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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September, 2021

2021.09.25 NZ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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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링크   2021.9.25 (토) 딤전3:14-4:5  조직이 세워졌다고 해서 무너진 교회가 금방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사역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를 목회할 때 무엇보다 경건 훈련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1 바울은 감독(장로)와 집사를 세우는 기준을 제시해 교회의 조직을 갖추는 가이드를 준 다음, 경건 훈련에 대한 가르침을 설명한다. 교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선 경건의 능력으로 채워져야 하기 때문이다(15). 직분과 조직만 갖추었을 뿐, 지체가 경건한 생활을 지속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집단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경건의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과 복음 전파를 통한 영광이다(16). 모든 성도가 경건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가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2 경건의 반대는 신비적 열광주의(1)나, 위선(2), 금욕주의와 율법주의(3)다.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며 자신을 주목하게 하거나 성경과 기도생활을 자랑하면서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면서, 실제로 각종 악을 행하는 거짓 선생들이 많다. 믿음의 공동체는 이런 사람들을 잘 분별하고 경계하며, 참된 경건을 위해 힘써야 한다.  3 거짓 경건은 예배당 안에서만, 다른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만 경건하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특정한 시간, 장소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4-5). 경건의 훈련이란 말씀과 기도의 영향력을 우리 삶 전반에 퍼뜨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말씀과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경건이다.  주님, 매일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말고 꾸준히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소서!

2021.09.24 NZ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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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링크   2021.9.24 (금) 딤전3:1-13  거짓 선생들에 의해 큰 혼란을 겪고 나면 조직이 무너지기가 쉽다. 바울은 새롭게 교회를 조직하도록 가르치면서 어떤 사람이 리더십으로 세워져야 하는지 기준을 세우고 있다.  1 당시 ‘감독’의 역할은 상당한 희생을 각고해야 했기에 누군가를 억지로 세울 수는 더더욱 없었다. 바울이 제시하는 감독의 기준을 보면 교회의 리더십으로 보기엔 너무 평범해 보인다 (2-5). 성경 지식이나, 어떤 리더십이나, 사람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과  인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발견한다. 초신자를 피하고 또한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상황에서도 그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라고 권면한다(6-7). 이처럼 교회 리더십은 어떤 특별한 능력 보다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자격 요건이다.   2 초대교회 시대의 집사는 기본적으로 교회 내 활동보다 외부 활동이 더 많았을 것이다. 구제 사역 역시 교회에 큰 사역이었을텐데, 이런 중요한 사역을 위해 세운 사람들이 집사였다. 집사의 자격 역시 감독의 자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뢰성이 깊어야 하고(8-9), 재정적인 면에 있어 정직해야 했다. 교회에서 직분을 잘 감당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약속되어 있다(13). 직분을 받아 섬기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성취감보다는 피로감을 느끼기 쉽다. 그렇기에 인격적으로 잘 갖춰진 사람이 감당해야 하고, 교회는 이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축복해 줘야 한다.  주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김에 있어 먼저 주님을 닮은 인격을 잘 갖추어 모든 지체들을 아름답게 섬기게 하소서!

2021.09.23 NZ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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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링크   2021.9.23 (목) 딤전2:1-15  에베소에는 헬라의 우상들로 가득한 곳이었기에, 세속적인 가치가 교회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에베소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디모데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바울은 가르친다.  1 먼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면한다(1-2). 헬라 문화를 두둔하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달리 바울은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 가르치면서 특별히 예수님이 ‘사람’이였음을 강조했다(5). 바울이 그랬듯이 디모데 역시 헬라 철학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당히 섞어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학문이나 가치관과 복음을 뒤섞는 가르침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2 당시 경건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배척하고 배격하는 자들이 많았고, 에베소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은 정기적으로 예루살렘 가서 기도하고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은 ‘분노와 다툼을 피하라’고 하면서, 성전이 아니라도 ‘각 곳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친다(8). 여성에게는 헬라의 외모 지상주의 풍조를 버리고 선한 행실을 보이라고 권면한다(9-10). 또한 교회 안(3:15)에서는 영적 질서를 위해 여자가 가르치는 것(설교)과 남자들에 대해 잘못된 권세 (usurp or misappropriate authority)를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에덴동산 사건을 통해 금했다. 또한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어머니로 가정에서 자녀를 낳고 (영적 자녀 포함) 키우는 것이 ‘구원(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누리는 여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임을 가르친다. 고대나 지금이나 성도는 세상의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일상에서 참된 경건을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  주님, 우리가 바른 신앙관을 갖추지 못해서 세상의 문화와 풍조에 휩쓸리지 말고,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2021.09.22 NZ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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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링크   2021.9.22 (수) 딤전1:12-20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섬기는 디모데에게 강조한 사역은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성도들을 미혹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어떻게 권면했나?  1 주를 섬기는 직분은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도리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가 되었다고 바울은 고백했다(12-13). 바로 주의 은혜인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고 직분을 받은 것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 자기 능력과 자격을 내세우는 것은 이미 벗어난 것이다.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아는 진정한 사역자는 그저 겸손히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한다.  2 율법의 눈으로 본다면 가장 구원받지 못할 ‘괴수’인데, 주님이 자신을 ‘본보기’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구원이 은혜임을 보여 주는 것임을 바울은 강조했다(16). 그래서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존귀와 영광을 영원토록’ 받으셔야 하는 분임을 선포한다(17). 탁월한 지성과 혈통을 자랑할 만했지만, 자신을 오히려 낮춤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는 것이 바로 사역자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3 바울은 에베소교회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에게 가르침을 받지 말고, 신성모독의 죄를 짓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사탄에게 내주다’는 말은 사탄의 지배 아래 넘기는 것과 공식적인 출교를 의미한다(20). 이렇게 출교할 수 있으려면  디모데가 먼저 ‘자신을 지도한 예언’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워야 했다(18). 결국 교회 지도자의 권위는 사람의 인정, 지식이나 능력, 지위가 아니라 말씀에 바로선 주님을 닮은 성품(믿음과 선한 양심)에서 나옴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참된 사역자를 분별하고, 세우고, 섬기게 하옵소서!

2021.09.21 NZ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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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링크   2021.9.21 (화) 딤전1:1-11  디모데전서는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디모데에게 사역의 마음가짐을,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디모데에게 순종을 당부하는 바울의 서신이다. 사역자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뭘까?  1 바울은 짧은 두 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세 번 반복하며 강조했다.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된 아들’로 부른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사도가 된 것처럼, 디모데 역시 에베소의 사역을 감당할 직임 역시 하나님의 명령을 따는 것임을 뜻한다. 목회의 권위는 사람이 아닌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교회의 모든 권위가 오직 예수님께 있음을 철저히 인정하고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2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일전에 경고한 대로(행20:29-31) 에베소에도 거짓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복음 외에 헬라 문화와 유대교의 ‘족보’같은 이야기로 교회를 흔드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므로 선생이란 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르친다고 주장하지만(7), 이들은 깨끗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없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었다(5). 교회는 이단과 거짓 가르침에 휩쓸리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3 바울은 유대교의 신화적 교훈으로 교회를 흔드는 자들을 경계하면서도 율법, 즉 구약성경을 바로 사용해야 함을 분명히 밝힌다. 율법은 악한 자들을 바른길로 돌이키게 하기 위한 것이기에 반드시 바른 교훈, 즉 복음으로 해석 되어야만 한다(9-10). 그래서 바울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강조하며 바른 교훈은 모두 이 복음에서 나옴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일꾼은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위에 서서 세상의 다른 가르침, 왜곡된 가르침을 분별해 믿음의 지체들이 거짓에 오도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주님, 세상의 헛된 지식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굳게 서서 살아가게 하소서!

2021.09.20 NZ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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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링크   2021.9.20 (월) 삿21:16-25  사사기는 어처구니없는 죄악의 이야기로 마감된다.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을 따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이스라엘이 어디까지 악해졌는지 살펴보자.  1 소수 불량배들을 비호하고 전체 11지파와 싸우려 했던 베냐민 지파의 죄와 형제 지파를 마치 가나안 족속 진멸하듯 여인과 아이들까지 죽인 11지파의 죄가 어우러져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스라엘 리더들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16-17) 하나님께 맹세한 것 때문에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사실 이때 필요한 유일한 것이 회개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이 모든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은 것이 결국 더 크고 가중한 죄로 이어지고 말았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그냥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더 심한 죄로 이어진다.  2 사람을 납치하는 것을 하나님은 살인으로 간주하셨다(출21:16).  그런데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베냐민 지파의 존속을 위해 여호와의 명절을 여인 납치의 기회로 삼으라고 조언한다. 베냐민 지파에게 사람들의 딸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을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납치행위가 얼마나 큰 죄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22-23). 율법에 맞지도 않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이 금지한 행위를 죄책감 없이 행하는 것이 바로 사사시대의 모습이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가르침 안에서 행하지 않으면 결국 죄가 더 큰 죄를 낳고, 그 죄를 막으려다가 돌이킬 수 없는 정도의 큰 재앙을 만나게 된다.  3 24-25절은 사사기 19-21장의 결론이자 사사기 전체의 결론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12지파가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가나안 족속들의 침공이 있을 때 하나가 되어 막아 내지 못했다. 내전을 겪은 후 이스라엘 자손들이 각기 자기 가족에게도 돌아갔다.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는 모습을 암시한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혼란의 시기를 지나게 된 것이 바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모이

2021.09.1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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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18 (토) 삿20:29-48 음성링크    하나님은 11지파에게 두 번의 패배를 경험하게 하셔서 그들의 온전하지 못함을 드러내셨다. 기브아의 악행을 단죄하지 않은 베냐민 지파에 대해서는 마치 아이성의 가나안 족속에게 내리신 것과 같은 심판을 내리셨다. 1 베냐민 사람들이 기브아에서 패배하는 모습은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패배한 아이성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수8:10-25). 두 번의 승리에 도취된 베냐민 군사는 함정에 빠졌고, 그 싸움에서 죽게 될 것을 매우 늦게 깨달았다(32, 34). 겨우 천 명도 안되게 살아남고, 2만5천명이 죽임을 당했다(15, 34-35).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만하다가 완전한 파멸에 이르는 원칙을 발견한다. 죄를 지어도 아무 일이 없다며 계속 그 죄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다. 그때가 오기 전에 빨리 돌이켜야 한다. 2 사사기 저자는 베냐민 사람들의 파멸을 서술하면서도 11지파가 베냐민 사람들에게 지나친 징벌을 가했음을 내놓지 않았다. 이들이 전투 의지를 잃고 도망가자 끝까지 추격하여 ‘이삭 줍듯’ 죽여 살아남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43,45, 47) 모든 성읍이 모두 불탔다. 사실 베냐민 사람들이 진멸한 대상의 가나안 민족은 아니었다. 자만하고 자기 죄악을 제거하지 않는 자는 결국 다른 어리석고 악한 자들에 의해 심판을 당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일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해지는 이스라엘 내전 상황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주님, 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 안에서 파멸한 베냐민 지파를 보면서, 나의 매일의 삶 가운데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소서!

2021.09.1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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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17 (금) 삿20:17-28 음성링크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 지파와 싸우는 이야기는 수7-8장의 아이성 전투와 매우 흡사하다. 기브아의 불량배를 감싼 베냐민 지파나, 이 문제에 대응하는 나머지 이스라엘 전체에도 허물이 있었다.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1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 군대가 약60만명(민1:46; 26:51)이었고, 지금 40만 명이 참전했으니 거의 전 병력이 동원된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 조상 야곱의 성지인 벧엘로 올라가(창35:1-3) 누가 먼저 베냐민과 싸울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칠 당시와 상황이 일치한다(18b; 1:1-2). 11지파는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 생각하고 가나안을 칠 때처럼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었다(19-20). 그러나 패배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은 전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이스라엘 전체를 징계하신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2 두 번의 패배 후를 먼저 경험하게 하신 후 하나님은 세 번째 벧엘에 모여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묻는 자들에게 응답하셨다(26-27). 하나님의 언약궤와 대제사장 비느하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앞의 두 번과 다른 점이다(27b-28a).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대제사장을 통해 말씀을 받았다. 이번에는 베냐민을 향해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졌다.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따르지 않으면서 같은 공동체 구성원을 정죄하고 징계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진정한 연합을 이루는 뼈아픈 과정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어나게 하신다. 주님, 먼저 내 자신을 돌아보고 형제의 잘못을 나의 일처럼 받아들여 함께 회개하고 연합되게 하소서!

2021.09.1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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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16 (목) 삿20:1-16 음성링크    영적으로 침체된 이스라엘 내부에 갈등이 시작되고, 결국 무너져 가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것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1 이스라엘 최북단(단)에서 최남단(브엘세바)까지 모든 지파에서 40만명이 미스바에 모였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불경건과 죄는 그들의 연합을 무너뜨리는 요소가 되었다. 먼저 이 레위인은 이스라엘 총회 앞에서 자신의 불경건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첩을 취한 것), 오직 피해 사실만을 강조했다. 기브아 사람들의 행태에 비겁하게 대응했고, 또 사람의 시신을 훼손하는 망령된 일을 하고서도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악하고 수치스런 짓을 했기 때문에 내가 내 첩을 데려다가 토막을 냈다’고 항변한다. 레위인의 불경건함 역시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 사실 이스라엘이 이같이 군사적으로 연합해서 싸워야 할 대상은 가나안 민족들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 하나님과 멀어짐이 생기고 결국 공동체가 균열되고 서로를 대적하는 일이 생겼다. 베냐민 지파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의 축소판이다. 회개하며 나와야 할 베냐민 지파는 기브아의 불량배를 이스라엘에 넘겨 악을 제거했어야 했는데 이를 거절하고 싸우러 나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죄악을 멀리하지 않으며,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 주님, 세상과 치르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동체 내의 갈등은 사랑과 용서로 서로를 덮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도리임을 알아 영적으로 항시 깨어 있게 하소서!

2021.09.15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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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15 (수) 삿19:16-30 음성링크    하나님을 떠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무자비하며 인간성이 말살된 비정한 세속적인 사회였다. 무자비하고 비정한 이스라엘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1 레위인 일행이 기브아에서 유숙하게 된 곳에 그곳 불량배들이 그 집에 찾아왔다. 동성애를 위해 레위인을 요구했으나 그는 첩을 밖으로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내주었다. 밤새도록 능욕을 당한 첩은 결국 죽었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이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소돔을 떠올린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음란하고 폭력적인 세상 문화를 정화시킬 책임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셨다. 우리가 기브아처럼 세상과 구별되지 못한 모습으로 세상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 채 오히려 세상을 닮아 가고 있다면 속히 돌이켜야 한다. 성도는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2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밤새 레위인의 첩을 능욕했고 결국 그녀는 죽었다. 레위인 역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않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녀를 내어주었고, 첩의 죽음 앞에 어떤 자기반성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기 첩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에 대한 분노만 있을 뿐이다. 그 분노로 첩의 시체를 토막내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거룩한 지위와 책임을 가진 레위인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서 어려움 당한 자에 대한 어떤 동정심, 애통함, 긍휼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 자들이다. 말로만 아니라 행함으로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잘 지켜내야 함을 몸소 보이는 이 시대의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소서!

2021.09.1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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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14(화) 삿19:1-15 음성링크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던 그 시대는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다. 영적으로 타락하면 인간관계도 타락하게 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적 타락이 가져온 잘못된 인간관계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1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레위인이 베들레헴 출신 여자를 첩으로 얻었다. 이는 쾌락과 세속적 자부심을 얻으려는데 기초한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남편에게 나쁜 일을 하고는 친정으로 가 버렸다. 레위인은 자기 만족을 위해 그녀를 다시 데려오려고 처가를 방문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인간관계에서도 신실하고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동기와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내가 삶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와 오직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영적 타락은 자기만족을 위한 관계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다. 2 첩을 데려오기 위해 그녀 집을 찾아간 레위인과 그녀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고 무시했던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사위를 여러 날 집에 머물게 하면서 극진히 대접하지만, 그 기간에 첩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그녀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저 소유물로 취급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사회일수록 사람들을 조건과 배경을 갖고 구분 짓고 차별한다. 연약하고 작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달은 사람들을 통해서만 사회적 차별이 사라질 수 있다. 지체들을 주님을 대하듯 사랑하고 섬길 때 세상에서 차별받고 연약한 자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의 이기심으로 깨어진 인간관계가 온전히 회복됨을 알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바른 인간관계를 세워가게 하소서!

2021.09.1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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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13 (월) 삿18:14-31 음성링크    레위 청년을 제사장으로 삼았기에 여호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미가의 집에 엄청난 위기가 찾아왔다. 다섯 정탐꾼이 미가 집에서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탈취하고, 그 집 제사장이었던 레위인을 포섭해서 데리고 갔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삶에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타락을 본다. 1 자기 집에 복이 내리기를 소망하며 제사장을 고용했는데 단지파 사람들에게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기 것을 빼앗아 간다고 항변하는 미가는 그 신상이 자신이 만든 신이라고 말했다. 다분히 기복적인 관심만 있을 뿐 올바른 신앙이 아니었다. 자시의 유익만을 위해 신을 만들던 시대였다. 사람이 만든 신은 결국 실망만 안겨 줄 뿐이다. 참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 대신 무엇이든 신으로 만들려는 것이 인간이다. 참되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남 없이 그 어떤 곳에서도 참 만족을 얻을 수 없다. 2 미가 집에 제사장으로 고용되었던 레위 사람은 이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다. 좀 더 많은 보수와 명예를 기뻐하며 그동안 머물렀던 미가의 집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났다.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단 지파를 더욱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제사장이 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를 도와야 할 임무를 지니고 태어났으나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의 모습은 전혀 보여 주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유익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특권을 받은 우리는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데 힘써야 한다. 세상의 빛과 소금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으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주님, 하나님만이 우리 삶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인생을 영원한 기쁨과 평안, 그리고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임을 삶으로 고백하며 살게 하소서!

2021.9.1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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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11 (토) 삿17:1-13 음성링크  사사기 후반(17-21장)은 사사들이 등장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사사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에 대한 통렬하고 적나라한 기록을 통해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철저히 타락한 상태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1 에브라임 지역에 미가란 사람이 등장한다. 미가가 어머니의 돈을 훔쳐갔다가 어머니의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 그 돈을 돌려주게 된다. 미가의 어머니가 저주를 돌이키고 그 은으로 아들을 위해 신상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도 만들고,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게 된다. 이는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마음대로 행하는’ 잘못된 영적 상태임을 지적한다. 성도의 신앙은 오직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2 미가 집안의 왜곡된 신앙생활은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다. 베들레헴 출신의 한 레위인이 미가의 집에 왔는데, 그가 레위인이란 사실 때문에 그를 제사장으로 있어 달라고 한다. 그 제안을 좋게 여긴 이 사람이 미가의 집에 머물자. 미가는 레위인이 자신을 위한 제사장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으로 기대했다. 레위인 역시 돈을 벌기 위해 우상이 세워진 신당에서 한 사람을 위해 제사장이 되었다. 이는 영적으로 얼마나 타락한 시대였는지를 보여준다. 레위인이 제사장이 되었다고 복을 기대한 미가의 신앙은 우상과 부적을 만들어 복 받기를 구하는 이방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주여,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항상 출발하게 하소서!

2021.9.1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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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10 (금) 삿16:23-31 음성링크  삼손이 블레셋에 포로로 끌려가 수모를 당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하지만 절망의 시간에도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구원 약속을 이루셨다. 1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삼손을 사로잡고 승리의 감격에 빠져 자신들이 섬기던 신 다곤 앞에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 받은 사람들이다. 열방 중에서 제사장 역할을 하길 바라신다. 이방 민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사사 시대에는 오히려 이스라엘로 인해 하나님이 조롱받았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 2 블레셋은 삼손을 불러다가 조롱했다. 하나님을 버리면 이방 사람들 앞에서 주의 백성은 조롱거리가 된다. 삼손에겐 이제 소망이 없다. 자신의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손의 인생은 끝났을지언정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도, 변경되지도 않았다. 블레셋을 물리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은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신다. 3 절망의 순간에 삼손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삼손이 온 이스라엘도 하지 않았던 그때에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강하게 하여 원수를 같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의 이 간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비참한 최후를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엄중했는지 그의 마지막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깨닫는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아멘, 주여! 주의 뜻에 부합된 삶을 살아 주님만 모든 영광을 받으소서!

2021.9.09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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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9 (목) 삿16:15-22 음성링크    나실인으로 태어나 나실인으로 살아야 했던 삼손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 나실인 규례를 대소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힘을 자기 능력처럼 과시하고 죄를 짓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를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듯 보인다. 1 집요하게 삼손의 힘의 근원과 그를 무력화시킬 방법을 얻어내려는 들리라 때문에 삼손은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다. 마음에 평안함이 없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방 여인을 사랑한 자에게 행복과 평안이란 없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평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2 삼손의 비밀을 알게 된 들릴라는 삼손이 자는 동안 그의 머리털을 밀었다. 그리고 블레셋 리더들을 불러 모았다. 잠에서 깬 삼손은 이전처럼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이미 여호와의 영이 떠나셨음도 알지 못했다. 두 눈이 뽑힌 채로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사람으로 몰락했다. 그의 전락은 오랜 기간에 걸친 누적된 죄의 결과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말씀은 일말의 희망이 아직 남았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상관없이 살아선 안된다. 그분의 영광을 구하고 거룩을 추구하는 삶이 복된 인생이다. 주여, 우리 삶의 내용이 우리의 정체성과 일치하도록 성령에 붙들려 살아가게 하소서!

2021.9.08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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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8 (수) 삿16:1-14 음성링크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을 보냈지만, 삼손은 사사로서 책임 있게 행동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욕대로 행동했다. 이스라엘에 평안을 가져다주어야 할 사사의 사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 삼손의 생애 마지막 사건이 시작된다. 블레셋 주요 도시인 가사에 내려간 이유는 블레셋과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좋은 대로 행동하기 위함이었다. 한 블레셋 창녀를 보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했던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새벽에 삼손을 죽이려 했지만, 삼손의 괴력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스라엘 구원을 위해 허락된 힘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했다. 욕망 때문에 우리 스스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약1:13-14). 2 삼손은 들릴라란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들릴라는 블레셋 사람들의 회유에 넘어가 삼손이 가진 힘의 근원과 그 힘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알아내어야 했다. 매번 거짓말로 넘기긴 했어도, 삼손은 자신의 힘의 근원을 묻는 들릴라의 질문에 하나님을 생각했어야 했다. 집요하게 공격하는 사탄의 게임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결국은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까지 모두 잃게 된다.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죄의 길에 깊이 빠지기 전에 돌이켜야 한다. 주님,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사명을 잊고, 세상 욕심으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2021.9.07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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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7 (화) 삿15:14-20 음성링크    비록 하나님께서 삼손을 들어 이스라엘의 대적 블레셋을 치셨지만, 삼손은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높이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사사시대 최고의 암흑기 동안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심을 본다. 1 삼손은 결박된 채 블레셋 사람들이 진 치고 있던 레히에 도착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크게 함성을 질렀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했고 그를 묶고 있던 결박이 끊어졌다. 삼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기이한 일을 행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또 감당할 수 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명을 성취했을 때도 겸손함을 갖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2 삼손은 ‘방금 죽은’ 당나귀 턱뼈를 무기로 삼았다. 짐승의 사체에 접촉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 순간에도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움직여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다. 그곳을 ‘턱뼈의 언덕’이라 이름 지었지만, 그의 승전가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찾아볼 수 없다. 승리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한 영광을 우리가 취해선 안된다. 3 자신의 능력을 자화자찬하던 삼손은 이내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자신이 할례 받은 하나님의 종임을 내세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했다. 하나님은 삼손을 위해 샘을 터뜨리셨고, 그는 물을 마신 후 그 샘을 ‘부르짖은 자의 샘’이라고 불렀다. 당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조차 잊어버린 시대였다. 비록 삼손이 20년동안 사사로 있었지만, 그 땅이 평온했다거나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부족한 자라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뿐이다. 주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1.9.06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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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6 (월) 삿15:1-13 음성링크   삼손은 자신을 속인 이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결혼식도 마치지 못하고, 장인은 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냈고, 블레셋과는 원수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사사가 이렇게 방탕하게 사는 중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손길을 뻗고 계셨다. 1 결혼이 파탄 난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삼손은 선물을 가지고 블레셋 아내를 찾아갔지만, 이미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졌다. 이로 인한 삼손의 분노는 블레셋 전체에게 향했다. 여우 300마리를 이용해서 그들의 곡식들을 모두 불살랐다. 큰 손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불태워 죽였다. 삼손은 아내가 죽자 더 크게 화가 나서 블레셋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숨었다. 삼손의 그릇된 분노를 통해 하나님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의 사명을 자기도 모르게 성취해 가도록 이끄셨다. 2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이 거하고 있던 유다 땅으로 전쟁을 하려고 왔다. 이에 유다 사람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삼손을 블레셋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삼손 한 사람의 다툼이 그가 속한 단 지파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에까지 확대되었음을 본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지배 받는 굴욕적 삶을 벗어나고자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현실에 안주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고민도 하지 않게 된다. 대적과 싸우기 보다는 현실과 타협하려 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헤아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주님, 세상에 종노릇하지 말고,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섬기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게하소서!

2021.9.04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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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4 (토) 삿14:1-9 음성링크   하나님의 영이 삼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심은(13:25)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는 말씀(13:5)이 성취되어 감을 뜻한다. 그러나 나실인으로 놀라운 일들을 감당해야 할 삼손은 실제로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1딤나는 본래 유다 지파의 땅이었으나(수15:10, 57) 영토가 작은 단 지파에게 주어졌다(수19:40, 43). 그런데 단 지파 사람들이 그 땅을 점령하지 못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했다. 그곳에서 삼손은 한 여인을 보고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부모에게 요구했다. 나실인으로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더더욱 금지된 일이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한다”(3)란 표현을 직역하면 “그 여인이 내 눈들에 좋다”이다. 사사 시대를 대표하는 구절의 말씀이다(17:6; 21:25).삼손은 그저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했지만, 하나님은 이런 상황도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사건으로 사용하셨다(4). 하나님은 우리의 악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 우리가 실족하고 때론 불순종하여도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 2 삼손과 그의 부모가 딤나로 내려가던 길에 사자를 만났는데,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여 사자를 맨손으로 죽였다. 이후 다시 그 길을 가다가 사자의 주검에 꿀이 있는 것을 발견한 삼손은 그것을 손으로 떠서 먹었고, 부모에게도 가져다 주어 먹게 했다. 나실인으로 그는 실패한 사람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동물의 사체와 접촉하는 것은 나실인에게 금지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사사로, 그것도 구별된 나실인으로서 어떤 자질도 삼손은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구원을 얻는다면 이는 삼손의 탁월함이 될 수 없다. 삼손은 완전히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신다. 나의 욕망을 채우려는 그 어떤 행동이나 생각도 단호히 거부하고, 실수치 않으시는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이 시대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1.9.03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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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3 (금) 삿13:15-25 음성링크    사사시대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시련을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신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과 은혜로 개입하시고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신다. 그런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나아간다. 주께 감사를 표현하는 자들이 먼저 갖춰야 하는 마땅한 태도가 있다면? 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를 찾아와 아들을 낳을 것이란 축복의 말을 전했지만, 그는 자기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는 존재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영적 상태는 당시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무감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식탁의 교제를 고집하는 마노아에게 감사의 번제를 드릴 대상인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와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만큼 온전해진다. 2 온전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선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필요하다. 마노아는 자신을 찾아온 천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는 생각에 빠져 두려움에 떨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면 온전히 신뢰하기 어렵다. 마치 복과 은혜를 받아도 불안해하는 것과 같다. 마노아의 아내는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남편을 격려하며 평안으로 이끌어 주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기쁨의 예배는 먼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이 말씀에 뿌리를 박고 믿음이 더욱 굳건해져 삶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넘치길 소망한다. 주님, 주를 아는 것과 주를 신뢰함이 더욱 깊어지게 하셔서 나의 예배가 온전해지며 주를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1.9.02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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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2 (목) 삿13:1-14 음성링크    점점 심해지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암울한 시대 상황은 사사조차 소망을 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는 하나님은 일하신다. 1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면 반드시 고난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했지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세상과 맞서 싸우는 영적 전쟁 가운데 살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이스라엘이 간구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 소망 없는 이스라엘처럼, 소망 없던 한 여인을 찾아 오시고, 아들을 약속해 주셨다. 민수기에 나오는 나실인 규정대로 태어날 아이를 평생 나실인으로 구별하게 하셨다. 그 나실인을 통해 구원 역사를 시작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된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거룩한 삶은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이다. 나실인의 능력이 거룩에 있었듯이, 성도의 능력 또한 거룩함에 있다. 2 수태고지를 아내를 통해 들은 마노아는 아이에 대한 말씀을 직접 듣고 싶었다. 태어날 아이를 잘 양육하기 위함이었다. 태어날 아기에 관한 소식은 그에게 너무도 기쁜 소식이었기에 이처럼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의 소식에 우리도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모함과 간절함으로 말씀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은 기쁘게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태어날 아이에게 구별된 삶의 중요성을 다시 듣는다. 이 시대의 나실인으로 우리 역시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나님은 명하셨다. 주님, 기도조차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며, 주의 열심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돌아보며 찾으며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1.9.0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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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1 (수) 삿12:1-15 음성링크    암몬과의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내부분열로 인해 심각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입다를 비난하며 위협한 것이 내전으로 확산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1 에브라임 지파가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승전 후 어떤 혜택에서 배제되었는지 모릅니다. 이에 입다를 비난하면서 협박하게 됩니다. 입다는 크게 분노하며 요청에 거부한 그들을 질책하게 됩니다. 여기서 분노를 다스려야 했지만, 오히려 정당화하며 그 감정에 매몰된 결과 돌이키기 힘든 죄를 짖게 된 것이다. 입다는 사사로서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가 해결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내면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이해하시고 공감해 주신다. 마음에 분노가 끓어오를 때는 만사를 제쳐두고 하나님부터 찾자. 2 에브라임 지파와의 갈등에서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모았다. 작은 갈등이 큰 싸움으로 번져, 에브라임 사람 4만2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입다가 에브라임 지파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었다. 동족을 향해 철저히 복수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다는 뜻이 된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던 것을 잊은 것이다. 동족과 싸우는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심을 몰랐던 것이다. 때로 공동체 안에서도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입다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용서와 은혜를 기억해야만 한다. 공동체로 묶어 주신 지체들과 온전한 연합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주님, 날마다 주의 십자가로 나아가 지금껏 받은 은혜를 헤아리고 모든 상황에서 용서를 선택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2021.8.31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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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31 (화) 삿11:29-40 음성링크    입다는 뛰어난 협상 능력까지 지녔던 유능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유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꼭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적합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패배한 자였다. 1 모압이 숭배하던 그모스는 암몬의 몰렉과 본질적으로 같은 우상으로,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시는 인신 제사를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입다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전쟁을 수행하며(29) 승리의 대가로 무엇이든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것(사람)을 바치겠다고 서원한다(30-31). 사실 서원이라기보다 지금껏 입다가 해 왔던 ‘협상’이다. 전쟁의 승리를 놓고 하나님과 협상을 하려 한 것이다. 여호와의 영을 받아 전쟁을 하는 자가 원수들이 하던 인신 제사를 제시하는 어이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지만, 입다는 암몬의 우상에게 패하고 말았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 방법이 세상적 가치관을 따른다면 본질적으로 그것은 비극이다. 2 인신 제사는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다 (레18:21; 20:2-5). 잘못 서원했을 때에는 무르는 법도 있었고, 사람을 드릴 때에는 속전을 내도록 되어 있다(레27). 그런데 입다는 외동딸을 두고 돌이키지 못하 것으로 여겼다(34-35). 과연 그 딸을 인신 제사로 바쳤는가 하는 것이 신학적인 논란이 될 수 있으나, 입다의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종교적 열심은 하나님께는 가증한 범죄가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비극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 우리의 온전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바른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2021.8.30 NAZAZiM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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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30 (월) 삿11:12-28 음성링크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에서 나타났듯이, 입다는 큰 용사였고 탁월한 협상가이기도 했다. 다만 그가 가진 대한한 능력이 어떤 열매를 맺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1 암몬이 쳐들어온 길르앗 땅은 갓 지파에게 할당된 요단강 동편의 비옥한 지역이다. 출애굽 때 이 지역의 왕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되었다(민21:21-35; 32:1-42). 이런 역사는 암몬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암몬 왕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자신들의 땅을 돌려달라는 억지 주장을 폈다(11-12).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세히 알고 있던 입다가 설명했다(19-22). 하지만 아쉽게도 압몬 왕을 설득하려던 입다의 시도는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마7:6) 것과 같았다. 암몬은 길르앗이 탐이 나서 침공한 것일 뿐, 역사적 정당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2 입다는 일반적인 논리를 사용해 암몬의 주장을 반박했다(23-24). 모압 왕도 이스라엘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암몬 자손이 무슨 근거로 이스라엘 영토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느냐고 질책했다(25).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호소한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28), 입다의 장황한 말들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내세운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싸움을 잘하는 자를 지도자로 세우자는 길르앗 장로들의 생각이나 뛰어난 언변으로 상대방을 말로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입다의 시도나 모두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없으면 인간의 능력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주님,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쓰임 받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