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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April, 2022

2022.4.2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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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23 (토) 말1:1-5 귀환한 유대 백성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릴 사랑하시며, 언약을 지키고 계신다’고 선포한 선지자가 말라기다. 1 포로기가 끝나고 돌아온 백성은 대부분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말리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다고 선포한다. 분열되어 흩어지기 전의 이스라엘을 보시듯 지금 유다 백성을 보시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여전히 있고 다윗 왕조가 재건되리란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기에 백성들은 낙담하고 있다. 하지만 포로기를 자나 말씀대로 다시 귀환하게 하시고, 작은 무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셨다.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현실에 매몰되어 낙심하면 어떠한 기쁨이나 가치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2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고 신앙적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의 증거임을 말라기 선지자는 가르치고 있다. 그 예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와 에돔이 당한 일을 언급한다. 에돔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 바벨론을 도와 유다 땅을 수탈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이들의 악행을 갚으셨다(BC 553에 에돔은 나바트인들에 의해 멸망당함).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신 이후로 한 번도 에돔을 이스라엘 보다 높이시거나 사랑하신 적이 없으시다.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금 내 안에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아닐까? 주님, 다른 사람들이나 나의 현실을 보고 불평하기 보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따라 지금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인해 ‘범사에 감사’를 실천하며, 받은 은혜 감사하게 하소서!   

2022.4.2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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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2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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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링크 2022.4.21 (목) 스10:1-15 길을 잘못 들었으면 방향을 돌이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바른길로 가야 한다. 성도는 기도만이 아니라 잘못된 행실을 돌이킴으로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1 이방민족들과 섞여 혈연을 맺고 살아가던 유다 백성의 죄를 에스라가 회개할 때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며 에스라 곁에 모였다. 에스라의 회개가 많은 백성들로 자신들의 죄의 심각성을 일깨웠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만든 것이다. 진정한 부흥은 수적 성장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를 동반할 때 부흥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죄 뿐 아니라 공동체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며 부흥을 소망해야 한다. 회개에 동참한 유다 백성은 죄를 자백하고 또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로 작정했다. 이들은 에스라 앞에서 말씀에 순종할 것을 맹세하고, 기한과 절차를 정해 체계적으로 모두 동참하게 했다. 회개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돌이켜 정상화시키는 행동이 포함되어야 한다. 2 이미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강제로 이혼을 시키고 생이별을 시킨다는 것이 오늘날 관점에서 볼 때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처사로 보일 수도 있다.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도 바울은 불신 배우자가 신앙을 이유로 이혼하길 원하면 그렇게 하지만, 헤어지기를 원치 않으면 이혼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고전7:12-17). 구약시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언약은 신약시대와 그 성격이 다르다. 이방 배우자를 취함에 있어 결혼 용어(히브리어에서)가 아닌 다른 단어를 사용했고, 또 이혼증서에 관한 언급이 없음을 볼 때 정상적인 결혼관계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시대의 성도는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거룩함을 행함으로 불신가족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다(행16:31). 옛 사람의 구습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온전한 회개를 이뤄야 한다.  주님, 진정한 회개를 통해 세상의 가치관과 풍습과 단절해야 함을 알아, 항상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2022.4.2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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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20 (수) 스9:1-15 성도는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회개함으로 영적 지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2차 귀환을 이끈 에스라는 70년의 포로 기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은 죄악의 뿌리를 보고 탄식하며 공동체를 위해 회개했다. 1 포로 귀환 후 이스라엘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일반 백성들 할 것 없이 이방 사람들과 통혼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의 관습을 따르고 있다는 소식을 에스라가 듣고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포로생활로 하나님의 심판(신7:3-4)을 받았던 동일한 죄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음을 듣게 되었다. 동일한 죄를 반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다는 의미다. 말씀에 계속 무시하면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죄에 대해 민감한 영적 지혜와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 2 에스라는 유다 민족이 저지른 동일한 범죄를 마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를 지은 것처럼 회개한다. 속옷과 겉옷을 찢은 상태로 무릎을 꿇고 여호와를 향해 손을 들고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민족의 죄를 놓고 영적 지도자가 처절하게 회개하는 모습은 포로 시대에 다니엘이 유다 민족의 죄를 마치 자기 개인의 죄로 여기고 회개한 장면과 같다(단9:1-9).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 가정, 교회, 나라와 민족의 죄를 회개하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법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주님, 모세의 기도를 들으사 이스라엘을 진멸하지 않으신 것처럼(출32:10-14), 민족과 나라의 죄를 두고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게 하소서!  

2022.4.1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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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19 (화) 스8:21-36 과거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은 빵 반죽이 부풀 시간이 없어 무교병을 구워 먹고 그 땅을 떠났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며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나갔다.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지키셨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다.  비슷한 일이 오늘 본문에도 나온다. 1 에스라와 그와 함께한 자들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자신들을 지켜 달라고 간구했다. 아닥사스다왕에게 자기들을 보호해 줄 군대를 요청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당신을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배반하는 자에게는 진노하신다는 말씀을 붙들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만을 의지하기로 결단했다. 이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그 능력을 보여주신다. 2 에스라는 제사장의 우두머리 중 열두 명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모든 무리가 성전을 위해 드린 헌물을 맡겼다.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잘 지켜야 할 책임을 맡았다. 이들이 운반했던 금 은 예물의 가치는 천문학적 수준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셔서 자신들을 지키실 것을 믿었고, 이처럼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고자 노력했다. 3 4개월 이상 걸리는 거리를 군대의 호위없이 이동하기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것도 천문학적 자금을 가지고.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아무 일 없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에스라와 함께한 자들이 성전에 들어가 헌물의 총량을 다시 확인해서 선정에 바친 다음, 거대한 규모의 번제를 드리며 예배했다. 이처럼 주님을 섬기고자 할 때, 하나님은 보호해 주신다. 믿음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확인하면서, 우리들 역시 먼저 기도하고 간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2022.4.1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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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18 (월) 에스라8:1-20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주도한 1차 귀환(BC537)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야 살고 있었다. 이미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 곳을 떠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에스라가 이끈 2차 귀환은 마치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땅으로 가는 것과 같은 선택을 한 셈이다. 본문은 당시 귀환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경의를 표하고 있다. 1 2차 귀환은 아닥사스다왕이 다스리던 BC458년에 이뤄졌다(1). 1차 귀환이 있은지 80년이나 지난 시점이니, 모두 페르시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마치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열거하듯 에스라는 귀환자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과거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세를 따라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났듯이, 이들도조상들의 땅으로 떠나려 했다. 만약 이들에게 하나님과 율법에 대란 교육이 대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2. 에스라가 2차 귀환을 게획한 이유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며 새롭게 하나님 나라를 재건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레위 사람이 없었다. 제사장의 후손은 있는데(2) 성전의 여러 일을 감당할 레위 자손이 없으면 성전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 이에 에스라는 족장들과 명철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을 섬길 레위 족속을 불러 모아보니, 작은 숫자가 모였다(16-17). 또한 에스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 인해 성전 일꾼을 구할 수 있었다(18-20). 모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익숙한 곳을 떠나 조상들의 땅을 향해 출발하려 하고 있다. 말씀으로 온전히 양육된 자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익숙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곳을 향하는 사람들이다. 주님, 아직 가 보지 못한 우리의 본향을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을 온전히 섬기기만을 소망하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2.4.1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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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16 (토) 롬5:6-11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다(요15:13).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들을 위해 죽으시고, 그 사랑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1 가끔은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한다. 그러나 원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경우는 찾아 볼 수 없다. ‘원수를 대신한 죽음’은 논리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인해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 아들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세상에선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이다. 성도는 생명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실천해야 한다 (마5:43-44). 2 우리 죄를 위해 주님이 죽으심으로 죄가 사해졌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사53:5).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천국 소망 가운데 세상에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불치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면 그 기쁨이 어떨까? 하물며 영원한 진노와 사망의 형벌에서 구원되었고 영생을 누리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야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성도는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감사의 삶을 누리자 (살전5:16-18). 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은 우릴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다. 그래서 우리는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으니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 사명을 지상명령으로 우리 모두에게 주셨으니 (마28:19-20), 성도는 먼저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여 그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주님, 우리가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구원의 은혜에 응답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2.4.1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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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15 (금) 요19:23-30 예수님의 고난은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했다.  하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고난 받는 어린양으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십자가에서 모든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다. 죄인들을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이유를 본문은 소개한다. 1 본문에 기록된 사건들은 구약에 기록된 메시야 예언을 성취한다. 먼저 예수님의 옷을 병사들이 제비 뽑아 나눠 가진 장면이다(시22:18). 또 다른 예언의 성취는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신 것이다(시69:21). 채찍질과 십자가로 인해 많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극심한 갈증을 느끼셨다.  메시아가 이런 고통과 멸시를 당하신 것이 바로 예언 성취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라면 우리는 분명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 알아야 한다. 바로 우리를 위해 보내 주기로 약속된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한다. 2 심한 목마름으로 신 포도주를 받으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 사명을 다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첫 번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와 죽음을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 죄인들 대신 죽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셨고,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죄의 권세에서 믿는 자들을 해방시키셨다. 그 은혜를 입은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내게 맡겨진 십자가를 인내함으로 감당해야한다. 지금 감당해야 할 고난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고 포기하고 싶어도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끝까지 감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한다. 주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전하여, 모든 사람들이 찾아 헤매는 구원과 영생을 전해주는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2022.4.1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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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14 (목) 요19:14-22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패를 붙였다.  그의 이 행동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진리를 드러낸 것이 되었다. 1 십자가에 붙이는 패에는 원래 그 사람의 죄목을 기록한 것으로 로마법의 엄중함을 각인시키고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패에는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패가 붙여졌다.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야 한다는 사명을 일깨워 주는 패다. 지금도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잘못된 가치관과 유혹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삼아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임하도록 우릴 부르셨으니 순종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자. 2 예수님은 왕이신 동시에 고난 받으신 메시아이시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려 이 땅에 오셨다. 메시아이신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류의 죄를 사하시는 메시아의 사역을 성취하셨다. 주의 죽음은 유대 지도자들이나 빌라도나 로마 군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어 주신 것이다. 구원의 은혜로 받은 영생에 합당하게 우리는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릴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 주고 있다. 아들조차 우릴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의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임을 알고, 이 땅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을 전하는 성도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2.4.1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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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13 (수) 요19:1-13 사람은 자기 관점에서만 보고 판단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판단이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 성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바라며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요한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께 씌운 관을 ‘가시 면류관’, 게다가 군인들이 예수님께 입혔던 옷 색깔이 자주색이라고 했는데, 왕이나 귀족들이 입는 고가의 옷 색깔이다. 동시에 ‘자주색’은 우리 죄의 심각성, 예수님의 피에 담긴 고난과 속죄의 능력, 예수님의 왕 되심을 동시에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예수님은 빌라도와 대제사장들의 무리 앞에서도 겸손하고 잠잠하셨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셨다. 바로 그 분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2 유대인들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한 것(7), 빌라도가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한 것(5), 예수님에 대해 ‘죄 없다’고 세 번에 걸쳐 공포한 것(18:38; 19:4, 6)은 모두 모르고 한 말이었으나 그 말은 실제로 모두 옳은 말이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로마군인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조롱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들의 동료들에 의해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으로 바뀌었다(마27:54). ‘유대인의 왕’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이였다. 예수님을 죽이려던 자들의 모든 행동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오는 일이었음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주님, 사람이나 세상에 대한 욕심과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간의 본성과 세상에 대해 담대히 살아가게 하소서!  

2022.4.1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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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12 (화) 요13:3-15 아버지께 돌아갈 때가 임박했음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미숙한 제자들에게 섬김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의 성품과 섬김을 닮아가는 자다. 1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이는 제자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섬김을 상징한다. 예수님께 속하려면 먼저 씻김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발이 더러워졌을 때는 주께 나아가 씻어 내어야 함을 가르치신다. 발을 씻는다는 의미는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악한 옛 습관과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연약함을 날마다 주님께 자기고 나아가 회개하고 새로운 변화를 위해 주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2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지극히 존귀하신 주님이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종들이 하는 일을 하신 것이다. 그분의 제자들 역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마음에는 다르 사람을 섬기기보다 섬김 받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다. 이런 마음과 싸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겸손한 성품이 열매 맺도록 해야 한다. 남이 외면하고 기피하는 일들을 내일로 여기고 솔선수범하며, 다른 사람의 필요에 민감히 반응하고 그것을 위해 열심을 낼 때 우리는 섬김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오롯이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우리가 더욱 주의 성품을 닮아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성숙해지며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2022.4.1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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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11 (월) 요12:23-33 성도는 누군가?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동일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런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1 예수님은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신다.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소욕대로 세상의 안락과 편안함을 추구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 반면에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며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권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한다. 주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지만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주의 희생으로 진정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분의 제자답게 나의 권리를 포기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2 주님은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주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또한 자기희생과 낮아짐이어야 한다. 손해도 감수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존중받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의 길을 따라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께서 보여주신 본을 따라 나의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을 택하며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참 제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2.4.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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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9 (토) 스7:1-10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은 한 사람을 준비하셨다. 바로 대제사장 아론의 16대손 에스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중에 에스라를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성전이 건축되고 난 후,  예배가 백성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지만, 긴 포로 생활로 인해 율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였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말씀의 사람 에스라를 선택하셨다. 그는 말씀 지식을 습득한 것을 넘어 그것을 삶에 적용하고 순종하는 일에도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길이다. 사도 바울 역시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라고 권면했다(딤후2:15). 혼탁한 현시대를 살아가며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사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2 에스라는 말씀을 연구하면서 개인의 영적 필요를 채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회복하고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10). 말씀을 바로 알고 말씀에 바로 설 때 당면한 모든 문제들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풀어갈 수 있음을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많은 삶의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가진 영적 결핍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할 거룩한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의 이웃 역시 말씀으로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주님, 아무리 분주하고 바쁘다해도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순종하는 일에 부지런하게 하옵소서!  

2022.4.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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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8 (금) 스6:13-22 다리오왕 제 6년에 성전 공사가 끝났다. 백성들은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감격스런 봉헌예식을 드렸다.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 백성으로서 각성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 백성이 깨어 있을 때 어떤 모습이 나타날까? 1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 정확히 70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성전이 완공되었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렘25:11; 29:10). 하나님의 인간 역사 개입과 주관하심이다. 이에 백성들은 자신들과 함께하셔서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다. 영적으로 각성한 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정성을 다해 아낌없이 내어 놓는다. 절대로 넉넉할 수 없었던 귀환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가 충만했기에 분에 넘치게 드렸다. 종종 사람들은 형편을 핑계 삼아 헌금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질의 복을 주시면 자신도 많은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드리는가’가 아니라 ‘영적으로 각성했는가’이다. 먼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감사의 마음이 회복되어야 한다. 2 봉헌 예식이 끝나고 백성은 모세율법에 따라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고자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귀환자들과 유다 땅에 남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온 자들과 여호와 신앙을 선택한 이방인들이 있었다. 일제히 이방의 요소를 제거하는 정결예식을 통해 세상의 모든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새롭게 다졌다. 영적 각성은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확신하고 순종을 결단할 때 나타난다. 지금까지 따르던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현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지 살펴보자. 주여, 나의 감정이나 의지를 말씀 앞에 굴복시키고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소서!   

2022.4.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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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7 (목) 스6:1-12  성전 건축에 대한 고데스왕의 칙령을 발견한 다리오왕은 성전 건축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명령한다. 대적들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은 성취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는 진리가 성도들에게 어떤 삶의 변화를 가져올까? 1 고레스의 칙령을 확인한 다리오왕은 성전 건축에 협조할 뿐 아니라 공사가 중단되지 않도록 재정 지원을 아끼지 말고, 나아가 공사를 방해하는 어떤 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엄중한 명령을 내린다.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 결과다. 대적들의 방해로 고난과 좌절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이 절대로 끝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우린 고난 속에서도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실 승리를 믿고 현재의 고난을 견디는 것이 인내다. 우리가 인내의 열매를 맺도록 일시적으로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때가 되면 우리의 인내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한다. 2  다리오왕을 통해 성전 재건 공사는 확실히 보장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적극적으로 건축 공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개인적 헌신이 요구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최후 승리를 주실 것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고자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말고 더욱 견고하게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 권면했다(고전15:58). 우리는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오직 사명에 충성을 다하며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주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난을 인내하며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 끝까지 충성하게 하소서! 

2022.4.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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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6 (수) 스5:1-17 성전 건축이 16년동안 중단된 채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BC 520년이 되어 비로소 다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공사를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으로 새롭게 각성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1 성전 건축이 중단되고 나서 일상의 안정감에 익숙해져 안주하고 있던 백성에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을 돌아보게 했고 다시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러자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담대히 일어나 다시 성전 건축을 재개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낙심한 영혼을 각성시키고 사명을 감당하게 일으켜 세워준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진정한 변화는 겸심과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침체되어 있다면 속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회복이 시작된다. 말씀 묵상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성전 건축이 재개되었다는 소문이 주변 지역에 퍼졌다. 그러자 닷드내 총독을 비롯한 관리들이 성전 건축 현장에 와 공사를 착수한 이유를 묻는다.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장로들은 더이상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담대히 공사를 진행했고, 고레스왕의 조서 내용을 상기시키며 당당히 맞섰다(13-16). 과거와 달리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건강한 영적 공동체 보호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2b, 5). 공동체 안에는 말씀을 전해주도록 명을 받은 선지자들이 있어 이들이 백성의 믿음을 돌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했다. 그 결과 백성의 믿음은 성숙해졌고 하나님이 돌보시고 보호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1-12). 경건한 사람들과의 교제는 이처럼 성도를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때 비로소 주님의 성전으로 자라 갈 수 있다. 주님, 말씀과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를 통해 회복을 경험하며 영적으로 늘 깨어있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소서! 

2022.4.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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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큐티   2022.4.5 (화) 스4:11-24 성전 재건을 돕겠다고 했던 대적들은 결국 본색을 드러냅니다. 당야한 정치력을 동원해 성전 재건을 훼방했고 그 결과 20년 동안이나 건축 공사가 중단되게 됩니다.  이처럼 대적들의 훼방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어떤 믿음과 자세로 그 상황을 이겨 내야 하는지 살펴보자. 1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대적들은 아닥사스다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예루살렘이 재건되면 제국의 반대 세력이 되어 왕에게 위협이 되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역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리라는 것이다. 아닥사스다왕이 두려워하는 부분을 공략해서 성전 건축을 중단시킬 근거를 찾은 것이다. 귀환해 온 이스라엘 백성은 미약한 상태였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거짓 상소를 올려 무력으로 공사를 중단시켰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대적들의 술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눈앞의 상황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의 뜻을 이루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2 왕은 상소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고 건축공사를 중단시켰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불러 정황을 제대로 알아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 생길 반역에 대한 두려움으로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어떤 항변의 기도도 없이 이스라엘 밳엉은 낙심하고 절망했다. 성전 건축을 포기한 채 집으로 흩어졌다. 왜 이들은 성전 공사 현장르 떠나기 전 이스라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는 않는가? 억울한 일이 지속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의 뜻을 묻고 도움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위기 앞에서 기도하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어그러진 상황을 바로잡으시며 주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주님,얼마든지 두렵고 낙심하기 쉬운 상황 속에서도 무엇보다 엎드려 기도하게 하소서!  

2022.4.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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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2.4.4 (월) 스4:1-10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고국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해가 지나 비로소 성전 건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성전 재건을 반대하는 주변 민족들의 방해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기는 현장에서 반대자들의 방해를 마주했을 때, 어떤 지혜와 분별력으로 무장해야 하나? 1 주변 민족들에게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이 수문을 듣자 스룹바벨을 찾아와 함께 공사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비교적 적은 수의 귀환자들에게 더 많은 노동력이 합세한다면 당연히 좋은 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스룹바벨과 지도자들은 이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온전히 하나님을 섬긴 자들이 아닌 다신교 문화에서 우상숭배를 해 왔던 자들로 성전 공사를 방해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접근했음을 간파한 것이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괜찮아 보여도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이 이런 위기를 판별하는 지혜의 원천이 되었다. 우리가 사탄의 교활한 방해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순수한 믿음에서 나오는 지혜로 철저히 무장해야 한다. 2.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유가 우상숭배의 결과였음을 인식하고 있던 스룹바벨과 리더들은 대적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함으로 대적들이 퍼뜨리게 될 다신교 문화를 철저하게 배격하고자 했다. 그들은 대적들이 가져다 줄 눈앞의 이익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신실한 관계를 택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협하는 세상의 유혹은 단호히 거절하고 피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사도바울은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찾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계속해서 추구하라고 권면했다 (딤후2:22).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도 함께 협력하며 서로 기도할 때 넉넉히 극복할 수 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성도간의 교제와 협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주님, 악한 자들의 방해와 유혹 앞에 주가 주시는 지혜와 굳은 믿음으

2022.4.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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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2 (토) 스2:1-70 본문은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다시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70년이 넘는 포로 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그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지켜낸 자들이다. 참된 믿음은 사명을 인식하고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1 포로로 잡혀 온 백성은 그곳 생활에 적응해 정착생활을 하고 있었다. 70년이 흘렀으니 안정된 삶의 터전을 떠나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가는 것은 비록 고향으로 귀환하는 것이라 해도 새로운 도전이고 더 척박한 여건에서 살아야 하는 선택이다. 귀환자들은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는 사명을 확실하게 인식했기에 이런 결단이 가능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잊어버리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로 끌려온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현실적 문제에만 골몰해 있는 태도에서 돌이켜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맡기신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사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해야 한다. 2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중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려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고레스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귀향에 필요한 모든 재정적 필요를 채우셨음에도 수많은 사람의 선택은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활의 안정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그 길을 바른 길이라고 착각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위험해 보이고 희생도 해야 하는 길어어서 선택하는 이가 적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약속아신 하늘의 상급을 기억하고, 믿음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영원한 그 영광의 약속을 붙잡고 날마다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 그 어떤 상황과 조건 하에서도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가 있게 하옵소서.

2022.3.2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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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21 (월) 눅22:54-62 성도는 실족했을 때 주님 앞에 회개함으로 다시 일어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1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시자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책임과 의무감을 갖고 위험을 무릎쓴 채 따라갔다.  베드로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세 번이나 그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그 말에 반박했다. 자기도 잡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본능적으로 부인했던 것이다.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베드로의 각오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우리의 각오와 의지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함으로 시험과 환난을 극복할 수 있다. 2 예수님의 예언처럼 닭이 울자 베드로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밖에 나가 통곡했다. 베드로의 이런 ‘부인’을 미리 알려주신 이유는 가룟 유다와 같이 멸망의 길이 아니라 회개의 길로 돌이키길 바라셨기 때문이다(32).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의미이다. 회개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복음 사역을 감당하며 하나님 나라의 충성스런 일꾼이 되어야 한다.  주님, 삶의 크고 작은 실패 속에서 회개를 통해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여 마침내 승리에 이르게 하옵소서!

2022.3.1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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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19 (토) 눅22:24-38 성만찬의 자리에서 계속해서 예수님은 성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성만찬의 정신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떡과 잔을 나눌 때 어떤 정신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셨는데, 이런 일은 사실 종들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났다. 성만찬의 정신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왕이나 집권자들과 같은 모습을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성찬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 섬기는 종이 되겠다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2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고, 주님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신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돌이키고 나면 네 형제들을 굳세게 하라’는 말씀을 주신다. 성만찬의 정신은 ‘주님처럼 고난도 달게 받겠습니다’이다.  나머지 제자들 역시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가르치신다(35-36).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고난 당할 것이고, 그 과정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곧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의 고난 앞에서 오히려 칼 두 자루를 내보이며 자기들의 준비 상태를 예수님께 보였지만, 이들 역시 자기들 앞에 놓인 고난을 알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그들도 부족한 자들이었음에도 결국 주님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부족한 자들이지만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주님, 교회의 지체로서 성만찬과공동체 예배를 통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되새기며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걷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