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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November, 2024

2024.11.27 (수) 요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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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7 (수) 요4:5-11 예수님께서 예언(마24:1-2)하셨듯이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성전이 없는 시대를 요한은 경험했다. 그런 요한이 자기가 본 환상을 통해 하늘의 성전에서는 여전히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음을 증언한다. 이를 통해 이 땅의 교회가 하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드러내야 할 귀중한 책임이 있음을 확인한다. 1 보좌로부터 나오는 번개와 음성과 천둥소리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실 때를 연상시킨다. 성막이나 성전의 성소에는 7등잔대가 있었고, 하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7영이 하늘 성전을 비추었다(5; 출19:16-19; 25:31-40). 하늘 성전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었다(6a; 왕상7:23-26). 보좌 주위의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의 모습을 가진 네 생물은 에스겔이 목격했던 네 생물과 바퀴를 반영하고(6-7; 겔1:5-25), 6날개를 가진 생물들이 찬송하는 장면은 이사야가 본 스랍들의 모습을 반영한다(8; 사6:2). 2 네 생물과 24장로의 찬송은 계시록 제1막(1:9~4:11)을 마감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보좌에 앉으신 이’를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로 오해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 이사야 선지가가 목격했던 스랍들의 찬송을 계속 부르며, 하나님의 전능하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한다(8; 사6:3). 또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며 자신의 면류관을 바친다(9-10). 이는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자신들은 금관을 쓸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는 의미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시다(11). 지금도 하나님은 천사들의 찬송 가운데 계시며, 이사야, 요한에게 하신 것처럼 당신의 일꾼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신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기억하여 항상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성도로 살아가자. 주님, 하늘 성전에서 찬송 가운데 계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확신하며 최선을...

2024.11.26 (화) 요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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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6 (화) 요4:1-4 요한은 자기가 본 환상을 통해 하늘에서 완전한 성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1 ‘이 일 후에’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이후의 사건에 대해 요한이 말한다. 요한은 환상 가운데 열린 문이 있는 것을 보았고, 처음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이 그에게 올라오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이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요한에게 보여 주겠다고 하자, 요한은 곧 성령에 감동되었다(1-2). 그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얻을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혜의 영인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으로 받으며 살아갈 성도다.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살아갈 때,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고, 세상 것에 연연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2 하늘 성전의 지성소로 직행해 보좌와 그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을 직접 뵙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하길, ‘청옥을 편 듯하다’는 출애급기의 기록과 에스겔의 ‘무지개와 같은 광채’와 연결된다 (3; 출24:10; 겔1:28). 또 벽옥, 홍옥, 에메랄드 등으로 묘사한 것은 이후 새 예루살렘을 묘사할 때도 나타나는 보석들로, 하나님의 영광이 새 예루살렘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21:11, 19-20). 성령의 이끌림으로 하늘 보좌로 직행해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 역시 이런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적 특권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잊지 말자. 3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 24보좌가 있는데, 이는 다윗이 제사장을 24반열로 나눈 것을 떠올리게 한다(대상24:6-19). 5:9에서 24 장로들이 어린양이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것’을 찬양학, 5:10에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라고 칭한 것을 볼 때 24장로들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계시록 전체에서 24란 숫자가 12족장과 12 사도를 가리...

2024.11.25 (월) 계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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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5 (월) 계3:14-22 일곱 교회 중 마지막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데 교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칭찬을 받지 못한 교회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성령의 능력보다는 세상의 능력을 의지하는 바람에 예수님으로부터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1 예수님은 당신을 ‘아멘’ 즉 진실하신 분으로, 충성되고 참되신 증인, 또 창조의 근분으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으로 소개하신다 (14).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닌 미지근한 것같이 정체성이 불분명했다. 온천수가 나오는 히에라폴리스와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골로새 사이에 위치한 도시였다. 수질이 좋지 않아 북동쪽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를 끌어다 썼는데, 도중에 온천수가 식어 라오디게아에 이르면 미지근한 물이 되었다. 예수님은 그 물을 빗대어 이 교회의 상태를 지적하신 것이다. 영적 정체성을 잊고 세상과 타협하여 미지근한 상태는 주님께 책망 받을 수밖에 없다. 2 미지근한 교회란 정체성이 모호하여 세상과 구분되지 않는 교회를 가리킨다. 라오디게아는 AD60년에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도시를 재건할 때 황제의 재정 지원을 거부할 정도로 부유했다. 교회 역시 부유한 자들의 공동체였다(17). 그러나 세상의 부유함을 자랑하는 것은 곧 그들이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증거일 뿐이다(17-18). 또 라오디게아의 유명한 상품은 검은 양털로 만든 옷감이었다. 주님은 이를 빗대어 ‘죄의 검은 옷을 벗어 버리고 흰옷을 사서 수치를 가리라’고 하셨다. 또한 안약으로 유명한 도시로 육신의 눈을 치료하는 안약은 만들었지만 영의 눈을 멀었다고 질책하신다. 교회는 세상에 속한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여야 한다. 3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열심과 회개를 촉구하신다(19).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린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20), 교회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을 뜻하기도 하다. 누구든 예수님...

2024.11.23 (토) 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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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3 (토) 계3:1-6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 당시부터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그대로 살지는 않는 자칭 신앙인과 교회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명실상부 믿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묵상해 보자. 1 앞선 네 교회처럼 먼저 칭찬이 주어진 후 책망이 주어진 것과 달리, 사데 교회에 대해서 주님은 이름만 살았을 뿐 죽은 자라는 심각한 책망부터 하신다. 그 근거는 바로 ‘행위’다. 주님은 사데 교회의 행위를 아셨고, 그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셨던 것이다(1-2; 약2:17). 그래도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2a). 사데 교회는 말로만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의 실천이 없었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그저 단순한 동의일 뿐 믿음이 아님을 다시 깨닫는다. 2 처음 복음을 들었던 그때로 속히 돌아가 회개하고 믿음의 행실을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예수님이 도둑같이 이르러서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3). 과거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데는 세 면이 절벽으로 된 천연 요새로 난공불락이라고 자만했다. BC546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밤에 절벽 길을 통해 사데를 함락시켰다. 또한 AD17년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다. 심판은 이처럼 갑자기 임한다. 우리는 언제 주님 앞에 설지 알 수 없기에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3 사데는 직물 산업이 번성했던 곳이다. 주님은 그들이 흰옷, 곧 오염되지 않은 옷을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생명책에서 ‘살아 있는’ 그들의 이름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4-5).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선 바른 행실을 가져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어떠하든 나는 주님을 섬기리라’는 각오로 우린 살아야 한다. 사데 교회 안에도 행실이 바른 사람이 있음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믿음의 남은 자로 살아가자! 주님,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만 하는 껍데기...

2024.11.22 (금) 계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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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2 (금) 계2:18-29 오늘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교적 영성의 해악이었다. 1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심령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고 빛난 주석 같은 발로 거짓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두아디라 교회에게 나타나신다 (18; 1:14-15). 계속 성장하고 있었지만,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있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이스라엘에 들여왔던 이세벨처럼 어떤 사람이 이교적인 어떤 종교 의식을 교회에 도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은 그녀에게 경고가 주어졌다. 아무리 마음에 깊은 확신으로 자리잡은 신념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며, 언제나 말씀의 진리 위에 신앙을 세워야 한다. 2 사람들이 우상숭배나 주술 등에 빠지는 이유는 지극히 헛된 소망 때문이다. 주님은 그 ‘이세벨’을 ‘병상’에 던지시겠다고 하신다. 즉 큰 병을 앓게 하겠고, 그녀를 따르는 자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며, 그 자녀를 죽이시리라고 경고하신다(21-22). 즉 그런 행위들이 무가치함을 보여 주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미신적인 것들을 ‘사탄의 깊은 것들’이라고 칭하시고, 오히려 이미 알고 소유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세속적인 복이나 미신적인 어떤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이다. 예수님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하신다(26-27; 시2:9). 메시아의 통치에 참여하는 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 끝까지 믿음을 나아가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자! 주님, 헛된 것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고, 복음의 진리를 확고히 붙들며, 주님 한 분만으로 얼마든지 충분함을 더 알아가게 하소서!

2024.11.21 (목) 계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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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1 (목) 계2:12-17 버가모 교회에 대한 말씀에는 한 교회 안에 순교를 불사하는 참된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거리낌 없이 우상 숭배에 동참하는 자들이 공존하는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1 예수님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 즉 죄악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취하시는 분으로 버가모 교회에 대하신다(12). 버가모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이 세워져 황제 숭배의 본거지일 뿐 아니라, 제우스, 아르테미스 등의 신전들도 많이 있었다. 실로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충성된 증인 안디바는 우상숭배에 굴하지 않아 순교를 당했다(13).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 부르신다. 버가모 교회는 이런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오히려 믿음을 계속 지키고 결속한 것은 칭찬받을 만했다. 2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는 거리낌 없이 우상 숭배하는 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발람의 교훈을 따라가는 자들로 여기신다. 과거 이스라엘이 발람의 교훈을 따라 우상 숭배하고 음행하다가 2만 4천 명이 죽임 당했다(14; 민25:9; 31:16). 니골라당이 발람의 교훈을 따른 것을 볼 때, 우상 숭배를 해도 정신만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던 영지주의 이단일 수도 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것과 동일한 사고방식이다. 안디바와 같은 순교자가 있는가 하면 니골라당과 같은 이단들도 함께 있었다. 세속의 유익과 편리를 철저히 경계하고 참신앙에 집중해야 한다. 3 예수님은 우상 숭배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의 입의 검, 곧 말씀의 권능으로 그들과 직접 싸우겠다고 선언하신다(16).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와 감춰진 이름이 적힌 흰 돌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만나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었던 생명의 신령한 양식이며(출16:14-18), 흰 돌은 로마 시대 재판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음을 표시하는 증표로, ...

2024.11.20 (수) 계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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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수) 계2:1-11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살펴보면, 현대 교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에베소, 서머나 교회에게 주어진 말씀은 이 땅에서 교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 1 예수님은 교회의 주권자이시며 교회 가운데 계신 분이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영적 전투를 잘 감당해 왔음을 인정해 주신다. 에베소는 소아시아를 관할하는 로마 총독부가 있는 큰 항구도시로 행정, 교통, 무역의 중심지였고, 황제를 섬기는 6개의 신전과 함께 아르테미스를 비롯한 많은 이방 신전이 있던 곳이었다. 이른 곳에서 신앙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지만, 에베소 교회는 부지런히 수고하고 인내하며 특별히 거짓 선생들을 용납하지 않았다(2-3). 바른 교리와 거룩한 행실을 지키게 하는 것이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바다. 2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지키지 못했다. 안밖으로 열심히 싸우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원래 지점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며, 그러지 못하면 교회의 촛대를 옮긴다고 하신다 (5). 교회가 사랑을 잃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내부의 사랑을 지키며 실천한다면, 그 교회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과 같은 이상적인 교회일 것이다. 이런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꿈꾸며 성장해 가자. 3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3:7-13)와 함께 책망이 없는 교회다. BC600년에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약 300 년 후에 재건된 도시여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연상시키는 곳이다(8b). 예수님께서 ‘처음과 마지막’이란 말씀은 구약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란 뜻이기도 하다(8; 사41:4; 44:6; 48:12).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이라고 일갈하시며(9), 두려워하지 말라고 독려하신...

2024.11.19 (화) 계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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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9 (화) 계1:9-20 계시록은 5개의 찬양 본문(4:8-11; 7:10-12; 11:15-18; 15:3-4; 19:1-8; 22:8-9)이 구분점의 역할을 하여 총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예외: 5:9-14). 제1막 (1:9-4:11)은 요한이 인자와 같은 이, 곧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당했다. 고난 가운데 있었던 요한은 어느 주일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는다. 이후에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명령이었다 (10-11). 비록 교회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은 교회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2 뒤를 돌아본 요한은 일곱 금 등대를 본다. 그런데 그 등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예수님이 계신다(13). 교회 가운데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보여 준다. 여기서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현들을 반영한다(13-16; 사49:2; 겔43:2; 단7:9; 10:5-6). 지금도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인 교회 가운데 계시며, 여전히 우리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 3 요한이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이다(17). 예수님은 그에게 오른손을 얹으심으로써 능력을 부여하시고 사명을 주셨다.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히 살아 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 즉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에 우리의 모든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18). 예수님의 오른손, 능력의 손안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 나아가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별과 일곱 등대가 있다(19-20). 우리의 삶과 죽음은 예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우리는 사명을 받은 자답게,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주님, 밧모섬에 있었던 요한처럼, 비록...

2024.11.18 (월) 계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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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8 (월) 계1:1-8 수많은 거짓 가르침과 이단이 요한계시록을 마음대로 해석하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 요한계시록을 가까이하며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는 인류의 기원을 모르고, 사후 세계를 두려워하는 유한한 인간일 뿐이다. 이런 한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본문은 예수님이 처음이요 나중 되신다고 밝힌다. 1 요한계시록의 표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이는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셨고, 다시 예수님이 보내신 천사가 요한에게 전달했다(1). 요한은 자기가 본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거를 예수님의 종들에게 증언하기 위해 계시록을 기록했다(2). 요한은 ‘때가 가깝다’ ‘속히 일어날 일’이라 표현하면서 임박성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나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진 말씀이다. 2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로 보낸 서신이기에 당시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 먼저 말씀을 볼 필요가 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 땅의 임금들의 머리라고 말하며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단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어 그분을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한다. 3 요한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얼마나 큰 영광을 가졌는지 밝힌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죄에서 해방시켜 제사장 나라, 곧 교회로 세우셨다(5-6; 출19:5-6). 비록 그리스도인들의 분포가 작고 교회도 약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예수님이 구름,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그때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그 앞에서 애곡하고 교회가 가진 영광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7). 이 모든 일은 세상을 주관하시고 처음과 끝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날 것이다(8). 주님, 악하고 ...

2024.11.16 (토) 시7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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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6 (토) 시72:1-11 시편 제2권의 마지막 시편인 72편은 ‘제왕시’로 알려져 있다. 왕의 대관식 축제에 쓰였던 것으로, 왕이 견지해야 할 철학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1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신하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시인은 새롭게 세워지는 왕, 곧 왕의 아들에게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왕은 자기 백성을 다스릴 때 사회적, 경제적인 ‘공의’를 따라야 하고, 사법적인 정의를 세워야 한다. 왕이 공의와 정의로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땅에 평화와 공의가 세워진다. 억울함이 없어야 하고, 궁핍한 자들이 압박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시는 원리이며,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 때 원칙으로 삼아야 할 가치다. 2 공의를 지키는 왕이 통치하면 백성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5). 성경의 공의는 벌하는 것보다 생명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시인은 온 세상에 비와 같이 정의가 임하면 그 ‘날’ 즉 해가 있는 동안에는 의인들이 흥왕하고, ‘달이 다할 때까지’ 즉 밤에도 평강이 풍성하리라고 노래한다(7). 그리스도의 통치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도록 부름 받은 성도는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남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정의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이루는 정의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3 시인은 왕의 통치가 이스라엘을 넘어 온 땅에 미치게 될 것을 노래한다(8). 이스라엘 왕 앞에 모두 굴복하며, 먼 곳까지 그 통치권이 미칠 것이며, 세상 모든 왕이 그 앞에 엎드리고,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 왕을 섬길 것이다(11). 사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보면 이 시는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를 성취하셨다. 또한 주를 믿는 자들에 의해 그분의 통치가 지금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권세를 선포하고, 생명을 구원하며, 공의를 세우는 사명을 성도가 감당할 때, 예수님의 왕권은 더욱 빛날 것이다. 주...

2024.11.15 (금) 시71: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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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5 (금) 시71:14-24 평생토록 여호와를 의지해 온 노년의 시인은 71편 후반부에서 더 깊은 감사와 찬양을 주께 올려 드린다. 하나님이 자시의 찬양과 기도에 응답하셔서 자신을 보호하시며 끝까지 위로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1 본 시를 시작할 때 ‘주는 내 소망’(5)이라고 외쳤던 시인은 이제 ‘내게는 항상 소망이 있으니 내가 더욱 더 주를 찬양하겠습니다”(14)라고 결단한다. 오랜 소망이 이제 곧 이뤄지리라는 확신을 점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주의 공의와 구원을 종일 전하겠다는 것과(15), 주의 능하신 행적과 공의를 전하겠다는 것과(16), 평생 교훈하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한다(17). 시인은 백발이 되어도 주의 놀라운 기사들과 능력을 후대에 전할 것을 열망하며 간구한다(18). 이처럼 하나님을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2 시인은 주의 기이한 능력과 놀라운 기사들을 노래하면서 때로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결국에는 회복시키시고 주권과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한다(20).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더 높이시고 위로하실 하나님을 구하는 모습을 통해 계속 전진하는 믿음을 본받는다(21). 세월 지날수록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할 뿐이다. 믿는 자에게 노후대책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떠올리는 믿음의 기억력일 것이다. 3 시인은 마지막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프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의 영혼도 기뻐 소리친다(22-23).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찬양할 유일한 분이시다. 이제 시인은 그를 모해하려던 자들이 수치와 망신을 당할 것을 확신하며 시를 끝낸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통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을 되새기고, 자신의 여생에 함께하실 공의의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다. 그렇게 찬양하자. 그렇게 살아가자. 주님, 지금까지 돌보신 주님을 기억하고, 마지막까지 주님을 의지하고 찬양하는 더 성공적인 인생으로 펼쳐지도록 하나님을 찬양...

2024.11.14 (목) 시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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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4 (목) 시71:1-13 본 시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신뢰해 온 연로한 시인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세월이 지나도, 나이가 들어도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겸손히 들려준다. 1 시인은 숱한 어려움을 기도로 통과했고, 지금도 여전히 고난 가운데 주를 의지하는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을 ‘숨을 바위’, ‘나의 반석’, ‘나의 요새’라는 표현으로 주를 높인다(3). 이는 평생 주를 의지했고 주께로 피했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여호와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현재적 기도인 동시에 평생 여호와를 의지했다는 믿음의 총체적 고백이다. 황혼의 믿음이 참 아름답다. 2 시인은 먼저 하나님이 이제까지 자기에게 어떤 분이었는지를 회상한다. 그는 ‘나의 소망’되신 여호와를 어려서부터 신뢰해 왔음을 고백한다(5-7). 그래서 그는 종일토록 찬양을 입에 머금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8). 그래서 그는 쇠약해져 가는 자신을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시기를 호소한다.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으니 건질 자가 없을 것이라고 대적들은 수군거린다(10-11). 사탄은 항상 거짓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를 깨뜨리려 발버둥을 친다. 시인이 노년에 겪는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평생 한결같이 그를 신실하게 대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기에 우리 또한 지금까지 의지해 온 주께 간절한 마음으로 속히 도와 달라고 외칠 수 있다 (신31:6; 수1:5; 히13:5). 주님,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요 도움이십니다. 주님만을 찬양합니다!

2024.11.13 (수) 시7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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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3 (수) 시70:1-5 시편70편은 40:13-17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다윗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에서 속히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시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겠다는 다윗의 신앙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1 ‘기념시’란 표제가 이 시에 붙어 있다. 하나님을 기억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할 때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마땅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다윗이 속히 자신을 건져 달라고 반복해서 외친다.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것은 순전한 믿음이다. 비빌 언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토록 절실하게 매달리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정하고 정의로운 성품을 기대하며 간구한다(2-3). 다윗처럼 나를 도우시는 주님, 공의로운 재판관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이제 다윗은 개인의 청원을 넘어 고난에 차한 자를 구원해 주심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이 기뻐하며, 크게 즐거워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한다(4).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는 찬양이 끊이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이 짧은 시 안에서도 구원을 반복해서 요청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를 듣는 모든 이가 알게 한다. 우리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성도는 오히려 하늘이 가깝고, 하나님이 크게 보이며 하늘 문이 열리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는 모든 이가 깨달아 알도록, 그렇게 광대하신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자. 주님, 말씀에 기록된 모든 명령을 ‘기억하며’ 순종하게 하셔서 항상 우리를 건지시는 주만 찬양하게 하소서!

2024.11.12 (화) 시69: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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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2 (화) 시69:29-36 다윗은 곤고함과 궁핍 가운데 처한 자를 구원해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를 통해 경제적, 정서적 결핍 가운데서도 우리가 기억하며 구해야 할 이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1 다윗은 자신의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심령의 모든 고통과 짐을 주 앞에 내려놓고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태도와 생각, 영혼의 굴레와 어두움까지 해결해 주실 것이다. 다윗은 지금 마음이 낮아지고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주님께 자신을 높여 달라고 노래한다(29).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주의 구원’만이 자신의 낮은 마음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하리라고 고백한다. 가난한 마음을 소유한 이들은 진정한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함께 구원의 기쁨과 새 소망을 누리게 될 것이다(32). 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주님 때문에 고난 당하는 자를 기억하신다(33). 2 다윗의 시의 마지막 부분을 온 천지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엄한 모습으로 마무리한다(34). 수렁 같은 상황에서 시작한 시의 초반부와 얼마나 대조적인가! 시온을 구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할 것이란 찬양 예언은 포로 생활 후 귀환을 통해 성취되었다.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도성이 이뤄질 때 완성될 것이다. 다윗은 곤고한 중에도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온전히 구원하시고 완성하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영원한 후손에까지 영적 시야를 넓혔다. 온 천지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온 만물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시온에 영원히 거하는 위대한 꿈을 가졌던 다윗처럼 우리 삶도 그렇게 하소서! 주님,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시고 영원히 책임져 주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의 문제를 넘어 영원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게 하소서!

2024.11.11 (월) 시69: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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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1 (월) 시69:13-28 이유 없는 비난과 배척에 고뇌하던 시편 기자는 이제 깊은 수렁에 빠진 것과 같은 자신을 주의 인자와 긍휼을 따라 건져 달라고 외친다. 그리고 대적들을 벌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1 시의 전반분에서 큰물과 깊은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곤고함을 호소했던 시인은 이제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 달라고 여호와께 의뢰한다(13-14). 이때 시인이 의지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은혜’였다.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의지했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어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그분의 얼굴을 뵙는 것처럼 확인할 수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말고 응답해 달라고 호소한다(17).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이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주의 성품과 구원의 진리를 믿고 당당히 모든 고난을 인내하자! 2 다윗은 이유 없는 비난과 비방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주께 토로한다. 저들의 비방에 다윗은 온통 대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이다(20). 자신이 당한 배신과 비방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쓸개와 식초를 주어 먹게 했고 마시게 했다고 할 정도다. 겉으로는 위하는 척하나 그 내용은 조롱과 모욕이었다. 이 메시아적 예언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대로 성취된다. 믿을 따라 살기에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도,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면 얼마든지 끝까지 인내할 수 있고 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3 다윗은 대적을 향해 매우 강도 높은 저주를 퍼붓는다. 저들의 밥상과 평화로움과 건강과 후손들까지 끊어지게 해 달라고 저주한다(22-25). 더 나아가 27-28절은 그들의 죄가 사함 받지 못해 구원의 반열에 들지 못하게 해 달라는 내세에 관한 저주다. 이는 어떻게 보면 주님의 의에 들어오기를 거절한 죄인들의 최후이자,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다. 다윗은 대적을 하나님의 공의에 신탁했다. 우리 역시 원수 갚는 것이 하나...

2024.11.9 (토) 시68: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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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9 (토) 시68:19-35 시편68편 후반부인 19-35절도 전반부와 마찬가지로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교훈은 무엇일까? 1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왕이시다. 본문은 지속적을 하나님과 지도자, 그리고 하나님과 공동체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한다.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는 신앙고백이다. 내가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란 다짐이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면, 나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평안을 준다. 우리의 주인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상식이나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2 또한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란 고백은 기도 응답에 대한 특권이다. 시인이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하나님과 자신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겪는 문제를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위한 도입으로 볼 수 있다. 28-31절이 바로 그의 기도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저를 다스리는 분이 아닙니까? 제 하나님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은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주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말이다. 기도하고 응답받을 수 있는 것, 성도는 이 특권을 가지고만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누려야 할 것이다. 주님, 다윗이 주님을 찬양하던 그 입술을 닮기 원합니다. 다윗에게 승리를 주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나의 상황 속에서 두려움 없이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2024.11.8 (금) 시68: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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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8 (금) 시68:1-18 시편68편은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하며 우리와 함께하시며 앞서 나가 승리를 쟁취하시는 하나님을 높인다. 다윗이 경험한 승리에 대한 찬양이면서, 동시에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 이뤄질 궁극적 승리에 대한 예언적 시편이기도 하다. 1 다윗은 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의 기쁨을 맛본 사람이다. 그는 민10:35을 인용하며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이 또다시 승리를 주실 것을 믿고 찬양한다. 이에 원수는 녹아 내리고 의인은 기뻐 뛸 것이다. 이어 다윗은, 장수가 병거를 타고 광야를 달리며 승리의 싸움을 이끄는 듯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며,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 또한 하나님은 강한 전사를 넘어 공의로운 재판관이시다(5). 고아와 과부들을 신원하시고, 외롭고 궁핍한 자들에게 믿을만한 가정을 붙여 주시고,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때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 어떠한 역경 가운데서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자. 2 다윗은 실제 역사 속에서 앞서 행하시며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불과 구름으로 앞서 행하셨고 그 백성을 인도하셨고, 광야 여정 중 방해하는 이방 민족을 물리쳐 주셨다. 심지어 산도 여호와의 임재와 영광 앞에서 두려워 떨며 진동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돌보시고 대적들을 진멸하시며 평안히 약속의 땅에 정착하도록 인도해 주셨다(9-13). 다윗은 이제 높이 오르셔서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구원의 선물을 베푸시며 이방 민족들로부터 높임을 받으시는 메시아를 향한 찬양으로 이어간다(18).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해 이 땅에 오시고 또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각종 다양한 은혜와 은사를 설명하기도 했다(엡4:8). 주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 주님, 다윗이 경험했던 동일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2024.11.7 (목) 시6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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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7 (목) 시67:1-7 시편67편의 기도문은 근본적으로 기도가 성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1 기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심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모든 것, 먹을 것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시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간구하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종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간구하지 않는다. 주인이 아닌 사람은 종이 간구하는 내용을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필요를 채워 주시는 것은 우리의 주인 되시기 때문이다. 2 기도는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 타인을 위해 확장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공동체는 자기 백성만을 기도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또 긍휼하신 하나님의 통치와 공평한 판결을 경험하길 소망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다. 나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한계를 넘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타인을 향해야 한다. 나를 넘어 타자가 하나님의 평안함을 맛보고,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이 성도의 임무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향해야 할 궁극적인 방향성이다. 주님, 주의 자비와 은혜를 먼저 맛본 자들로서 모든 인생이 주의 은혜를 알고 찬양할 수 있도록 복음 전하는 일과,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에 더 힘쓰게 하소서!

2024.11.6 (수) 시66: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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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6 (수) 시66:8-20 시편66편 후반부는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의 찬양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찬양 초대, 더 나아가 기도 응답에 관해 노래한다. 이런 주제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1 시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맞춰지는 과정이다. 고난은 시험이다. 성도에게도 시험은 믿음이 진실한지 판별하는 과정이다. 분문은 시험을 은을 제련하는 것에 비유한다(10). 시험은 우리 안에 있는 불신앙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을 갖추게 하는 과정이다. 힘들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다. 이스라엘 역시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 백성에게 합당한 모습을 갖춰갔다. 시인은 불과 물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시험이 끝났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끌어 내 풍부한 곳에 당도하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시험이 끝나는 때, 우리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부한 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다. 문제는 우리가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지만, 정작 고난과 마주했을 때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가용한 수단을 다 쓰고 나서야 기도할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 우리는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능력의 하나님을 찾고, 나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고난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함과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시간이다. 지금 나의 고난 속에서 더더욱 기도하자. 주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 주의 인자와 긍휼을 또다시 체험케 하소서!

2024.1.5 (화) 시6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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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5 (화) 시66:1-7 시편65편 본문은 주께서 행하신 일과 다스리심을 찬양함과 동시에, 그 엄위와 권능 앞에서 모든 피조물이 겸손히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을 도전한다. 1 ‘온 땅이여 하나님께 기쁨의 소리를 외치라’라는 고백을 통해 온 땅이 주의 것이며 찬양 받으실 분은 하나님 뿐이란 믿음을 고백한다. 찬양의 첫 내용은 ‘그의 이름의 영광’이고, 둘째 내용은 그분이 행하신 일이다. 이 두가지는 모든 믿는 자가 평생 지녀야 할 믿음의 근본이다(신8:2, 11, 14, 18).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가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가 행하신 모든 행사를 숙고해 가벼이 여기지 않는, 일종의 거룩한 두려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2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주의 이름에 합당한 찬양을 온 땅에게 노래하라고 외친 시인은 이제 그 실제적 예들을 장엄한 표현으로 노래한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낱낱이 살펴보고 눈으로 확인하라는 ‘도전’에 가깝다. 주께서 홍해를 가르신 일이며 40년 후 요단강을 마르게 하신 일을 언급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고 보존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동일하게 지키심을 찬양한다(6).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을 되돌아보며 통치자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시인은 외친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기신다(삼상2:30)하셨으니,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분을 크게 찬양하자. 주님, 오늘 시인이 과감하고 담대하고 도전한 찬양으로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해 다함께 하나님을 높이며 기뻐하게 하소서!

2024.11.4 (월) 시6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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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4 (월) 시65:1-13 본 시는 세상에 가득한 주의 은총과 세상을 돌보시는 은혜와 사랑을 노래한다. 창조주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1 다윗은 먼저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총을 구원의 측면에서 찬양한다. ‘기다립니다’는 ‘침묵’을 뜻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크게 입을 벌려 찬양하고자 하는 백성의 열망을 나타낸다. 주께 찬양을 드림이 합당함은 죄에 패배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주께 나아가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3-4).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감격은 택함을 입는 자들만 누리는 특권이다. 때로 우리가 사탄에 속아 넘어져도, 일시적인 실패에 낙심하지 말고, 우리가 아버지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2 시인은 이어서 위엄과 권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자 하나님을 찬양한다. 땅의 끝과 먼 바다에까지 이르는 주님의 통치는 엄정하고 위풍당당하다(5).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권능의 산을 세우시고 능력의 띠를 띠시고, 큰 바다도 잠잠케 하시는 주 앞에 우리는 경배할 뿐이다(6-7). 창조주의 통치 앞에 모든 백성들이 즐거워한다. 그 어떤 권력자도 넘볼 수 없는 권능의 통치자, 영원한 통치자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다. 그분을 기뻐하자. 3 다윗은 온 땅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넉넉하신 공급과 돌봄의 증거들로 인해 공급자 되신 주님을 찬양한다. 강에 물을 주시고 곡식이 자라게 하시고, 소나기로 싹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급은 참으로 적절하고 정확하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들의 초장과 작은 산 들마저 기쁨의 열매로 가득하다. 온 땅이 하나님의 이름을 즐거이 외쳐 찬양할 수밖에 없다. 온 땅에 양분을 공급하시는 주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공급하지 않으실까?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자. 그분의 충만하신 공급을 날마다 기뻐하며 감사하자. 주님, 온 땅의 필요를 넉넉히 공급하시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주여, 주의 돌보...

2024.11.2 (토) 시6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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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 (토) 시63:1-11 본 시는 다윗이 광야에서 고난을 겪을 때 지었다. 다윗은 광야에 거할 때 주를 바라고 찬양하며, 주께서 행하신 일과 말씀을 기억하고 즐거워했다. 우리 모두 광야를 지나는 것 같은 경험을 항상 한다. 다윗의 모습을 통해 배우게 되는 믿음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1 광야는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곳이다. 거기서 다윗은 오히려 육신의 갈증을 넘어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갈증을 증폭시켰다. 예배의 경험으로 치환했던 것이다. 광야를 성소로, 고립된 시간을 하나님을 앙망하는 예배의 시간으로(2). 우리 생명의 주인을 만날 때 울는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해소되고, 주께 의존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광야를 걷고 있는가? 우리의 온 삶을 적셔 주실 하나님을 갈망하자. 단비처럼 찾아와 우리를 만나 주실 것이다. 2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헤쎄드)’을 찬양한다(3). 생명을 주신 이의 변함없는 사랑이 없다면 어떤 생명이 의미 있을까? 광야에서 무슨 기름진 것이 있고 피난 중에 어떤 음식이 다윗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다윗은 오직 인애로우신 주로 인해 진수성찬을 먹고 배부른 것보다 더한 영적 포만감을 느낀다고 고백한다(5). 이런 찬양은 새벽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이어진다(6). 삶이 고된가? 주님을 찬양하자. 주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기억하고 앞으로 이루실 일을 기대하자! 찬양할 때 우리는 광야에서도 천국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3 다윗은 자신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8). ‘오른손’은 권능을 상징한다(출15:6). 다윗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했고, 하나님이 원수들을 모두 물리치실 것을 확신했다(9-10). 마르고 황폐한 광야를 묘사하며 자신의 상황을 토로했던 다윗은, 이제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을 기대하며 시를 마무리한다. 나의 상황이 막막하게 느껴져도,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 이루실 일들을 확신한다면 우리 역시 어디서나 노래할 수 있다. 공의의 주님을 신뢰하자...

2024.11.1. (금) 시6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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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 (금) 시62:1-12 시편62편의 배경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힘겨운 상황 속에서 오직 구원의 주를 바라보며 그분이 허락하시는 소망과 의로운 심판을 바랐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가 어려움을 통과할 때 취할 태도를 배울 수 있다. 1 지금 다윗은 위협으로 인해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기울어 넘어지는 벽처럼, 흔들리는 울타리’는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 준다(3). 이런 때에 다윗은 오히려 잠잠히 하나님만 바랐다. ‘만’으로 번역된 ‘ak’는 다른 것을 배제한 상태와 각오를 강조하는 부사로, 하나님’만’을 향한 다윗의 믿음과 각오를 잘 보여 준다. 사람들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후 정신을 차리고 주님을 바라보겠다고 각오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 다윗은 구원이 하나님에게서만 나온다고 믿고 의지했다. 반석과 요새가 되시는 구원의 하나님만 바라보며 찬양했던 다윗의 본을 따라 우리의 때를 그렇게 지나자. 2 다윗은 새로운 단락에서 ‘소망’의 하나님을 찬양한다(5). 하나님은 바위와 구원이 되시고 산성이시다(6-7). 5-6절은 1-2과 거의 흡사하다. 반석과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만 바라며 잠잠히 신뢰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참된 평안을 주신다. 그러니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 피하자. 3 다윗은 공평하고 정의롭게 모든 이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바라는 찬양으로 시를 마무리한다. 지금 당장은 위협적인 일도 사실 아무런 무게감도 없는 한숨에 지나지 않는다(9). 사람의 힘을 의지하거나 그들의 행위로 인한 결과물들이 그럴싸해 보일지라도 그 허망한 것에 마음을 둘 이유가 없다. 참된 힘은 하나님께만 있다. 주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판단하고 갚으시는 분이시다. 공평하게 모든 행위를 판단하실 하나님만 바라보자. 동시에 그것을 경고와 위로로 삼자. 주님, 아무리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도 잠잠히, 성급히 행동하지 않고, 오직 주를 바라며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2024.10.31 (목) 갈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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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목) 갈6:11-18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위기에 처해있다. 세속화다. 바울은 교회 안에 들어온 악한 세력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교회를 바로 세울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1 먼저 바울이 본서 마지막 부분을 친필로 크게 쓴 이유는 할례를 강요하는 거짓 선생들의 동기가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피하려는 것임을 밝힌다(12).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더러운 이방인들과 교제한다’는 이유로 받는 핍박을 피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는 오히려 이방인들을 유대인이 되게 하려는 것임을 바울은 고발한다.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피하고 싶고, 십자가의 구원은 얻고 싶어서 이방인 형제들을 속인 것이다. 신앙으로 인한 고난을 두려워하면 신앙을 잃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2 율법주의자들은 이방인 형제들에게 할례만 받게 하면 된다고 거짓되게 생각했다(13a).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지 않는다(신10:16; 렘4:1-4).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육체로 자랑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한다. 세상에서 조롱거리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울은 자랑하며 세상의 조롱과 핍박을 기꺼이 받았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육체를 자랑하는 것은 거룩한 백성의 것이 아니다. 3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유대인이냐 아니냐, 어느 혈통에서 났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15). 하나님의 긍휼은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자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16).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기 몸에 새겨진 언약의 흔적이라 여겼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흔적이야말로 자랑거리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얻을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다. 십자가에 의해 모든 것이 바뀐 사람,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주님, 앞으로 살아가면서 육체의 자랑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흔적만이 우리에게 남게 하소서!

2024.10.30 (수) 갈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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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0 (수) 갈6:1-10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도 하지만, 죄인들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부족하니 여러모로 불편하게도 만들고, 때로는 실족시키기도 한다. 미성숙한 교회 안에서 시험에 들게 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바울 사도는 제시한다. 1 서로 돌아보며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짐(2, 헬:baros,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고난)을 서로 지듯 서로를 세워줘야 한다. 혹 자기가 ‘뭔가 된 줄로’ 생각해 섬김 받기를 당연히 여기는 자가 있을 수 있다. 바울은 이것을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데 뭔가 되었다고 스스로 속이는 행위라고 지적한다(3). 서로 돌아보아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다. 그렇기에 교회에서 배우는 자들은 좋은 거이 있으면 가르치는 자와 그것을 나눠야 한다(6). 이처럼 교회는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의 섬김을 인정하며 각자 자기 짐을 지되 또한 서로의 짐(5. 헬: fortion, 같이 옮겨야 할 무거운 짐) 을 지기를 기뻐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2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나는 나를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우리가 육체의 일을 행하면 결국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의 일을 행하면 영광을 얻는다(7-8).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무엇이 육체의 일이며 무엇이 성령의 일인지 알려 주시기에 우리가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성도들을 격려하며 ‘포기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면 때가 이르러 거둔다’라고 격려하며, 우선 믿음의 가정들을 대상으로 먼저 하고, 더 나아가 교회 바깥의 이웃들에게도 선한 손길을 펼치라고 가르친다(9-10). 억울한가? 힘든가?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을 행하면 결국 영광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주님, 육체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을 행하고,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하기에 힘쓰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