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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February, 2024

2024.2.3 (토) 막11: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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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2.3 (토) 막11:20-33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 날 아침, 그 나무는 뿌리째 말라 있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도전을 준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드러간 후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도전했는데, 이런 무모함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1 전날에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통해 예수님은 믿음의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에는 용서가 수반되어야 함을 알려 주셨다. 우리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는다. 우리에게는 ‘설마 그런 일이?’라는 의심이 아니라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더불어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받아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다. 용서가 없으면 믿음의 기도도 없고, 믿음의 기도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2 종교 지도자들이 나와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쫓아내고 상을 엎었는지,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는지 물었다. 그들은 성전보다 더 큰 이의 권위를 무시하며 (마12:6), 예수님의 심판 선언하신 것에 대해 항의했다. 이에 주님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으로부터 왔느냐?’라고 반문하셨다.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어 모른다고 대답했다. 주님은 저들의 도전하는 입을 막으셨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향한 반감과 미움을 쏟아 놓는다. 그러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15;18)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세상의 끝없는 도전에 당당히 응해야 한다. 주님, 세상의 끝없는 도전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드리며, 어떤 환난에서도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주의 발자취를 끝까지 따라가게 하소서!

2024.2.2. (금) 막1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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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2.2. (금) 막11:11-19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우리 구주 예수님의 기대에 부응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기대하시는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신앙생활은 어떤 것일까? 1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 시장기를 느끼시고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셨다. 하지만 그 나무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다. 이걸 보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행해 앞으로도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를 선언하셨다. 이는 단지 무화과나무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다.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의식만 갖고 있었지, 그들은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율법주의에 얽매인 위선이 전부였다.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는 현재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적용된다. 오직 예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영적으로 충만해져야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삶의 변화라는 열매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 2 베다니를 떠난 주님은 가장 먼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다. 성전은 제사를 위해 방문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에게 물건을 매매하는 상인들로 가득했다. 이를 보신 주님은 크게 진노하시며 상인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다. 하나님과 만남을 사모하는 자들을 위해 허락된 기도 장소를 종교 지도자들과 상인들의 탐욕 그리고 백성의 편의주의로 오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세속적 욕심과 영적 둔감을 책망하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우리 마음이 여전히 세속적 욕심으로 가득하다면, 더러워진 마음을 버려야 한다. 세상을 향한 탐욕 대신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부요를 사모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 주님,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거룩하고 성결한 삶의 열매를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2024.2.1 (목) 막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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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2.1 (목) 막11:1-10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주님은 당신이 ‘메시아’시라는 사실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젠 스가랴9:9의 예언을 성취하심으로 당신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알리셨다. 1 사람들의 환호 속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셨다. 어린 나귀가 상징하는 왕의 모습은 겸손이다. 어린 나귀는 말처럼 전쟁을 위해 사용되는 짐승이 아니라 짐을 대신 져 주고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사용되었다. 주님은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참된 평화를 주는 구제주로 오신 것이다. 어린 나귀가 짐을 지듯이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종으로 그들을 섬김으로써 그들에게 구원과 평화를 전해 주는 도구로 사용되길 원하신다. 2 스가랴 선지자는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을 예언했다(슥9:9). 그 예언과 같이 주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세상 왕들의 행렬은 특별하고 요란하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다가갈 수 있는 자리에 계셨다. 위화감을 주는 화려한 장식이나 삼엄한 호위도 없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낮추신 왕이심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당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스스로를 낮추신 분이시다. 이런 낮아지심 때문에 우리는 감히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님을 닮기 위해 날마다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분과 동행함으로 우리를 비우고 그분을 높이는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주께서 보이신 자기희생만이 진정한 평화를 심는 길이면 알아, 이웃을 섬김으로 평화를 전하는 도구로 우릴 사용하소서!

2024.1.31 (수) 막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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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1.31 (수) 막10:46-52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는 쉽게 주목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선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육신의 치유에는 감격하지만 영적 치유에 대해선 무감각하다. 성도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와 찬송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1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서 구걸하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간다는 소리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다.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라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의 칭호다.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예수님이 반드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포하신다. 믿음의 간구에 주님은 큰 은혜로 응답하신다. 2 바디매오의 눈을 고쳐 주신 주님은 ‘네 믿음이 네 눈을 뜨게 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신 것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믿음이 육신의 눈을 치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영혼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했던 거시다. 육체의 눈을 뜬 것은 그의 영혼 구원의 징표적 성격을 지닌다. 구원 받기 전 모든 사람은 영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그 모든 영적 장애가 치유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의 영광을 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된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구원의가치를 기억하고 구원을 베푸신 주님께 끊임없이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으로 충만하며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4.1.30 (화) 막10: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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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1.30 (화) 막10:32-45 예루살렘을 향한 길에서 주님은 그 길의 최종 목적지가 십자가와 부활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본문은 제자들의 몰이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 준다.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고 이방인에게 넘겨져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과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살아나셔서 그 영광을 보이시기 위해 그 길을 가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고난과 능욕을 당하는 길이지만 그 끝은 영광이란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2 이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이후 순교와 고난으로 예수님이 마신 잔을 마시고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38-39; 행12:2). 이 둘은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옆자리까지 가 보지도 못한 채 도망쳤다(14:50). 자기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3 나머지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의 행동에 화를 냈다. 그들 역시 같은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주님은 제자들에게 섬김과 종이 되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함을 가르치신 다음(43-44),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역시 섬기는 것이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임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해야 한다. 큰 자가 되고 으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음을 기억하자. 주님,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광임을 알고, 섬김의 자리에 항상 있게 하소서!

2024.1.29 (월) 막10: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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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1.29 (월) 막10:17-31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재물이기 때문에 재물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절대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여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1 재물이 많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여쭈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드에게 나눠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그에게 있을 것을 약속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아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갔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또 우리의 이웃을 내 자신같이 사랑해야 함(눅10:27)을 성경은 가르친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면 영생을 받을 수 없다. 아무리 평소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산다고 스스로 확신했던 이 부자 역시 예수님의 구체적인 실천 명령 앞에서 그 실체가 드러났던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는지, 영생을 얻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한다 (고후13:5). 2 베드로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고백한다. 이에 예수님은 당신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현세에서도 복을 받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 모든 것에는 가족과 나머지 모든 것도 포함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보다 앞서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그것이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가르침은 무소유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마6:33). 우리는 하나님과 복음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지 항상 경계하면서 먼저 주의 나라와 의 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 삶에 부족함이 없게 채우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푸심을

2024.1.27 (토) 막9:3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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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1.27 (토) 막9:38-50 성도는 믿음의 형제를 특별히 선대하고 사랑으로 섬김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지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1 요한은 자신들과 동행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사람에게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는 당신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므로 금하지 말라 하신다. 예수님을 믿고 그 능력을 덧입어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을 같은 편으로 여기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공동체보다 믿음 안에서 하나 되는 영적 공동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신다. 2 주님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선을 베푸는 그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사람이 결코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를 믿음의 형제로 여기고 선대해야 한다. 지체를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과 동일함을 기억하고 주를 섬기듯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3 예수님은 누구든지 당신을 믿는 이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하신다. 실족하게 하는 자와 또한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한 무서운 심판으로 경고하신다(42-47). 성도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악행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켜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 서로의 덕을 세우고 서로 넘어지지 않도록 세워 주는 역할을 감당함으로 마귀가 틈타지 못하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 나갈 수 있다. 주님, 교회 공동체 속에서 형제를 실족시키는 잘못을 경계하며 서로를 세워 줌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세워 나가게 하소서!

2024.1.26 (금) 막9: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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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1.26 (금) 막9:30-37 우리는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소망하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지기는 원치 않는 모순에 빠질 때가 있다. 죽음의 고난을 통해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에 동참함이 우리의 본분인데 말이다. 1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는 자들로서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께 걸고 따랐던 자들이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당연히 부활이란 말이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이신지 알지 못했기에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높은 자리를 차지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자리까지 낮아지심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시고 부활의 영광을 받으셨듯이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부활의 영광을 누려야 한다. 2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 계획 앞에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자인가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모든 인간의 본능적 욕구다. 제자들 역시 이런 욕망의 노예 상태였다.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대조된다. 그 질서에 따라 주님도 하늘 보좌 우편의 영광을 버리시고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죽음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주님,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작은 자를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4.1.25 (목) 막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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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1.25 (목) 막9:14-29 사람들은 초자연적 역사를 보면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기적을 낳는다고 말한다. 1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탄식하신다. 귀신 들린 자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할 수 있으면 아들을 고쳐 달라고 부탁한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며 책망하시며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때 그 아버지는 ‘내가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절히 외친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는 그 아버지의 청을 들으시고 그 아들에게 귀신을 쫓아내 주셨다. 우리는 참 믿음이 없다. 그 아버지의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는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 2 귀신이 떠나가자 아이가 죽은 것 같은 상태가 되어 축귀에 실패한 것 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심으로 다시 살리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연약한 믿음도 이처럼 죽음을 극복하는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실패 이유를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기도로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가르치신다(28-29). 믿음의 능력은 논쟁이 아니라(14-16) 기도를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주님,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 재물이 아니라 주님의 권능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가 결국 승리함을 잊지 말고, 늘 기도에 더 열심을 내게 하소서!

2024.1.24 (수) 막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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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4.1.24 (수) 막9:2-13 증인은 자신이 확실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해야 한다. 복음의 증인인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 지식에 근거한 복음의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다. 1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랐을 때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모습으로,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하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성경을 상징하는 인물들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대화하시는 광경은 너무도 두렵고 놀라운 것이었다. 너무 흥분된 나머지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을 위해 초막 셋을 짓고 그곳에 거했으면 좋겠다고 베드로가 말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황홀한 산 위가 아니라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세상이다. 2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에게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메시아 사명을 이루실 것과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할 사명이 주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 사건 후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담대하게 전한다. 성도는 은혜를 체험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할 복음 증거의 사명이 있다. 3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째 부활하시기까지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 강림의 역사가 임하기 전에는 두려워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죽음에 대하 두려움을 초월하는 믿음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주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복된 일임을 확신하고 담대히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