 받지 않는 사실 (5, 민28:9-10)을 말씀하시면서, 사랑 없이 드려지는 제사를 하나님이 원치 않으심을 지적하신다 (호6:6a). 우리는 주일예배를 율법으로 접근해선 안된다. 주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날로 여겨야 한다. 이것이 참된 안식이다 (막2:27). 2 회당에 한쪽 손이 마른 자가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 목적으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가한지 시험한다. 안식일에 일할 수 없는 규정을 들어 예수님을 고소할 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이 구덩이에 빠졌다면 끌어내는 것이 허용되듯이, 양보다 귀한 사람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에 행해도 옳은 것임을 말씀하시고, 고쳐 주셨다(13).  예수님께는 안식일에 병자가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생명처럼 중요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육체와 영혼에 모두 안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 본질을 충실하고, 비본질에 너그러운 넉넉한 믿음을 갖게 하소서!

2021.2.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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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8 (월) 마11:20-30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경고를,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겐 쉼을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tj 심판 혹은 구원의 기준을 발견한다. 1 (20-24) 소위 ‘복음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많은 권능과 이적을 행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능을 가장 많이 체험하고 은혜를 받은 이런 곳에서 예수님을 거절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우상숭배의 도시였던 두로와 시돈보다 고라신과 벳새다가 더 큰 재앙을 받고, 소돔보다 가버나움이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하신다. 더 많은 말씀을 받은 자에게 더 큰 심판이 임하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있었던 경고다 (암3:2). 복음의 삼각지대라면 구원의 삼각지대가 되어야 한다. 더 많은 말씀과 은혜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을 더 잘 믿고 사모하며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2 (25-30) 예수님을 인정한 일련의 무리가 있었는데, 바로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이다. ‘어린아이’는 헬라어로 ‘네피오이스’인데 ‘젖먹이’란 뜻이다. 젖먹이의 특징은 의존성이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전적으로 양육자가 모든 것을 해 줘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한다. 예수님의 자신의 메시아임을 인정하고,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갈망한다. 자신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철저히 안다. 주님은 이들에게 복음을 나타내시고, 초청하신다. 내 스스로 삶의 주인 노릇을 멈추고 주님으로 주인 삼아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쉽고 가벼운 멍에다. 주님이 주시는 안식과 자유를 누리며 나누자. 주님, 모두 불안과 혼동 속에서 참된 안식을 갈구하는 가운데,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안식이 오직 당신 안에만 있음을 전하는 자들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1.2.6 NAZAM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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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 토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6 (토) 마10:34-42 예수님은 열두 사도에게 제자도를 가르치시고 파송하시기 전,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지 알려주셨다.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에서 어떤 만남이 있을까?  1 주님은 이 땅에 평화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하신다. 이는 진리를 위해 어려움(검)을 겪고 난 뒤, 얻게 되는 평화를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의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불신자들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박해를 받는다. 그 불신자들이 가족 안에서 있을 수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신앙은 그야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38). 그 길은 수치의 길이다. 형장까지 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 세상 수치와 박해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잃을지라도 끝까지 신앙을 지켜야 하는 진리를 잊지 말자. 2 유대에서는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동일시했다. 그래서 보냄을 받은 자를 영접하고 환대하면 그것은 곧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과 박해를 받지만 그들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자들도 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은 큰 영광으로 여길 수 있음을 주님은 말씀하신다 (40-42). 섬김은 없던 것을 구해서라도 영접하려는 마음도 좋지만, 먼저 자기 수준 안에서 최선으로 섬기는 것이 첫걸음이다(42).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전파의 여정 속에서 때로는 핍박과 고난도 만나지만, 주님은 곳곳에 사랑받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복들을 예비해 놓으신 것을 기억하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겠다. 주님, 주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리로 나오게 하시고, 나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을 더 가까이 따라가게 하소서!

2021.2.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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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금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5 (금) 마15:16-33 예수님은 열두 명의 사도를 파송하시면서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마음으로 선교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오늘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지침이다. 1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혜롭게 사리분별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라는 뜻으로 권면하신다. 주님께서 사역하실 때 많은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요8:7),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순결하셨다(히7:26). 갖은 박해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더러 끝까지 견디라고 권면하신다. 영혼구원을 위해 헌신하고 맡은 소임을 다하며 참아야 한다. 그것이 박해 많은 세상 속에서 성도가 사는 길이다. 2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귓속말로 들은 복음을 집 위에서 담대히 전파하라 하신다(27). 바로 심판하실 주권의 하나님을(28) 두려워하는 가운데,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라 하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의 그 누구도 두렵지 않다. 세상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누구 앞이든 예수님을 시인할 때, 주님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해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자. 주님, 전도와 선교 사역에 비록 고난이 따라도 끝까지 복음을 위해 수고하게 하소서!

2021.2.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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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목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4 (목) 마10:1-15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에 온전히 순종하여 복음 전파에 밑거름이 되었다.  제자들의 복음 전도 사역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일까? 1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 중 잃어버린 자들에게로 먼저 파송되었다. 제자들을 보내시되 홀로 사역을 감당하게 하지 않으시고, 서로 협력하도록 하셨다. 각자 다양한 배경과 성향을 가진 자들을 불러 협력하게 하심은 한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서로 협력하고 연합하는 공동체를 통해 일하기를 원하신다. 사랑으로 연합한 제자 공동체는 능력이 뛰어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세상에 전할 수 있다. 다툼과 분열은 전도와 선교에 매우 부정적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주께서 지체들과 함께 복음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음을 기억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하고 위로해야 한다. 2 주님이 열두 사도에게 선교지침을 주셨는데, 먼저는 ‘잃어버린 양’같은 유대인을 먼저 전도하고, 후에 이방인을 전도하는 것이며, 여행 중 필요한 물품이라 할지라도 가지고 가면 안 되었다. 사역 대상들에게 필수품을 공급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다. 합당한 자의 집에 들어가 떠날 때까지 머물러야 했다. 만일 영접하지 않은 자들이 있다면 이교도에 하듯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라고 하신다. 복음을 거절한 성은 영원한 불 재앙을 받게 된다. 성도들은 전도할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성도는 보내심을 받아 전할 뿐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 주님, 어디로 보내시든, 믿음의 동역자들과 연합하여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 믿음 가운데 제자의 삶이 최우선이 되게 하소서!

2021.2.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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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수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3 (수) 마9:27-38 마치 출애굽기에 나오는 10가지 기적(재앙)을 연상시키듯, 마태복음 8-9은 예수님의 10가지 기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기적 이야기를 통해 마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1 두 명의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외쳤다. 이들은 앞을 보지 못하니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음에도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심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사29:18). 성전에서 성경을 보는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도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몰랐다. 집 안까지 따라온 이들에게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 아무리 종교 지식이 풍부해도 예수님이 메시아란 사실을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영안이 밝은 사람이다. 2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장애를 치료해 주셨다. 8장에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나병환자, 백부장 종, 열병, 귀신 들린 두 사람을 치유하신 기적이 담겨 있다. 이런 기적들을 보고 사람들이 주님을 높였다 (8:27). 9장에서는 중풍병자, 회당장의 딸, 혈루증 걸린 여인, 두 명의 맹인,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는 기적이 나온다. 이를 본 사람들이 9장에서는 예수님을 멸시했다. 신성모독이라 여겼고(3), 귀신의 왕을 의지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34).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청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38)을 묵상할 때, 우리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 같은 자들이나, 주님 주변에 그냥 모여든 무리로 살아선 안되겠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고, 많은 영혼을 추수하는 일꾼으로 살아야겠다. 주님,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많은 은혜와 기적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메시아요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의 일꾼으로 기

2021.2.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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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2 (화) 마9:14-26 믿음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에 대한 보상은 당신이 믿은 대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라고 성 어그스틴이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었던 사람들의 믿음을 살펴보자. 1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을 올라간 날과 내려온 날을 기념하여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것을 당연시했는데, 물도 먹지 않았다. 우기가 아닌 건기에는 더 철저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의 핀잔에 예수님은 혼인집 비유를 드셨다. 신랑이 옆에 있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설명하셨다. 또 새 천 조각과 낡은 옷의 비유와 새 포도주와 부대의 비유를 하셨다. 이는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새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구약의 율법과 유대 전통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하러 오신 주님으로 인해 옛 것의 전통에 갇히지 않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신 것이다. 믿음은 우릴 구원하신 신랑 되신 예수님 때문에 모든 옛 것 (율법, 전통, 죄성 등)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2 회당장 야이로 (막5:22)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이 죽었으니 다시 살려달라고 엎드렸다. 회당장을 따라 가던 도중 혈루증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다. 그 믿음(21)을 보시고 예수님은 치유해 주셨다.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신 주님은 죽은 소녀를 ‘잔다’라고 하시며 손을 잡고 일으키 살아나게 하셨다. 비록 예수님은 연속으로 두 번 부정한 일을 행하셨다. 피 흘리는 여인과 접촉하셨고, 시신을 만지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믿음만을 보셨다. 다른 조건들을 보지 않으시고, 오직 믿음을 보시고 구원해 주셨다. 주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를 고백하며 승리하게 하소서!

2021.2.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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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월요일  큐티말씀  입니다.  2021.2.1 (월) 마9:1-13 마태는 8-9장에 나오는 기적 사건 중앙에 중풍병자의 치유 기사(9:1-8)와 마태를 부르신 기사(9:9-13)을 삽입했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1 치유를 강조한 마가복음과 달리 마태는 예수님의 죄 사함을 강조한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자, 주변에 있던 자들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주님은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과 병을 치유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5)면서 반문하신다. 병자를 치유하심은 주님께 죄 사함의 권세가 있으심을 증명하신 것이다. 치유 전에 죄 사함을 먼저 선언하셨다는 부분이 중요하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자유와 평강을 얻는다. 무리가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8)과 달리 서기관들은 배제되었다.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 증거를 보았음에도 불신앙을 고집했다.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신다 (요일1:9). 2 당시 세리는 로마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였다.  동족을 대상으로 세금을 거둘 때 더 많이 거둬들여서 이윤을 챙기는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당연히 동족들의 미움과 배척의 대상이다. 이방인과의 돈거래를 하는 이유로 정결법상 부정한 자들이다. 그런 세리 마태를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다. 그 초청에 머뭇거림도 없이 주님을 따랐다. 자신의 죄 사함과 부르심을 긴 기적의 기사 중앙에 배치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죄 사함을 받고, 부활의 삶을 살게 된 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다. ‘일어나’(9)는 헬라어 ‘아나스타스’로 ‘부활하다’란 뜻이다. 주님은 죄인 된 우리를 부르러 오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의 삶을 살게 하신다. 우리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제자 삼으시기 위해 오신 주님.  주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흘려 보내는 부활의 삶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