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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February, 2025

2025.2.28 (금) 요16: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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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28 (금) 요16:25-33 예수님은 더이상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곧 닥칠 시험 앞에 흩어질 것과 당신이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실 것을 확실히 말씀하신다. 1 비유는 아는 사람은 더 잘 알도록, 반면에 모르는 사람은 못 알아듣도록 하는 화법이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때가 이르렀기에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의 특권과 능력을 다시 확인시켜 주신다(26). 성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사랑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 기도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통로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통로요,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을 주고받는 통로가 된다. 2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시자(28, 제자들은 ‘지금에야’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부분적인 이해였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벌써 왔다”(32)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제자들의 약한 모습을 예언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뿔뿔이 흩어진다(마26:56).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라고 하신다. 우리의 믿음은 불완전해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신실하게 도우신다. 3 예수님은 긴 고별 강화를 마무리하시면서, 환난의 때에 담대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다. 바로 ‘주 안에서’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에 성도는 담대히 세상과 맞서며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자. 담대하십시오!! 주님, 연약한 우리에게 주시는 강력한 승리의 메시지를 의지해 담대히 환난을 이겨 나가게 하소서!

2025.2.27 (목) 요16: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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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27 (목) 요16:16-24 임박한 박해로 인한 근심이 오히려 영원한 기쁨이 될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를 통해 고난과 슬픔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쁨으로 바뀔 날을 함께 고대하게 된다. 1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들의 승리로 여겨 기뻐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크게 슬퍼하겠지만, 이내 주님이 부활하시면 제자들의 슬픔이 오히려 영원한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도가 잠시 당하는 어려움이나 박해로 애통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산모가 해산일이 다가올수록 근심하지만 출산 후에는 새 생명으로 인한 기쁨이 커서 이전의 수고와 고통을 완전히 압도한다. 부활 이후의 기쁨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구원의 기쁨이다(22).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에게 영원한 소망이 있다. 이 믿음이 주는 기쁨은 성도가 이 땅에서 잠시 당하는 근심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2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고 주님은 약속하신다(23). 바로 기도를 통한 기쁨이다. 성도에게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하는 기도를 뜻한다. 개인적 필요가 아니라 하늘의 필요에 따라 구하는 기도를 말한다. 이런 기도는 반드시 이뤄질 것이며, 이 땅에서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이다(24). 기도는 진정한 기쁨을 경험하는 통로다. 잠시의 슬픔을 딛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성도의 특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기도로 나아가자. 주님,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며 매 순간 말씀을 의지함으로 영원한 기쁨을 바라보고, 담대히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늘 경험하게 하소서!

2025.2.26 (수) 요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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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26 (수) 요16:1-15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구체적인 박해의 내용과 보혜사 성령님의 핵심 사역을 말씀하신다.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면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대로 성령님은 지금도 성도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1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셨다(1 ,4). 지금도 믿음에서 흔들리도록 사탄은 역사하고 있다. 당시에는 회당에서 출교, 심지어 생명까지 위협 받는 어려움이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위하는 일로 여기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겠지만, 이런 행동은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한 영적 무지 때문이었다(2-3). 영적 무지는 많은 해악이 있다. 박해의 상황에도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믿고,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배우자. 2 약속된 보혜사 성령님은 죄, 의,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 바로 죄다(9). 성부 하나님께 가시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시고(10), 세상 임금인 사탄이 심판을 받았음을 신자의 삶에 확실히 알리실 것이다 (11). 아직 성령님이 오시기 전이었기에 제자들로선 자칫 감당하지 못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신다고 주님은 확신시켜 주셨다. 성령님의 지속적인 인도와 계시를 통해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14:26),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주님, 고난과 핍박이 있어도 두렵지 않음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셨으니, 살아가는 동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잘 따르게 하소서!

2025.2.25 (화) 요15: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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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25 (화) 요15:18-27 예수님은 성도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가르침을 주신다. 세상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나 결국 주께서 보내실 보혜사의 증언을 힘입어 제자들은 그 사명을 능히 감당할 것이다. 1 좁은 의미에서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유대 지도자 그룹을, 넓게는 하나님께 적대적인 사탄의 세력과 조직을 뜻한다(14:30). 예수님은 이런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때 놀라지 말라고 하신다. 세상이 먼저 주님을 미워했기 때문이다(18).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속한 자임을 의미한다(19). 성도는 세상의 체계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2 성도를 향한 미움은 결국 ‘박해’로 이어질 것이다(20).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21). 세상은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다(22).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은 세상의 죄가 의지적 선택이었음을 드러낸다(24).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며, 주님의 말씀과 사역을 듣고 믿고 의지하는 자는 세상의 박해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다. 3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미음과 박해는 메시아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시35:19; 69:4).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에 대한 미움과 박해마저 하나님의 선한 계획 속에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님의 도움을 더욱 소망하게 한다(26).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확증하시고,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셔서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우실 것이다. 성도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이어져 온 복음을 듣고 경험하고, 또 예수님과 연합한 제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당당히 살아가자. 주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주는 담대함으로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5.2.24 (월) 요1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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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24 (월) 요15:9-17 참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성도와 당신의 관계를 설명하신 주님은 이제 성도끼리의 관계를 밝혀 주신다. 1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같이 당신도 제자들을 사랑한다고 하시며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요청하신다. 거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연결된 상태를 말한다. 이 연결은 주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셨듯이 제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유지된다(9-10).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주의 명령을 지키며 순종하려는 의지적 결단을 요구한다. 주를 향한 순종은 기쁨을 준다. 2 12절부터는 성도와 성도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 확장된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서로 사랑해야 할 본보기로 주님을 제시하신다. 주님의 사랑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었다(13).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희생적 사랑은 성도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13:35). 예수님은 이런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는 당신의 친구라고 말씀하신다(14). 성도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한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셔서 친구로 세우신 이유가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라며 1절부터 이어 온 열매 맺는 주제로 마무리하신다(16). 열매는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자연스럽게 맺히는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의미한다. 또한 제자들에게 앞으로 부여될 사명을 포함한다. 가서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선교적 사역을 통해 많은 영적 열매들이 맺힐 것이다. 이로서 참포도나무 비유는 ‘서로 사랑하는’ 말씀으로 끝난다. 궁극적인 순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순종이고, 사랑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사랑이 곧 선교다. 주님, 택함 받은 친구로 주님께 순종함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참제자란 사실을 기억하며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에서 실천하게 하소서!

2025.2.22 (토) 요14: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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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22 (토) 요14:25-31 예수님은 보혜사가 주시는 가르침과 당신이 주시는 평안을 통해 근심과 두려움을 이기고 오히려 승리의 날을 소망할 것을 권면하신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가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는 어떤 것일까? 1 예수님은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환기시켜 주시면서, 보혜사가 누구신지, 또한 어떤 일들을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셨다(25-26). 보혜사는 ‘격려자’, ‘변호인’ 의 의미를 가진다. 옆에서 함께 뛰며 격려하고 가르치고 응원하는 코치처럼, 성령님은 제자들 곁에서 늘 동행하며 자라게 하실 것이다. 성령 강림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또 주님의 가르치신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역시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 2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면서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당시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제국의 힘으로 평화가 유지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주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세상의 것과 다른 평화다. 영원한 승리자 예수님이 주님이시다(16:33). 이 땅에 사는 성도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두려움 없이 환난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3 예수님은 곧 떠나시지만 다시 오시리라는 사실 역시 재차 말씀하신다(28). 십자가가 패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 가셨다가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여정이기에 사실은 승리의 길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질 때 떨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승리를 믿고 기다리라는 말씀이었다(29). 잠시 사탄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여도 진정한 왕은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구원의 계획을 실수 없이 행하고 계시니 승리는 보장된 것이고, 세상은 모두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는가? 우리의 승리는 확정되었다. 우리도 ‘일어나’, 주의 길을 가자. 주님,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주가 주시는 평안 속에서 이미 확정된 승리의 약속을 받았으니...

2025.2.21 (금) 요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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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21 (금) 요14:15-24 근심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걸으라고 격려하신 예수님은 이제 성령님을 보내셔서 제자들 안에 거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1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켜야 하지만(15), 제자들의 자역으로는 이룰 수 없는 차원의 말일 수 있다. 이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보혜사’를 보내셔서 영원토록 성도들의 마음 속에 거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16). 성령의 내주는 실로 놀랍고 영광스런 일이다. 택함을 입은 자들은 성령의 존재를 알고, 그분이 성도들의 심령 속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7). 2 예수님은 제자들을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는 부활의 몸으로 다시 만나시겠다는 것과 재림주로다시 오시겠다는 것을 모두 의미한다(19). 그때까지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연합을 이어 가게 될 것이다. 이 연합은 성령님과 성도의 연합,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이다. 이 약속은 새 계명에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며, 그 사랑의 실천은 이 땅에서도 천국을 보며 누리는 비밀이 된다(21). 3 유다가 왜 자신들에게만 이 비밀을 알려 주시고 세상에는 나타나내지 않으시냐고 묻는다. 예수님은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을 분명히 구별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천국을 누린다(23-24). 여기에 구원의 은혜와 성화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새 계명에 순종하는 자는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과 완벽한 연합을 이뤄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다. 주님, 믿음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의 걸음을 걷는 동안 놀라운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소서!

2025.2.20 (목) 요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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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20 (목) 요14:1-14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간구하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1 육신의 고통보다 더한 것이 마음의 근심이다. 앞을 모르는 인간은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수님은 근심을 이기기 위해서는 ‘대비’나 ‘예상’이 아닌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확정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근심을 이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은 약속하신 거처를 예비하시고 친히 길이 되어 주시기 위함이다(3). 아버지 집에 우리를 위한 영원한 처소가 마련되어 있음을 잊지 말자. 2 예수님은 천국에 이르는 길을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도마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길이 이 땅의 것이라 착각해 주님이 떠나시려는 그 길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반문한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소개하신다(6).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이르는 길 자체시다. 길의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성부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진리를 알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 3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보면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당신을 보이셨다. 제자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면서도 믿지 못한 것은 죄상으로 인해 눈이 어두워진 결과일 것이다(9).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믿지 못한 것이 문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으로 반응할 것을 요청하신다.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셨으니 그 일들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강권하신다(11).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주의 일을 이어 갈 것이란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12-14). 예수님이 육신으로 함께하시지는 않지만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그들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다. 주님, 친히 길이 되셔서 앞서 가시며, 저...

2025.2 19 (수) 요13: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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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19 (수) 요13:31-38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에게 곧 일어날 일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하신다. 먼저 진정한 태도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1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하신 모든 사역과 가르침이 이제 십자가를 통해 ‘밝혀지고’ 모든 자의 눈에 밝히 드러나 ‘입증’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제 홀로 지실 임박한 수난, 곧 십자가를 다시 말씀하신 후에(33) 남겨질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신다(34). 이 명령은 출애굽한 백성에게도 주어졌었다(레19:18). 여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설명이 붙어 새 계명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끝까지 (13:1), 또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이제 예수의 사람은 동일한 태도와 각오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35). 사도요한은 이후 요한일서에서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며 새 계명을 새로운 세대들에게 재차 강조한다(요일3:16). 사랑이 없어 냉랭한 이때에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가 절실하다. 2 예수님의 새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였다(36). 주께서 당신이 지실 십자가의 길이 따로 있다고 다시 말씀하시나 베드로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따라가겠다고 격하게 반응한다.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태도 보다는 주님을 따라 죽겠다는 충동적인 각오의 발언에 충성이 아닌 미숙함을 주님은 보셨을 것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신다(38). 우리도 이런 충동적 결단을 한다. 대단한 일에 순교할 각오는 되어 있을지 몰라도 오늘 드려야 할 작은 일에는 순종하지 않는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 하면서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과 거리가 멀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자. 새 계명에 순종해 서로 사랑하자. 주님, 주님을 따르겠다는 ...

2025.2.18 (화) 요13: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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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8 (화) 요13:21-30 섬김의 진정한 의미와 복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이제 가룟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예고하신다. 주님은 괴로워하시지만 그 배신까지도 이미 하나님의 통치와 권세 아래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신다. 1 예수님은 괴로워하셨다. 이 괴로움은 배반에 대한 배신감이나 무력감이라기 보다는 가룟 유다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잃는 것을 진정으로 아파하신 것이다. 이미 예수님은 그 일이 이뤄질 것을 미리 아셨기에 유다의 배반 자체에 충격을 받지 않으셨다(21). 오히려 주님은 마지막까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22-26). 유다의 배신에 심령이 괴로우셨음에도, 배신자를 고발하기보다 끝까지 배려하셨다. 그러나 유다는 이 모든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의지로 배신의 길로 들어선다. 끝까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아 기회 주실 때 돌아서야 한다. 2 유다가 떡 조각을 받은 후 입에 넣기도 전에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다(27). 이미 요한은 유다가 배반할 것을 세 번이나 알렸다(6:71; 12:4; 13;2). 유다는 사탄과 연합해 그 생각을 실행하지만, 이것 조차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손톱만큼도 손상을 줄 수 없다. 모든 악한 선택과 배신까지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 사탄 마귀의 어떤 간계도 하나님의 통치와 권세를 벗어나 영향을 줄 수 없다. 유다가 주저 없이 나간 때는 밤이었다(28-30). 밤은 대체로 요한복음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3:2; 9:4; 11:10). 가룟 유다는 기어이 영적 어둠으로 나아갔다. 어둠은 절대로 빛을 이길 수 없다. 참빛으로 오신 주님은 어둠마저 다스리시는 분이다. 주님, 어둠까지도 다스리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항상 빛 가운데 행하게 하소서!

2025.2 19 (수) 요13: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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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19 (수) 요13:31-38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에게 곧 일어날 일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하신다. 먼저 진정한 태도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1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하신 모든 사역과 가르침이 이제 십자가를 통해 ‘밝혀지고’ 모든 자의 눈에 밝히 드러나 ‘입증’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제 홀로 지실 임박한 수난, 곧 십자가를 다시 말씀하신 후에(33) 남겨질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신다(34). 이 명령은 출애굽한 백성에게도 주어졌었다(레19:18). 여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설명이 붙어 새 계명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끝까지 (13:1), 또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이제 예수의 사람은 동일한 태도와 각오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35). 사도요한은 이후 요한일서에서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며 새 계명을 새로운 세대들에게 재차 강조한다(요일3:16). 사랑이 없어 냉랭한 이때에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가 절실하다. 2 예수님의 새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였다(36). 주께서 당신이 지실 십자가의 길이 따로 있다고 다시 말씀하시나 베드로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따라가겠다고 격하게 반응한다.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태도 보다는 주님을 따라 죽겠다는 충동적인 각오의 발언에 충성이 아닌 미숙함을 주님은 보셨을 것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신다(38). 우리도 이런 충동적 결단을 한다. 대단한 일에 순교할 각오는 되어 있을지 몰라도 오늘 드려야 할 작은 일에는 순종하지 않는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 하면서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과 거리가 멀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자. 새 계명에 순종해 서로 사랑하자. 주님, 주님을 따르겠다는 ...

2025.2.17 (월) 요1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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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7 (월) 요13:12-20 유월절 만찬 중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겸손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이 그 행위의 목적과 의미를 친히 가르쳐 주신다. 진정한 기쁨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 없이 섬길 때 찾아온다. 1 겸손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은 이제 그 본을 보이신 이유는 선생과 주로서 하심은 ‘이제 너희가 서로 발을 씻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12-14). 여기에 겸손의 비밀이 있다. 자기와 같은 자, 아니면 더 못한 자의 발을 씻겨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발까지 닦아 주신 후에 이 말씀을 하셨다. 겸손은 절대 굴복의 표시가 아니다. 오히려 큰 믿음이 있는 자가 보이는 존중의 표현이다. 누군가의 발을 씻겨 준다고 해서 내가 그의 종이 되는 것 아니고, 누군가에게 섬김을 받았다고 해서 내가 그보다 크다는 증거가 될 수도 없다. 우리의 주인은. . .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이 사실을 알고 믿을 때 우리는 거리낌 없이 겸손히 섬길 수 있고,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16-17). 2 가르침의 말미에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관한 말씀을 더하신다. 주님을 배신할 자가 떡을 먹는 자라는 표현(시41:9)은 배반을 실행에 옮기려는 유다에게는 마지막 경고로, 제자들에게는 믿음을 주기 위한 목적이 있다(19).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에 굳게 서기를 원하신다. 요한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쓰여졌다고 밝혔다(20:31), 일련의 일이 모두 벌어지고 난 이후 제자들이 소명을 깨닫고 땅끝까지 이르러 증언할 상황까지 내다보며 하신 말씀이다. 이 증인들을 겸손히 영접하는 것은 그 증인을 보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수용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궁극적으로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1:12-14). 예수님.,.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로 오신 예수님을 믿기에 서로를 더 낫게 여기고 돌아보는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소서!

2025.2. 15 (토) 요12: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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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15 (토) 요12:37-50 이제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은 끝났다. 요한은 예수님이 수많은 사역을 행하셨지만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고 떠났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설명해 준다. 1 사람들은 예수님의 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고 요한은 기록한다(37). 불신앙의 두 가지 모습에서 첫째가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무지’다 (38, 4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권능을 행하셨지만(38; 사53:1), 유대인들은 눈이 멀고 마음이 완고해 깨닫지 못한 것이다(39-40; 사6:10). 둘째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지도층 유대인들이 (42a) 바리새인들에 의해 출교당할까 두려워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내지 못했다(42b). 사람의 인정과 영광을 더 중하게 여기면 예수님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불신앙과 다르지 않다(43). 우리는 혹시 이런 선입견에 사로잡혀 눈멀고 완고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자.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는 성도로 산다. 2 이런 유대인들의 현실에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며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을 보게 하는 참빛이라고 강조한다(44-46).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는 결국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47-48).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신 분이다(49-50).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고,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이 나의 왕이요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있는가? 주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분을 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주인으로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 주님, 예수님을 더 굳게 믿고, 예수님을 더 열심히 닮고, 예수님과 사귐이 더 깊어지게 하소서!

2025.2.14. (금) 요12: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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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4. (금) 요12:20-36 사람들은 대중에게서 큰 인기를 얻는 것을 ‘영광’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일만 계속해 오셨다. 주님이 추구하신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 예수님의 명성이 그리스 사람들까지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올 정도였다(20-21). 이방에까지 복음이 전해질 것을 암시한다. 이에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의 영광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길을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이다. 그 길을 걸어야 생명을 영원토록 보전할 수 있다(25-26). 주님은 이를 위해 세상에 오셨다(27; 막14:36). 2 예수님이 기도하시자,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둥과도 같은 소리로 응답하시며 예수님에 의해 당신이 이미 영광스럽게 되셨고 영광스럽게 되실 것을 선언하신다. 시내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셨던 것과도 같은 사건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세상의 왕을 쫓아내시며,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겠다고 선언하신다(31-32). 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루실 승리이며, 세상 왕에 대한 심판이다. 3 군중들은 강력한 군사력이 가진 왕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풍요를 ‘인자 같은 이’에게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자가 ‘들린다’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바로 그 인자이심을 깨닫지도 못했다(34). 인자가 누구냐는 군중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아직 잠시 빛이 있으니 그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권하신 후 저들을 떠나 피하셨다. 이는 그들이 이미 수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성도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 또 우리가 예수님께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거이 무엇인지를 되새겨야 한다. 주님,...

2025.2.13 (목) 요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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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3 (목) 요12:12-19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바라보는 무리, 제자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모두 예수님이 왜 그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1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문이 포지자,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찾은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며 ‘이스라엘의 왕’ 예수님을 맞이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강력하고 풍요로운 나라로 만드는 왕이 되기를 바랬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나귀 위에 올라타신다. 이는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으로(15; 슥9:9), 당신이 세상적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님을 드러내신다.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2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 즉 부활하신 후에야 이 행동의 의미를 깨달았다(16).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이한 이유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을 목격했던 증인들이 무리 중에 있었고(17), 그 말을 들은 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자기들이 바라는 바를 이뤄 줄 사람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지금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하면서 정작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성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깊이 깨달아야 한다. 3 그 자리에는 부지중에 진리를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은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이 역설적으로 말해 버렸다(19). 물론 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이는 상황에 대한 한탄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입을 통해 진리가 흘러나오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주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2:24).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오히려 주님이 베푸신 은혜임을 깨달아야 한다. ...

2025.2.12 (수) 요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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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2 (수) 요12:1-11 시간과 재물은 우리의 믿음을 가늠해 보는 시금석이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시간과 재물을 사용한다. 본문에서 마리아와 가룟유다는 재물에 대한 상반된 마음을 보여준다. 이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재물에 대한 교훈은 무엇일까? 1 유월절을 6일 앞두고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다. 주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마리아가 나드로 만든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들였다. 그 향유는 노동자의 1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이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다들 마리아의 이런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허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에게 마리아가 당신의 장례를 위해 헌신했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들도 간파하지 못했던 주님의 죽음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이었는지 알 수 있다. 재물을 사용하는 곳에 우리 마음이 머문다(마6:21).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주님을 향한 ‘순전한’ 감사와 사랑이 담겨있어야 한다. 2 마리아의 행동을 두고 가룟 유다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낭비했다고 비난했다. 차라리 가난한 자들을 돕는 데 쓰는 것이 맞다고 책망했다. 그러나 사실 가룟 유다는 탐욕의 사람이다. 탐욕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향유를 바른 것을 전혀 인식할 수 없었다. 또 재물을 훔치는 자였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훼방하는 심각한 요소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 얻는 비결을 물었을 때 그의 마음 속에 있던 욕심을 버릴 수 없어 그는 근심하며 떠나갔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해선 안 된다. 돈에 대한 우리의 욕심을 하나님은 다 보신다. 욕심을 비울 때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주를 향한 사랑으로 그 빈 곳을 채우자. 주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주신 재물로 하나님을 진정 영화롭게 하는 저희가 되게...

2025.2.11 (화) 요11: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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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1 (화) 요11:45-57 공관복음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결정적 계기로 성전 청결 사건을 들고 들지만,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부활을 제시한다. 이미 저들의 의도를 아신 주님은 이제 자신이 직접 부활과 영생의 증거가 되실 준비를 시작하신다. 1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러 왔던 유대인들 중에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이 많았다. 그런 기적 앞에 믿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이 기적 소식으로 인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했다.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부인할 수 없는데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봐 예수님을 대적한다(47-48). 하나님이 아닌 로마가 두려웠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기 기득권이 더 소중했다.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없음을 증거한다. 2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사림이 백성을 위해 죽으면 온 민족이 망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 오히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예고하는 말이 되었다(50). 예수님은 대제사장에 의해 선택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다(51-52).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죽일 것을 선포하고, 공회원들은 구체적 방법을 모의한다.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로 결의함으로, ‘유대인’은 혈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원수의 편에 서게 된다. 진리보다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자들은 유대인들을 저주 가운데 빠뜨렸다. 3 산헤드린의 결의를 아시는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까지 에브라임에 머무신다. 이제 유월절이 있는 니산월까지 약 3개월 정도 피해 계신 것이다. 이 기간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지고, 예수님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에(57), 유월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실 지가 큰 관심사가 되었다. 주님, 권세 있는 자들이 세상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믿을 때, 눈에 보이는 현상에 흔들리지 않고 주의 제자의 길을 담대히 걸어가게...

2025.2.10 (월) 요11: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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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0 (월) 요11:36-44 사람들이 대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나 부활과 영생을 믿는 성도에게는 죽음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단순히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신념이 아니다.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예수님이 주셨다. 1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죄로 인한 오게 된 죽음이 위력 앞에 무력한 인간들과, 또 깊이 사랑하셨던 나사로를 향한 마음 때문에 우셨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면서 죽음 같은 재앙을 겪도록 내버려두느냐’고 절규한다. 예수님은 일일이 대응치 않으시고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으로 가신다(38). 부활과 영생을 전하며 주를 의지해 살 때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경험한다. 하지만 주님의 모범대로 꿋꿋이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놀랍게도 무덤 입구의 돌을 옮기라 하신다. 이미 부패하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기이한 명령인가.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되물으신다(40). 믿음 안에서 죽은 자에게는 하나님께 영광스런 제물로 드려지는 영광의 향기가 난다. 바울 역시 죽음과도 같은 고난을 마게도냐에서 겪었지만,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생명으로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나타내셨다고 고백했다(고후2:14, 16). 이처럼 믿음은 놀라운 영광으로 이어지게 한다. 3 믿는 자들은 이미 죽어 그 살이 썩어도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 서로 만날 것이다. 이 사실을 무리에게 증명하시듯 큰 소리로 기도하셨다(41-42).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성부께서 성자의 기도를 들으셨고, 항상 들으심에 감사를 표현하셨다. 성도의 부활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나사로야 나오라!’란 부르심에 죽은 나사로가 염을 한 상태로 나왔다 (43-44a). 나사로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죽음 이후에 하나님을 직접 뵙는 영광을 누리며, 마지막 날에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을 증명해 주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은혜요...

2025.2.8 (토) 요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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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8 (토) 요11:1-16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하나님의 응답이 더딘 상황에서 우리가 갖춰야 할 태도를 가르쳐 준다. 나의 때가 아닌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1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어 가는 위급한 상황을 예수님께 알렸다. 속히 오셔서 병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평소에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셨기에 두 자매는 주님이 당연히 한걸음에 달려오실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임박한 상황을 아시면서도 주님은 이틀이나 그대로 머무셨다. 한편 두 자매는 나사로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고의적으로 지체하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동안 쌓아 올린 신뢰가 무너지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응답을 기대하고 기도한 시간들을 허비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응답의 때라고 믿는 시간이 하나님의 때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다. 주님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신다. 2 이틀이 지나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자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험악한 상황을 기억한 것이다. 예루살렘과 베다니는 불과 2마일 정도나 가까운 위치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통한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셔야 했다. 제자들의 만류와 유대인의 위협에도 불고하고 주님은 당신의 사역을 위해 움직이셨다. 이처럼 때가 되면 반드시 기도가 응답된다는 사실을 우린 믿어야 한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지체 없이 이뤄 주신다(사60:22). 우리가 구하고 기대한 것보다 더 넘치도록 응답하신다(엡3:20).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지 않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더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셨다. 더 놀라운 역사를 갈망하며 주를 신뢰하고, 주께 간구하기를 멈추지 말자. 주님, 당장 눈앞의 상황이나 문제가 변하지 않더라도 낙심하거나 원망하...

2025.2.7 (금) 요10: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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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7 (금) 요10:32-42 예수님을 향한 적대감은 영적 교만과 탐욕에서 나온다. 유대 종교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은 예수님께 돌을 집어 들어 던지려 했다. 이 같은 적개심의 원인이 뭘까? 1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누구보다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예수님의 표적들을 보았음에도,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이라 판단했다(32-33). 이에 예수님은 시편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당신의 말씀이 이미 성경에 예언되었기에 신성모독이 될 수 없음을 밝히신다(34; 시82:6).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게 되셨고, 세상에 보냄 받으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한 것이다(36).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고 있다. 2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일들은 당신의 말씀이 참임을 증거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를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경과 눈앞에 있는 명백한 표적을 보고서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다(30).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어리석고 교만한 자들의 태도를 따라서는 안 된다. 3 예수님께서 처음 세례 요한이 사역하던 곳으로 돌아가셔서 그곳에 거하신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 내용들이 모두 참이라 인정하며 예수님을 믿었다 (41-42). 예수님은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이시며, 제자들이 고백했던 대로 ‘메시아’(1:41),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선지자’(1:45),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1:49)이시다. 주님, 절망 가운데 있던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다시금 확인하고, 오늘도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5.2.6 (목) 요10: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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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6 (목) 요10:22-31 요한은 수전절(하누카)을 배경으로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온 민족들을 이끄실 구세주이심을 강조한다. 1 수전절은 키슬레브월 25일(대개 11월 말)부터 8일간 지키는 절기다(22). 9개의 촛대(메노라)에 매일 하나씩 불을 밝혀가며 ‘빛의 절기’이자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항해 유대인들이 성전을 회복하고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하스몬 왕조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또한 수전절은 마카베오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길 고대하는 절기가 되었다. 이때 예수님이 솔로몬 행각에 오셨는데, 이는 솔로몬과 같이 성전의 회복을 주도하실 분임을 암시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메시아이면 밝히 말하라’고 요구한다(24).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임을 자각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다. 2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어떤 존재이신지 말씀하셨음에도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 여러 표적을 통해 증거까지 제시하셨다(25).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양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누구에게도 양을 빼앗기지 않으신다고 선언하신다(28). 또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심을 선포하시며 당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곧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임을 확인해 주신다(30). 이 말씀에 자극을 받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다. 자신의 선입견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고 영적 암흑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태도다. 주님, 나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철저히 경계하고, 오직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으며 겸손히 주님을 더 힘써 섬기게 하소서!

2025.2.5 (수) 요1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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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5 (수) 요10:11-21 양들이 언제나 생존의 위협 속에 있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시력도 약하고 모든 면에서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양들이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것이다.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1 양을 해치는 자들을 절도와 강도라고 말씀하신(1) 주님은, 양들을 위해 맹수와 맞서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달아나는 자들을 목자가 아닌 삯꾼이라 규정하신다(12,13).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분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단순한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시다(11, 15). 선한 목자는 양들과 인격적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신다(14-15). 2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 즉 이방인도 한 목자 예수님을 따를 것을 말씀하신다(16).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리셨고, 이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시고 다시 목숨을 얻을 권세까지 부여 받으셨다(17-18). 우리도 참목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성도들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3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19).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려 미쳤다고 하고(20), 일부는 ‘귀신 들린 사람이 어찌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냐’고 말했다(21). 말씀은 삯꾼에 불과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적인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라야 함을 가르친다. 주님은 양을 위해 당신의 권리와 자유도 포기하셨다.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 것을 포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선한 목자를 잘 따라가며, 한무리로 만드신 교회 공동체 일원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디 깊은 인격적 사귐이 있게 하소서!

2025.2.4 (화) 요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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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4 (화) 요10:1-10 바른 신앙은 참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양이다 1 밤에는 목자들이 양 떼를 우리에 가두어 두었다가 아침이 되면 이끌어 내어 초장으로 인도한다. 그런데 참목자는 문을 통해 그 우리에 들어간다. 그러나 참목자가 아닌 절도, 강도는 우리의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는다. 양들을 대하는 태도로 참목자와 도둑은 구별된다. 참목자는 각각 양들의 이름을 안다. 예수님은 우리 개개인을 아시고 부르시는 참된 목자시다. 진자 목자를 따를 때 우리 신앙이 건강하게 성장한다. 2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간다. 그러나 목자가 아닌 자가 들어가면 양들은 오히려 도망간다. 참목자는 양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는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거짓 목자이기 때문에 백성이 너희를 따르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셨지만, 거짓 목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6). 3 예수님은 바로 양의 문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양에게 가는 가들만 참목자요,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모두 절도요 강도다(7).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 자’ 즉 종교 지도자들과 그전에 일어났던 수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절도요 강도였기에 양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구원의 길이요, 예수님을 통해서만 진정한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 양들을 해하는 자가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선한 목자가 하는 일이다. 주님, 세상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만 귀 기울이며 순종하는 예수님의 양으로 열심히 살아가게 하소서!

2025.2.3 (월) 요9: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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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3 (월) 요9:35-41 신앙은 사실(fact)와 사실(history)에 근거한다. 우리는 역사적 실재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일,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 위에 서 있다. 1 유대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출교 조치를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셨다(35). 이 사람의 부모는 자신들도 출교 당할까 봐 두려워 아들에게 책임을 미룬 채 회색지대에 머무르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빛을 본 이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시는데, 이 사람은 그가 누군지 알려 주면 믿겠다고 한다. 이때 예수님께서 당신이 인자이심을 알려 주시자, 그는 즉시 절하며 믿음을 고백했다(37-38).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이적과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참신앙은 명백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시작한다. 2종교 지도자들은 육체의 눈을 갖고 있으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을 인정하는 자를 출교하기까지 했으니 진정 맹인들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용서가 별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빛을 본 사람이다. 주님만이 당신이 어떻게 죽으실 것과, 어떻게 살아날 것까지 알고 계셨다. 게다가 살아 계신 주님을 수백명이 목격했다. 이 명백한 사실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결국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다. 주님, 참된 진리에 눈을 떠 예수님을 알아본 맹인처럼 진리에 관해 더 놀라운 지식과 은혜를 보여 주실 때마다 마음을 열고 진리 되신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2025.2.1. (토) 요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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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 (토) 요9:1-12 요한은 예수님이 빛 곧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가르치기 위해 선천성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를 시작한다. 1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보고 이는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났으니 부모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포함된 질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집착하는 ‘태어남’ 곧 혈통의 문제를 그대로 반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생각의 틀을 넘는 대답을 하신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신다(3). 약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2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두운가를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두워진 세상에 빛을 던지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함을 말씀하신다(4-5).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는 모습은 세상을 지으시고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발라 실로암 못으로 보내셨고, 그는 말씀대로 밝은 눈으로 돌아온다. 영안이 밝아야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다. 3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웃에게 자신이 그 맹인 맞다고 그는 확인해 준다.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권능의 증인으로 쓰임 받았다(10-11). 원래 암흑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님에 의해 빛을 본 사람으로서 이제 예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그대로 전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던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직 예수님을 만나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증언하도록 보냄을 받았다면 얼마든지 예수님의 권세와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주님, 나의 모든 어려움도 주님께 다 맡겨 오히려 그것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