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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March, 2025

2025.3.29 (토) 민6: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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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9 (토) 민6:13-27 이스라엘의 힘은 거룩함에서 나온다. 그래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대제사장이 가장 거룩한 자로 여겨졌고, 나실인 역시 그와 비슷하게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거룩한 이들이 어떤 인정과 권세를 가지게 되는가? 1 나실인이 서원 기간을 마치면 회막 문 앞, 즉 성소 뜰에서 마치 제사장 위임식 같은 제사를 드린다(13; 출29; 레8). 제사장을 세울 때처럼 나실인이 서원 기간을 마칠 때도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14, 16-17; 레8:14, 18, 22). 무교병과 기름 섞은 과자와 기름을 바른 전병이 추가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15; 출29:2). 제사장을 세울 때 드리는 송아지 대신에, 나실인 제사에서는 어린 암양을 속죄제로 드린다. 제사장의 자손이나 레위인이 아니어도, 여자라도 제사장과 거의 차이가 없는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영광이 있다. 거룩을 지키는 것은 이처럼 영광스런 일이다. 2 제사장 위임식에는 숫양의 피를 제사장의 오른쪽 귓불과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에 바르는 절차가 있는데, 나실인의 경우는 서원 기간에 보존했던 머리카락을 화목제물과 함께 제단에 태워 드리는 절차가 있다(18; 레8;24). 제사장으로 세워진 자들이 하나님 앞에 요제를 드리는 것처럼, 나실인 서원 기간을 마친 자도 제사장과 함께 요제를 드린다(19-20; 레8:26-27).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거룩하게 구별했던 헌신의 기간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중요한 영적 영향력을 끼치게 하셨다. 제사장이 아니어도, 레위인이 아니어도,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훈련을 통과한 자를 이처럼 하나님은 인정하신다. 3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들은 거룩한 곳, 즉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할 권세가 주어졌다(22-23). 이 축복문은(24-26) 매우 정교한 시적 언어로 3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문장에서 셋째 문장으로 가면서 각각 2단어, 2음절, 5글자씩...

2025.3.28 (금) 민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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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8 (금) 민6:1-12 이스라엘에 요구되는 것은 강한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잘 지키는 것이었다. 나실인의 목적은 거룩한 사람의 모범을 보여 주어 공동체 전체의 거룩한 삶을 고양시키기 위함이다. 1 ‘나실’인 (히. 나지르)’은 ‘서원하다’, ‘구별하다’, ‘바치다’등의 의미를 가진 어원을 가진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도 한시적으로 높은 수준의 거룩함을 지키기로 결단하는 것이 나실인 서원이었고, 여성에게도 열려 있었다(2). 나실인으로 서원한 사람은 서원한 기간 동안 술과 식초를 금해야 했고, 포도는 가공한 것도 먹어선 안 된다(3-4). 이처럼 철저히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2 나실인은 몸을 제물로 바칠 수 없기에, 머리털을 자르지 않는 것으로 표식을 삼았다. 서원한 기간이 끝났을 때 그동안 기른 머리털을 밀어 화목제물과 함께 제단에서 태워 바친다(5, 18). 서원기간 동안 대제사장에게 해당될 만한 거룩함을 실천해야 했다(6-7; 레21:10-12). 나실인이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가 없어 보여도,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에 있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의 권능이 의로움과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다. 3 서원한 기간에 의도치 않게 거룩함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그 머리카락은 더러워져서 하나님께 바칠 수 없기에, 7일 동안의 정결 기간을 보내고, 마지막 날에 머리카락을 밀고(9), 8일째 날에 새 두 마리로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 죄를 속하여 머리를 성결하게 하고(10-11),1년 된 숫양으로 속건제를 드림으로 나실인 서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12). 그렇기에 나실인은 혹시라도 부정한 것에 접촉되지 않도록 늘 신경을 써야 했다.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자신을 성결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주님, 우리도 나실인처럼 성결하게 살아갈 때 주께서 우리에게도 능력 주셔서 세상을 이기...

2025.3.27 (목) 민5: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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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7 (목) 민5:11-31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룩함과 정결함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과 당시에는 남녀의 지위가 동등하지 않아 남자가 아내의 정절에 대해 의심을 품으면 아내는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 아내의 외도에 증거가 없는 상황이거나 결백한데 남편이 의심하는 상황이라면(12-14),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성막 앞에서 보릿가루로 의심의 소제를 드림으로 재판을 받아야 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루는 기본단위가 부부다. 서로 의심의 싹을 품고 있어선 안 된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받아 의심을 해결하거나, 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라고 말씀하신다. 2 의심의 소제를 드릴 때 여인은 여호와 앞, 아마도 성막 문 앞에서 소제물을 들고 머리를 풀고 선다(16,18). 제사장은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아 성막 바닥의 흙을 넣고, 이것이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이 말한다. 여인에게 만약 간음을 행한 적이 없다면 그 물의 독을 면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물이 여성의 ‘넓적다리와 배’(성기와 자궁의 히브리어 완곡어법)를 마르고 붓게 하리라는 저주의 맹세에 ‘아멘 아멘’으로 답하게 한다(18-22, 27-28). 또 저주의 글을 쓴 두루마리를 그 물에 빨고 그 물을 여인에게 마시게 하고 소제물 한 움쿰을 제단에 태워 드린다(24-26). 여인이 간음을 저질렀다면 이 모든 과정 가운데 큰 공포와 대가를 치르겠지만, 결백하다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게 된다. 당시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서 아내가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한 법으로 해석한다(29-30).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주님, 말씀의 경고와 억울하게 의심받는 약자를 보호하시는 규례를 보며, 우리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더욱 말씀으로 잘 훈련 받게 하소서!

2025.3.26 (수). 민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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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6 (수). 민5:1-10 1-4장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계수 및 진영 배치에 대한 말씀이었다. 오합지졸의 이스라엘을 질서 정연한 하나님의 군대로 세우셨다. 이제 5-6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정체성을 갖추기 위해 지켜야 할 율법규정을 말씀하신다. 1 본문은 레위기의 정결규례(레11-15장)를 연상시킨다. 악성피부병(나병, 레13-14장)과 유출병(레15장),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레11)는 진영 밖에서 따로 장막을 치고 살아야 했다(2). 위생문제도 관련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신앙적 가치가 반영된 가르침이다. 이스라엘의 중심에 하나님이 거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진영은 언제나 정결함을 유지해야 했다(3). 교회 공동체 역시 부정이나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전3:16-17). 2하나님은 ‘부정함’과 ‘죄’를 명확히 구별하신다. 잠깐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것보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자는 죄를 자복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죗값을 치러야 하며, 재물에 피해 입힌 것에 1/5을 더해 배상해야 했다(7). 죗값을 받을 사람이 사망했다면 그 친척에게, 친척도 없는 상황이라면 제사장에게 돌려 하나님께 바쳐야 했다(8). 하나님의 백성은 부정과 죄를 멀리하고, 반드시 바로잡고 회개해야 한다. 3 부정해진 사람이 부정을 씻고 다시 진영 안으로 들어올 때나 죗값을 치를 때 제사를 드리게 마련인데, 그 제물 가운데 제사장에게 돌리는 몫이 있었다(9; 레14:13). 또 어떤 물건이든 사람이 하나님께 바치고자 구별하면 그것은 제사장의 소유가 된다(10).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왕과 같이 중앙집권적 권세자가 백성의 세금을 통해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그 힘은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전제로 발휘되는 것이었다. 주님, 오늘날 성도들 역시 혈과 육에 속한 것이나 부와 권세로 싸우는 자들이 아니라...

2025.3.25 (민4: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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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5 (민4:34-49)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귀하게 여기신다. 1 하나님은 30세부터 50세까지 회막에서 봉사하는 고핫, 게르손, 므라리 자손을 계수하게 하신다. 고핫 자손은 2,750명(36), 게르손 자손은 2,630명(40), 므라리 자손은 3,200(44)이었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책무를 맡은 자손들의 수를 각각 기록하게 하심으로 숫자가 아니라 그 사명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일깨우신다. 오늘날 성도들은 유력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저 숫자 속에 묻힌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 모두 기억하신다(사49:16).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 사명을 주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신다. 우리의 이름이 불릴 때 곧바로 아멘으로 응답해야 한다. 2 하나님은 레위 자손을 조상의 가문과 종족에 따라 1개월 이상 된 남자들을 계수하게 하신다(3:15). 그러나 그들이 회막에서 봉사하게 되는 때는 30세부터 50세까지이다 (35, 39, 43). 30세부터 50세까지 20년을 봉사하게 하기 위해 생후 1개월부터 30세가 되기까지 준비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시기 위해 80년을 훈련시키시고 준비시키셨다. 예수님도 공생애 3년을 위해 30년을 기다리며 준비하셨다. 사명의 시간은 하나님께 부름 받아 쓰임 받은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준비되어야 쓰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성도의 전 삶을 부르신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전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 주님, 주와 함께 동역할 존귀한 존재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니, 사명의 자라로 부르시는 음성에 나의 전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2025.3.24 (민4: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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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4 (민4:21-33)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맡기신 일을 우리는 사명이라 부른다. 우리가 주를 따른다 하지만 주께 영광 돌리기보다 내게 유익한 일인지를 따질 때가 있다. 본문은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크고 작음이 없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1 교회에는 여러 직분이 존재한다. 다양한 직분을 주신 이유는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이다(엡4:12). 주님은 각 사람에게 일을 맡기실 때 높고 낮음, 크고 작음의 차별을 두시지 않으신다. 게르손 자손에게는 성막 자체를 옮기는 일(25-26), 므라리 자손에게는 성막을 두른 울타리를 운반하는 일(31-32)을 각각 담당하게 하신다. 그런데 고핫 자손에게 성소 안의 모든 지성물을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명하신(7:9) 반면, 게르손 자손에게는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7:7), 므라리 자손에게는 수레 넷과 소 여덟 마리를(7:8) 사용해 운반토록 하셨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연히 불공평하게 보인다. 그러나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시면 그것이 무엇이든 쓰임 받음에 감격하며 기쁨으로 일해야 한다. 2 성막은 길이가 약 45미터(100규빗), 폭이 약 23미터 (50규빗) 정도였음을 감안한다면 8,580명(4:48)이나 되는 사람이 성막 이동에 동원될 필요가 있는가 의문이 든다. 그러나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는 예외가 없음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이다(23, 30). 지체와 서로 연결되고, 각각 분량대로 사명을 감당함으로 공동체는 세워지기 때문이다(엡4:16).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이가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도 주신다.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에게 능력을 요구하고 책임완수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오직 사명을 맡은 자들이 주님을 믿고 따름으로 충성하기만을 바라신다(고전4:2). 사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하시는 복이 된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마음으로 사명에 충성하자. 주님, 남들과 비교해 보잘것없이 보인...

2025.3.22 (토) 민3: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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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2 (토) 민3:40-51 본문은 생명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좋은 아버지가 되심을 가르치며 주님과 깊이 교제할 것을 권한다. 1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들의 생명에 대해 속전을 내게 하셨다. 이후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장자는 속전을 바쳤다(출30:12). 따라서 하나님이 1개월 이상 초태생 남자들을 계수하게 하신 것(40)은 1차 인구조사 당시 20세가 되지 않았던 장자들을 레위인으로 대속하시기 위함이었다(41). 이 같은 사실은 애굽에서 일어난 구속이 과거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은 생사화복의 모든 시간 속에서 구원 역사를 온전히 진행해 나가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던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아신다.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우리를 고통 속에 방관하시는 것 같은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신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임하는 생과 사, 화와 복의 시간을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믿어야 한다. 또한 그분이 선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2 이스라엘 자손의 초태생들은 사람이든, 가축이든 레위인의 초태생들로 동일하게 대속되었다(41).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1개월 이상 된 초태생은 22,272명(43)이었고, 이를 대속할 레위인의 수는 22,000명(39)으로, 이스라엘 초태생이 273명 더 많았다(46).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당 성소의 세겔로 다섯 세겔씩 속전을 내게 하셨다(47). 생명의 속전으로 드린 다섯 세겔은 당시 성인 노동자의 20일 치의 임금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자들 생명의 대가를 고작 20일만 일하면 받을 임금으로 대속해 주신 것이다. 즉, 속전이 생명을 대속한 것이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대속받은 것이다. 우리 역시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인생이 아니라 그 은혜로 말미암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영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생명을 값을 정할 수 없는 은혜로 대속해 주셨음...

2025.3.21 (금) 민3: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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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1 (금) 민3:14-39 본문은 레위 지파를 구성하는 각 가문의 규모와 임무를 소개하고 있다. 레위인은 주께 바쳐진 구별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정체성을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입해 보면, 성도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킬 것인에 대해 도전이 된다. 1 이스라엘의 각 지파는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만한 남자의 수를 하나님은 계수하라고 명하셨다(1:3). 그런데 레위 지파는 1개월 이상 된 남자를 계수하라고 하신다(15). 그 이유는 레위인의 임무가 달랐기 때문이다. 게르손 자손에게는 성막과 휘장 일체를 맡기고(21-26), 고핫 자손은 성막 안의 모든 기구를 맡아서 운반하는 일(27-31), 므라리 자손에게는 성막 널판과 기둥 및 받침 일체를 맡아서 운반하는 일(33-37)이 주어졌다. 1개월부터 계수하라고 명하신 이유는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부터 시작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때가 아니라고 여겨져도 하나님이 주인 되신다고 고백하는 자라면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한한 주의 능력에 의지해 부르심의 음성에 순종할 뿐이다. 우리 삶이 모두 주께 드려졌다는 것을 고백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소명에 응답하자. 2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성도에게 맡기실 때 그의 재능만 보지 않으신다. 성막 관련 일을 레위 지파에게 맡기실 때 가문을 기준으로 삼으셨다. 능률적인 업무 추진이 목적이었다면 개인의 능력이 기준이었을 것이다. 고핫과 므라리 자손이 힘이 장사여서 무거운 기물의 운반업무를 맡기시고, 게르손 자손은 세밀해서 성막과 휘장 일체를 담당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섬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신다(빌4:13). 성도는 조건과 상황이 맞을 때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신 이의 능력을 힘입어 일하는 것이다. 성도는 능력 주시는 하나님이 할...

2025.3.20 (목) 민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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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0 (목) 민3:1-13 이제 진영의 중심에 배치된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3-4장). 그런데 이 본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죽음’의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아채야 이들이 맡은 직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1 제사장들은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이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져 거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3). 제물은 죽어 제단에 드려져야 하지만, 사람은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얼마나 위엄한지는 이미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으로 확실하게 드러났다(4; 레10:1-2). 제사장들은 죄에 대해 죽은, 즉 거룩한 자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씀도 같은 뜻이다(벧전2:9). 우린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생명으로 사는 자들이다(갈2:20). 2 레위인은 제사장의 지시를 따르는 자들이다(6, 9). 성막에서 일하며, 유지, 보수뿐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고, 성막 출입을 경비하는 역할도 했다. 수상한 사람이 성막 가까이 다가오면 그를 제지하고, 위급할 경우 그를 죽일 정도로 성막을 철저히 지켜야 했다(10).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므로 죄인이 그분을 가까이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성막과 일반 백성 사이에서 성막의 거룩함을 지키고 백성 역시 보호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역할이다. 3 레위인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모두 무사했다. 레위인은 그 목숨 값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었다(13).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죽은 자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의 곁에 있어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을 직접 섬기는 제사장을 보조하고 조력하는 역할을 맡았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육신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산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여기에 잘 나타난다. ‘날마다 나는 죽노라’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아직도 내 안에 죽지 않은 부분을...

2025.3.19 (수) 민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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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19 (수) 민2:1-34 이스라엘 각 지파는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행군했다. 이스라엘 진영 배치는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고 무사히 하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해 준다. 1 12지파가 세 지파씩 네 그룹을 형성해, 성막을 중앙에 두고 사방에 자리를 잡았다. 광야를 행진할 때도 성막을 중앙에 두고 선두에 앞서가는 하나님의 법궤와 구름 기둥을 네 그룹이 나란히 따라간다.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 성막이 놓여 있다. 성막이 진영의 중심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중심이 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임재는 구약 족장시대 때는 때로 상수리나무, 돌베개를 베고 잔 장소, 모세도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했던 떨기나무가 일시적으로 거룩한 장소였고, 시내산 자체가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대한 성소였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중심이 되는 것을 성경은 가르친다. 2 성막이 단순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백성을 만나시고 그들과 소통하시며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복과 은혜를 베푸시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제사와 율법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성막(성전)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일상의 측면에서도 성막은 삶의 심장과도 같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러하다. 주님은 성전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세우신 몸 된 교회는 사람 성전이다. 성도의 모임이 교회가 참된 성전으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거기서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와 소통하시며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예배할 때, 우리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안전하고 풍족한 길로 인도받을 수 있음을 깨달아 매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멈춰지지 않게 하소서!

2025.3.18 (화) 민1: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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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18 (화) 민1:47-54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주셨다. 결코 잃으면 안 되는 핵심가치였다. 그리고 이는 레위인의 사명을 통해 발현되었다. 이스라엘이 타 민족 앞에서 거룩한 것처럼, 레위인은 일반 백성 앞에서 거룩한 사람들로 선택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지파와 달리 군사로 선발되지 않았다(47-49). 이스라엘의 후손임에도 이스라엘에 계수되지 않음을 보며 자기들은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존재임을 알았을 것이다. 결국 레위인은 존재 자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거룩함을 나타냈다. 레위인은 성막을 관리하고 봉사하며, 이동할 때는 성막을 걷어 운반하고, 다음 진을 칠 곳에서 성막을 다시 세우는 일을 담당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과 제사장, 레위인을 보며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기억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교회와 사역자들을 통해 우리의 영적 정체성을 기억하고 확립한다. 2 레위인은 성소를 지키기 위해 물리력을 사용해서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 했다. 회중 전체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 위함이었다(53). 하나님의 거룩함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레위인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지켰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약속의 땅을 죄악으로 더럽히고 있었던 가나안 족속들을 치고 그 땅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사명 역시 우리를 거룩하게 지켜 세상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주님,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또 세상이 하나님께 멸절되지 않도록 주의 진노의 때가 이르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룩한 자임을 알고,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2025.3.17 (월) 민1: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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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17 (월) 민1:20-46 본문은 이스라엘 중 전쟁에 나갈 만한 자가 지파별로 몇 명으로 계수되었는지 밝히는 부분이다. 구체적인 숫자는 이스라엘 이 광야에서 생활했음과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1 이스라엘 지파들의 순서는 조상의 어머니를 따라 레아, 라헬, 빌하, 실바의 아들들의 차례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지파의 목록에는 레위 대신 갓이 들어가 있다(24). 하나님께 바쳐진 레위 지파 대신 실바의아들 중 먼저 태어난 갓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지파들의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은 백성들이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통해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동족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음을 알려 준다. 야곱의 집안 70명이 애굽에 들어간 후 수백 년이 흘러 수백만 명의 인구를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해서 조용히 성취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짐을 믿을 때, 우린 평안함과 담대한 마음을 얻는다. 2 이어서 라헬의 아들들을 조상으로 하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의 인구 수가 제시된다. 야곱의 장자로 인정 받은 요셉은 두 몫을 차지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각각 독립된 지파로 인정받았다. 야곱이 죽은 후 수백 년이 흘러도 그의 축복은 지파들의 질서에 그대로 적용되었다(32-35; 창48:17-20). 축복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뤄진다. 이처럼 인간적 조건보다 우선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우리는 주께서 세우신 질서에 순복하며, 언약을 사모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3 여종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의 후손인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열거된다. 그런데 이들은 생모를 따라 분류되지 않고, 실바의 아들 아세 지파가 빌하의아들 단과 납달리 사이에 언급되었다. 야곱이 말년에 아들들을 축복한 순서도 단, 갓, 아셀, 납달리였다(창30:1-13; 49:16-21). 언약에 기초한 형제의식이 없었다면 아마 이들은 서자 지파로 취급 당한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공...

2025.3.8 (토) 요19: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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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8 (토) 요19:14-22 끝내 군중의 압력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유대인들에게 넘겨준다. 예수님은 골고다에서 못 박히시는데 ‘유대인의 왕’이란 푯말이 십자가에 붙어, 조롱 섞인 표현 속에서도 예수님의 왕권과 진리는 감춰지지 않는다. 1 빌라도가 ‘너희 왕’이란 표현을 두 번이나 사용한 것에 유대인들이 화가 났을 것이다. 원론적으론 유대인들에게 왕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요, 인간 왕도 대행자일 뿐이며(대상29:23), 보잘것없이 보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리인인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유대인들은 외친다(15). 놀라운 것은 그들이 ‘가이사 외에는’ 자신들에게 왕이 없다고 말했다는 거이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를 부정하는 동시에, 하나님 외에 다른 주가 없다는 자신들의 전통 신앙고백과도 배치가 되고, 로마의 정치적 위협 앞에 굴복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시다(18:36). 2 예수님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골고다라는 곳에서 못 박히셨다(17-18).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발견하는 여러 사건들을 생략하고(마27:32-38; 막15:21-27; 눅23:36-32), 십자가에 붙은 패를 강조한다. 십자가 위에 빌라도가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글귀가 패에 있었다. 출신과 민족 상관없이 그 패를 읽을 수 있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느 한 지역의 특정인들만을 위한 국지적 사역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를 위한 죽음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대제사장들은 ‘자칭’이란 말을 덧붙일 것을 요구했지만, 빌라도는 거절한다. 이로써 예수님이 모든 이의 진정한 왕임을 알리는 도구가 되었다. 인간의 죄악과 거절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왕권은 숨겨지지 않는다. 그분의 왕 되심을 우리는 알려야 할 거룩한 의무가 있다. 주님은 우리의 참된 왕이십니다. 주의 왕 되심을 세상에 널리 전해야 할 제자로 매일 살아가게 하소서!

2025.3.7 (금) 요1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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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7 (금) 요19:1-13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으시고 군인들에게 조롱당하시는 장면이 이어진다. 빌라도는 예수님과 군중들의 압력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자신의 정치적 안위를 선택한다. 주님을 통해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님을 깨닫는다. 1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 심문을 하는데, 그 방법은 가벼운 조롱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모욕과 수치였다. 군인들은 왕의 관과 복장을 모사한 가시관과 자색 옷을 예수님께 입혀 굴욕을 더한다(2). 또 평안을 비는 척하다가 손지검을 하여 수치감을 증폭시킨다. 주님은 이 조롱과 수치에도 잠잠히 침묵하심으로 모든 인간의 구속을 위한 끝없는 사랑과 겸손, 인내와 순종을 보여주신다(사53:7). 때로 진리를 고수하려 할 때 당하는 조롱과 모욕도 예수님을 기억하자. 2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지만(4, 6; 18:38), 대제사장과 하수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성을 지르며 압력 행사를 한다(6). 신성모독한 자를 죽여야 한다고 외친다(7, 레24:16). 자칫 심각한 폭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빌라도는 예수님께 출신을 묻는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자, 그는 더욱 혼란을 느낀다. 자신의 권한을 강조하며 예수님을 위협해 보지만, 오히려 진정한 권한은 하늘에서 온다는 예수님의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10-11).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가이사를 거론하며 정치적으로 위협하는 유대인들의 압력에 무너졌다(12). 가장 가까이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뵈었지만 진리를 거절하고 자신의 정치적 생명과 안전, 야망이라는 실리를 취했다. 우리가 하늘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수호하고 세상 압력에 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진정한 화평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주님, 우리가 그 어떤 수치와 모욕, 압력과 유혹 속에서도 주권자 하나님을 믿고 악과 타협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5.3.6 (목) 요18: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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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6 (목) 요18:28-40 이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 당하는 장면이 19장 중반까지 이어진다. 재판 과정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의 고발이 부당하고 위선적이며, 예수님이 진리의 왕이심을 볼 수 있다. 1 가야바 재판에 관해 요한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고, 다만 ‘가야바 집에서 로마 총독의 관저로 끌고’ 갔다고만 말한다(28). 유대인들이 관저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함이었다. 정결예식을 위해서는 이방인의 관저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고발하는 무고죄를 저지르는 그들의 모습을 요한은 고발한다(29). 그들은 이미 마음 속으로 예수님을 죽일 마음으로 사형언도가 가능한 재판정으로 온 것이다(31). 법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악한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넘쳐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공의는 반드시 실행될 것이다. 2 예수님이 정치적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인지 알고 싶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다(33). 이에 예수님은 자신의 통치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에 관한, 더욱 크고 진정한 왕권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 나라에 속한 자들만 진리에 속한 자들이 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다(36-37). 빌라도는 이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이냐’고만 묻지만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저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38). 불법적인 고발과 재판 속에서도 참된 왕권은 홀연히 빛났다. 3 예수님의 무죄를 알았던 빌라도는 더이상 유대인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유월절에 한 사람을 석방하는 관습을 좋은 핑계거리로 삼았다. 그러나 무지한 군중은 바라바라는 이름의 강도 살인자를 대신 석방할 것으로 요구한다(40). 성난 군중의 압력에 굴복해 공정을 버리고 정치적 안정을 택하는 모습은 선을 버리고 악을 취하며, 다른 이들을 협박해 죄에 동참시키는 것은 인간의 못된 본성이다(롬1:32). 이 부조리 속에서도 주...

2025.3.5. (수) 요18: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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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5. (수) 요18:15-27 주님은 결박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를 견지하셨다. 베드로는 두려움에 휩싸여 자신을 숨겼다. 본문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본다. 동시에 위협 앞에서도 담대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그분의 용서와 은혜에 더욱 의지하게 된다. 1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끌려가실 때, 두 제자가 뒤에서 몰래 따랐다.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15).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여서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안뜰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베드로는 그 제자의 안내를 받아 문을 통과한다(16). 이때 베드로는 문지기 하녀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첫 번째 부인한다(17). 불을 쬐던 중 경비병들에게 한 번, 말고의 친척인 종에게 또 한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니, 곧 닭이 운다(25-27). ‘주를 위해 목숨도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였지만(13:37), 위기의 순간 두려워 숨는 나약한 나의 모습을 그에게서 본다. 왜 인간에게 예수님이 필요한지 확실히 보여 주는 증거다. 나의 실존적 연약함이 있음을 고백하며, 나의 모든 허물을 덮고도 남는 주님의 은혜 앞으로 두려움 없이 나아가자. 2 대제사장의 질문에 예수님은 당당히 대답하셨다. 그의 질문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응하심으로 공생애에 걸쳐 하신 말씀과 행동에 확신과 자신감을 보이셨다(19-21). 예수님에게 손찌검을 하던 경비병에게 오히려 그 부당함을 지적하시며 침착함을 잃지 않으셨다(22-23). 진리의 사람은 세상 앞에 이처럼 담대하게 설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의의 길을 가는 자는 언제나 당당할 수 있다. 대제사장의 심문은 오히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죄 없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심으로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오히려 증명했다. 예수님의 담대한 반응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의 반대와 억압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가 주신 소명을 확신할 때, 우리는 당당함, 진실함, 평안함을 보...

2025.3.4 (화) 요1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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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4 (화) 요18:1-14 임박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피하지 않고 당당히 나아가심으로 당신의 주권과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을 분명히 나타내셨다. 1 감람산은 공관복음에서 ‘겟세마네’로 불렸던 곳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끔 모이셨던 곳으로, 유다도 잘 아는 곳이었다(1-2). 이때 로마 군대와 유대 성전 경비대가 모두 동원된 것을 보아, 유대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로마 군대 파견을 요청했음을 알 수 있다(3). 어떤 대항도 진압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지만, 예수님은 당신께 일어날 일을 아시고도 그들이 찾는 이가 바로 자신임을 두 번이나 말씀하신다(4-8). 당당히 자발적으로 체포에 응하셨다. 오히려 체포하러 몰려왔던 자들이 땅에 엎드렸다(6).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이 칼을 쥔 자들을 압도했다. 또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제자들의 안위를 책임지셨다(9).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다. 2 칼을 들고 온 자들을 베드로는 칼로 맞서 말고라는 자의 귀를 내리친다(9-10). 감람산에서 기도로 준비하지 못한 모습이 육신의 방법을 선택하는 모습을 본다.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 명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실 것을 선언하신다(11). 군인들은 예수님을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었던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 그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던 자다(13-14; 11:47-53). 이것은 가야바 본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예언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11:51-52). 어떤 죄도 짓지 않으셨지만 구속 계획 속에서 예언을 이루기 위해 당신을 순순히 내어 주셨다. 정치적 계산으로 강변했지만, 이 말은 결국 섭리 가운데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예언하는 말이 되었다. 주님, 언제나 우리를 어떤 위기나 역경 속에서도 지키시는 분임을 기억하고, 세상의 방법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소서!

2025.3.3 (월) 요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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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3 (월) 요17:20-26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미래의 모든 성도를 위해 드린 대제사장적 기도의 마지막 부분이다. 예수님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 되고, 아버지의 영광 안에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간절히 구하신다. 1 이 기도의 핵심은 ‘하나됨’이다(21). 마치 성삼위 하나님이 하나이시듯 현재의 제자들과 미래의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하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이셨다. 요한은 계속 예수님과 하나님의 연합을 강조해 왔다(5:19; 8:28; 10:25; 12:50). 성도들의 하나됨은 영광스럽고 온전한 연합을 목적으로 한다(22). 이는 인간의 노력이 아닌 성령의 역사로만 이뤄질 수 있다. 성도들의 하나된 모습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게 하며(21),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세상을 구원하길 기뻐하심을 보여준다(23). 성도가 반목하고 갈라설 때, 세상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오해하고 복음을 거절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는 것을 통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함을 잊지 말자. 2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제자들이 자신이 있는 곳에 함께하기를, 주님께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기를 원하셨다(24). 이 영광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경험하는 충만함과 사랑을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의로우신 아버지’로 부른다. 당대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25).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리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이 그들 안에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2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 사랑의 현현인 예수님이 성도들 안에 있다는 사실은 교회 공동체에 크나큰 위로와 힘과 영광이 된다. 주님은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그들이 보기를 바라셨던 것처럼(24),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으로 알게 하는 소원을 갖고 살아야 한다. 주님, 성도의 연합과 사랑의 삶,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에 주신 사명이며 특...

2025.3.1. (토) 요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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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1. (토) 요17:1-8 요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담고 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한 기도와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이 땅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한 중보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1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도 21개는 하나의 예외 (마27:46)을 빼고는 모두 “아버지여’라는 부르짖음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바로 기도의 대상이다. 이제 십자가에서 이루실 하나님이 구속계획이 정점에 가까웠음을 선언하신다(1).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들에게 권세를 주셨다.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그 자체가 피조물에게는 큰 영광이다(3).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당신의 영광이 영화롭게 되길 기도하신다(4-5). 이토록 영광스런 구원 작전의 대상으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을 하나님을 향한 영광으로 채워 나가야 한다. 2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로서 아들에게 주어진 자들이며,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계시와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 권능,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된 자들이다(6).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또한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근거가 되며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튼튼히 한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 그래야 진정한 믿음을 갖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안다면, 제자 된 우리 역시 동일한 마음과 열정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알기 위해 마음을 드려야 할 것이다. 말씀을 받아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날마다 자라가자! 주님,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간구하신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내 삶에서 더욱 영화롭게, 내 자신을 더욱 믿음으로 든든히 세워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