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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ne, 2024

2024.6.25 (화) 왕하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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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5 (화) 왕하4:1-7 아무리 심각한 문제라도 그 문제의 해결책은 기도와 순종이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라는 단순한 영적 원리를 본문은 가르친다. 1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던 이스라엘에서 선지자의 제자로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극심한 박해와 경제적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죽은 자신의 남편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 표현한 대목에서 이들 부부는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던 경건한 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가정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던 여인은 그런 상황 속에서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와 자신의 상황을 소상히 아뢰고 의지했다.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은 어려운 때를 만나도 기도한다.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상황과 상관없이 변함없이 일상을 살아 내기 위한 삶의 영적 원리로 삼은 것이다. 2 본문의 과부는 감당할 수 없는 빚까지 있었다. 채궈자는 돈을 갚지 못하는 여인의 두 아들을 데려가 종을 삼으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사는 다른 방법이 아닌, 모든 이웃에게 그릇들을 최대한 많이 빌려, 집에 가지고 있는 기름을 그 모든 그릇에 옮겨 담으라고 지시한다. 놀라운 것은 여인이 엘리사의 말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생각한 문제의 해결책대로 이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지식, 경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이뤄 주소서라는 고백이다.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해 순종하면 하나님의 권능이 예비하신 역사를 이룬다. 주님,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법대로 해결되도록 늘 기도하며, 순종하는 영성을 허락하소서!

2024.6.24 (월) 왕하3: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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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4 (월) 왕하3:13-27 우리는 기도 응답을 받은 후 더욱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문제가 해결되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지 않고, 우상이 내린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연합군의 모습을 본다. 1 별일 없을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지면 그제야 하나님을 찾고 기도 부탁하는 교인들이 있다. 비록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여쭤 보지도 않고 여호람과 함께 모압을 치러 나왔지만, 위기의 때에 하나님을 찾자 여호사밧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 세 왕이 원한 것은 마실 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골짜기 가득한 물과 함께 모압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하셨다(17-18).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키고 기도할 때 듣고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잘못도 하나님 앞에 숨기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긍휼을 구해야 한다. 2 엘리사를 통한 신탁의 말씀이 모두 성취되어 이스라엘 연합군은 모압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물을 피로 착각한 모압군대가 전세를 오판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이 쉽게 승리한 것이다. 승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의 응답을 목격한 연합군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압 왕이 최후의 발악으로 우상에게 왕의 장자를 인신제사로 드리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해가 갈까 두려워한 나머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다. 인신제사를 받은 우상의 해코지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기도 응답 후 성도의 삶은 더욱 영적으로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더 풍성해져야 한다. 주님,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그 응답의 은혜를 간직하며 더욱 깊어지고 풍성한 영적 삶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2024.6.22 (토) 왕하2: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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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2 (토) 왕하2:15-25 본문은 최고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실상은 정반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주님 안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가치있게 생각하시는 일들을 행하는 삶이어야 한다. 1 여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권능이 엘리사에게 임한 것을 보았음에도 엘리야의 시신을 찾아 나설 생각만 했다. 그리고 그 일로 3일의 시간을 허비한다. 이같이 행동한 이유는 ‘자기 신앙’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제자들로 스승에 대한 사랑도 있었고 영적인 일에 열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을 하늘로 올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영적 경험과 열심, 헌신을 내세우며 자신의 옮음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이 강할수록 영적 지도자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교회의 분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각자 열심히 한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어렵에 하는 일은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는 영적 시야를 넓히는 기도와 훈련이 더욱 필요하다. 2 엘리야의 승천을 직접 목격한 엘리사는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지도, 또 엘리야에게 임했던 성령이 자신에게 임한 것을 떠벌리지도 않았다. 이 모든 일은 자신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 가야 할 사명을 위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때로는 조롱도 당하도(23-24) 나쁜 것을 좋게 고쳐 주는 의미있는 일이다(19-22). 사람들의 이해와 인정, 내 삶의 편안함에서 가치의 유무를 따지지 시작한다면 처음에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졌던 사명자도 점점 자기중심의 신앙으로 변질되기 쉽다.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 없으니 엘리야처럼 하늘로 올라가라고 놀리는 아이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두렵긴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선한 도구가 될 대 우리 삶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소서!

2024.6.21 (금) 왕하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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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1 (금) 왕하2:1-14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이제 엘리야는 하늘로 부름을 입고 그 자리를 엘리사가 이어 받게 되었다. 선지자의 계승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뤄진다. 1 벧엘과 여리고에 있던 엘리야의 제자들까지도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엘리야의 후계자가 엘리사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한다(1b-2a, 4a, 6a). 따라오지 말고 이곳에 머물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이는 ‘네가 원치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다’는 의미인 듯하다. 그러나 엘리사는 맹세하며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 말함으로써 그가 엘리야의 뒤를 잇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선포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엘리사를 선택하셨음을 알면서도 ‘이 길은 힘든 길이다. 힘들다면 지금이라고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명을 이뤄 가는 자의 삶은 고통스럽고 외롭다. 그러나 진리를 본 자, 하나님의 마음과 권능을 아는 자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걷고자 결단하게 마련이다. 2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가르는 모습은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멈추었던 것처럼 엘리야와 엘리사가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리더십 계승을 이루고 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을 구한 것은 장자가 유산을 다른 아들들보다 갑절로 받는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자신이 엘리야의 장자로서 사역의 계승자가 되길 원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불수레, 불말,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사가 계승자임을 확증해 주셨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들고 강물을 가르는 이적으로 하나님은 엘리사와 함께 계심을 확증해 주셨다. 왕위와 달리 이스라엘의 참된 통치권은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 전수될 수 있었다. 주님, 주의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기억하고, 오직 주의 권능과 뜻만이 우릴 통해 나타나게 하소서!

2024.6.20 (목) 왕하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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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0 (목) 왕하1:9-18 아버지 아합의 길로 행하며 하나님을 떠난 아하시야는 모압에게 배반당하고 자신은 중병에 드는 징벌을 받고서도 우상을 찾았다. 엘리야를 통해 죽음을 예언받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며 회개할 줄 몰랐다. 하나님을 이기려 들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길이 열린다. 1 질병으로 죽게 되리라는 예언을 들은 아사히야는 그 예언을 전한 엘리야에게 많은 군사를 보내 겁박하려 했다. 아마도 그 예언을 바꾸려 했던 시도로 보인다. 그를 사로잡아 자신 앞에 무릎 꿇리려 했다. 왕의 권세로 하나님의 뜻을 무력하게 만들려는 사고인 것이다. 그러나 무장된 군사의 수가 상징하는 인간의 권세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9-12).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권력, 정치, 경제 , 문화의 힘이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이길 수 없다. 2 아하시야는 돌이킬 줄 모르는 무모함으로 엘리야를 잡기 위해 자신의 군사들을 3번이나 반복해 파송했다. 하나님의 사람을 죄인 취급하며 위협하다 앞선 두 그룹은 하늘에서 내린 불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9, 11). 하나님의 권세를 대적하는 것은 이처럼 무모하고 무지한 것이다. 그런데 3번째로 엘리야를 찾은 오십부장은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엘리야 앞에 꿇어 엎드려 은혜를 구했다. 그는 초라하게 목숨을 구걸하며 무릎 꿇은 비겁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앞에 무릎 꿇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세상의 권세에 위축되기 쉽다. 그러나 세상에 굴복하지 말고, 생명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 무릎 꿇을 수 있는 용기와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소’라고 기도하셨던 것을 마음에 새기며 ‘오직 내 삶에는 하나님만이 승리자시요, 나는 순종할 따름입니다’라 고백하며 나아가게

2024.6.19 (수) 왕하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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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19 (수) 왕하1:1-9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왕이었던 아합이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끝난 열왕기상을 이어 열왕기하는 그 아들 아하시야가 초라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을 거역하면 비극적이고도 초라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1 길르앗 라못 정벌이 실패하고(왕상22:29-40), 이스라엘 국력은 약화되었다. 이스라엘 지배하에 있던 모압은 어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최후와 국가적 위기 상황을 보고도 아들 아하시아는 전혀 왕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다락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자 블레셋 에그론의 신 바알세불에게 자기가 나을 수 있는지를 물기 위해 종을 보낸다. 자신의 운명을 우상에게 묻고 있으니, 부왕 아합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 이 종을 만나 아하시야가 침상에서 반드시 죽을 것을 예언한다(3-4, 6, 16). 하나님보다 우상을 의지하고 섬기면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죄 가운데 머물기 때문에 결국은 망하고 만다. 2 왕의 종들이 아하시야에게 돌아가 엘리야의 예언을 전한다. 이들은 엘리야를 ‘털이 많은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단순히 복장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엘리야를 ‘바알 세아르의 사람’이라 무시한 것이다. ‘바알 세아르’ 즉 ‘털의 주인’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더운 지역에서는 얇고 가벼운 옷이 좋은 옷이다. 아하시야 역시 더위를 피하려고 다락에 있다가 떨어졌던 것을 미뤄 짐작할 때, 엘리야는 제대로 된 옷이 아닌 짐승의 털가죽을 대충 두르고 있던 것과, 더 나아가 엘리야가 섬기는 하나님을 ‘자기 선지자에게 털옷 밖에 주지 못하는 신’처럼 하대하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아하시야나 그 신하들은 어리석게도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또 그가 섬기는 하나님까지 판단했다. 이 같은 불신앙은 재앙의 불씨가 될 수밖에 없다. 주님,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조롱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그 어떤 권력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2024.6.18 (화) 옵1: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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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관한 선언이다. 하나님이 백성을 회복시키신다는 주제는 여호와의 날 신학과 연결되어 나타난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1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날이다. 세상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을 세상의 마지막 날로 이해하고 자극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세상의 끝이라기 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세상의 첫 모습을 회복하는 날이다. 나아가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 받았던 주의 백성이 회복되는 날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이행되는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해 예언자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이 완전하게 회복되고 그들의 원수의 땅까지도 차지하게 되리라고 선언한다. 2 무너진 예배의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 오바댜는 무너졌던 예루살렘의 성전 산, 즉 시온이 회복됨을 선언한다. 시온이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오심과 함께 시작된다. 무엇보다 본문의 ‘거룩’이라는 표현(16, 17)은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심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가 회복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곳에서 보호받는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예배받길 원하신다(21). 오늘날 성도들도 예배의 자리가 회복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팬데믹 이후 무너졌던 현장 예배의 중요성을 깨닫고, 예배의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주님,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주를 붙들어, 주께서 모든 악을 끝장내시는 날, 주의 영광의 날에 최후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2024.6.17 (월) 옵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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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17 (월) 옵1:1-14 오바댜서는 에돔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다. 원래 에돔은 유다와 동맹해 바벨론에 대항하려던 나라였다(렘27:3). 그러나 정작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자 에돔은 바벨론 편에 서서 유다를 노략했다(시137:7). 이런 배신자요 방관자였던 에돔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1 에돔은 해발 1700미터의 고지대로, 험준한 바위산이었던 세일산이었다. 수도인 ‘셀라’까지 가려면 매우 비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했기에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있다. 그래서 에돔은 자기들의 안전을 확신하며 교만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돔이 아무리 높이 있어도 끌어내리겠다 말씀하셨다. 아무리 든든한 배경과 힘이 있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순 없다. 2 에돔은 유다를 돕기는 커녕 바벨론과 함께 유다를 침공했다. 이들의 관심은 약탈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에돔이 혹독하게 착취를 당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신다(5-6). 또한 에돔과 함께 한 자들 역시 에돔을 배반할 것을 선언하신다. 학문이 발전하여 지혜로운 사람이 많다고 여겨지던 드만 역시 멸절 당할 것을 예언하신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백성들을 참탈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다 3 에돔은 야곱, 곧 이스라엘의 형 에서의 후손이기에 혈통으로 보면 형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함께 바벨론을 대항하자고 동맹까지 맺었던 나라다. 그런데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자 오히려 예루살렘을 약탈했다(11-12). 신의를 저버리고 유다 사람들을 잡아 노예로 팔고 그 재산을 빼앗았다. 하나님은 이처럼 가까운 자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주님, 믿음을 저버린 결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던 에돔을 교훈삼아, 주의 몸된 교회에 충성하고 지체들과 하나 되어 신실한 믿음으로 주의 나라를 단단히 세워 나가는 일군들 다 되게 하소서!

2024.6.15 (토) 벧후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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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15 (토) 벧후3:1-9 베드로 당시 거짓선생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하면서 지금까지 세상이 그대로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며 장담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은 지금도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주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나? 1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또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시다.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하셨다. 거짓 선생들은 주의 재림을 부인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흔든다(4). 죄악에 빠진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셨음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악한 자들이 힘을 얻는 것 같아 보여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인내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믿고 그날을 소망 가운데 기다려야 한다. 주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더욱 악하고 거짓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5-6). 하지만 낙심하지 말자. 우리의 고통과 탄식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옳았다는 것을 받드시 증명해 주실 것이다. 2 주의 재림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아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죄에서 돌이키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9). 우리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막상 전도하는 대부분 성도들이 소극적인 것은 신앙 이야기를 함으로써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색해질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도할 의무가 있다. 누군가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복음을 들을 수 있었고 구원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들이다. 주의 심판의 때를 늦추시고 전도의 기회를 주시는 지금,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쓰자. 주님, 주의 재김의 긴박함을 아는 우리가 분주한 일들 가운데서도 복음전도의 우선순위를 놓치지 말고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복된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4.6.14 (금) 벧후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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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14 (금) 벧후2:12-22 베드로는 계속해서 거짓 선생들의 죄와 악영향을 고발하고, 잘못된 자유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밝혀, 헛된 믿음과 정신 나간 향락주의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과 믿음으로 반응할 것을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헛된 욕망과 세상 풍조 앞에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나? 1 거짓 선생들이 무슨 새로운 사상이나 지식으로 무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이성적 존재이며,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짐승과도 같다. 합리주의, 과학주의라고 말은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변명으로 가득 찬 오늘날의 세상을 보는 듯하다. 여기서 베드로는 발람 선지자(민22-24)를 예로 들면서, 불의의 값을 위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와 간음으로 이끌었던 발람을 하나님이 책망하신 것처럼, 미친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선생들을 하나님이 멈추게 하실 것을 경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을 잘 분별하고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2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은 마치 물 없는 샘과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같이 실체가 없는 허상임을 베드로는 설명한다. 공허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욕망에 충실하라고 유혹하며, 자신들의 길이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한다(18). 하지만 그 길은 멸망의 종이 되는 길이다. 결국 죄에게 져 죄의 종이 된 자는 영원히 죄가 시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통해 자유를 맛본 자들이 왜 얽매임으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렘2:13). 주님, 성도인 우리가 어떻게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분명히 기억하며 헛된 욕망과 죄를 거절하는 참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4.6.13 (목) 벧후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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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13 (목) 벧후2:1-11 사탄은 지금도 거짓 가르침을 통해 주의 백성들을 미혹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은밀히 거짓을 전파하기에, 성도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삶을 보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1 거짓 선생들은 미래에 심판이 있음을 부정하고 가르치지 않는다.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들의 삶은 탐욕을 즐기는 방향으로 가고, 추종자들에게도 현재를 즐기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이 무섭게 심판하신 세 가지 예 (타락한 천사들, 노아 시대의 불경건했던 세상, 소돔과 고모라)를 제시한다. 심판 받은 자들은 최후 심판을 받을 대까지 형벌 가운데 갇혀 있다. 거짓 선생들의 주장과 달리 하나님은 미래에 세상과 불릐한 자들을 심판하신다. 2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사도들을 통해 계시하신 진리의 도를 존중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들은 최후 심판을 집행할 천사들의 역할까지도 무시한다. 하늘의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신앙이 어리거나 판단력이 약한 사람들은 당돌한 교사들에게 의존하기 쉽다. 참된 교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고 사도들이 전수한 가르침을 겸손히 배우고 실천한다. 교회는 거짓 선생들의 입술에 속지 말고 탐욕을 챙기기에 급급한 자들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 이단의 미혹에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늘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2024.6.12 (수) 벧후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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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12 (수) 벧후1:12-2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기초 삼아 경건한 삶의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한 베드로는 이제 유언과도 같이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를 통해 받은 가르침을 기억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거릿 가르침에도 흔들리지 말 것을 권면한다. 1 베드로는 자신이 육체의 장막을 벗고 죽은 후에도 성도들이 받은 가르침을 잘 기억해서 그 어떤 거짓 가르침에도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13, 15). 이는 오늘날 모든 성도가 되새기고 따라야 할 권면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믿는 성경의 진리를 되새기고 따를 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분명하게 전해 줌으로써 이 세상 속에서 교회가 굳건하게 세워지도록 힘을 다해야 한다. 2 먼저 성도가 기억해야 할 구체적인 진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재림’이라고 밝힌다(16). 당시 영지주의 이단은 예수님의 성육신도 부인했고, 재림도 믿지 않았다. 재림이 없으니 마지막 심판도 없고, 거룩하게 살아야 할 동기가 희박해지면서, 당연히 도덕적 해이로 이어졌다.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함께했던 사도들의 경험과 증언을 토대로 주의 재림을 변증했다. 바로 변화산 사건이다 (17-18; 마17). 진리를 수호하는 첫 번째 방법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담대히 예수님의 재림을 전하는 영적 각성이 절대 필요하다. 3 주님의 재림을 지지하는 두 번째 논증으로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수 많은 예언을 성취하러 오셨으니, 주의 재림도 그러함을 확증한 것이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 저자를 활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명시한다. 이단처럼 예언의 말씀을 사사롭게 해석하는 이단적 접근을 경계해야 한다(20-21). 말씀의 근원이 주께 있듯, 말씀 해석도 주의 방법과 뜻대로 해야 한다. 성경 말씀 위에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그 어떤 이단적 가르침에도 흔들리지 않는 말세의 성도가 되어야 한다. 주님, 주님 다시 오실 ...

2024.6.11 (화) 벧후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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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11 (화) 벧후1:1-11 외부 핍박 때문에 고난을 겪고 흩어진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베드로전서와 달리, 베드로후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하고 주의 재림을 확신시켜 내부적 미혹에 대비할 것을 권면한다. 1 먼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아는 것은 신앙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베드로후서의 핵심 주제다.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고 향락주의, 인본주의를 배격하며 진리에 근거한 재림의 소망을 갖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관계적 지식을 넘어 지적 동의와 신적 성품에 풍성히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명과 경건으로 향하는 성도의 삶의 근본 됨을 분명히 해야 한다. 2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아는 것에 기초함을 명시한 다음, 그 지식대로 살아가라고 요청한다. 하나님께서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음을 안다면(3),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8가지 덕목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다. 믿음이란 선물로 시작해서 사랑이란 열매를 목표로 자라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3 5-7절에 제시된 미덕이 성도의 삶에 가득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목적, 성도를 택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은 바로 부르심대로 살아갈 때 맺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열매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우리는 어떤 유혹에도 실족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최종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10-11). 주님, 거짓 가르침이 교회를 공격하는 이 때, 우릴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영광과 덕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 감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 맺게 하소서!

2024.6.10 (월) 벧전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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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편지의 결론 부분에 이르러 마지막 경고와 명령, 그리고 마음을 담은 간절한 당부로, 흩어진 나그네와 같은 성도들을 격려하며 이 편지를 마무리한다.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와 성도는 어떻게 이 환난의 때를 통과할 수 있을까? 1 이미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근신하여 깨어 있으라는 명령을 했다(8; 1:18). 으르렁대는 사자같이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려고 다닌다고 묘사한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위험과 긴급성을 알려준다. 그러니 우리는 끝까지 마음을 놓지 말고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 마귀의 목적은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의 염려를 대신 떠안으신다(6-7). 구원의 확신이 흔들려고 공격하는 사탄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2 베드로 사도는 굳센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한다.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란 말이 있다. 마귀를 대적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굳건한 믿음을 가지란 뜻이다. 우린 고난 속에서도 은혜의 하나님 안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릴 구원하시려 부르시고,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시다. 당연히 성도들을 견고하게 해 주실 분이다. 3 문안하는 부분에서 베드로는 바울과 1차 선교여행 중에 중도 포기했던 마가 요한의 이름이 거론된다. 영적 아들처럼 든든한 존재로 베드로 옆에 있었다는 사실은 은혜와 감동을 준다. 잠시 흔들렸지만 마가는 다시 일어나 끝까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다. 이 서신서를 읽는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주의 평강 가운데 거하였듯이 우리도 그런 믿음으로 굳게 서자. 주님, 은혜와 평강의 하나님이 주신 산 소망으로 인해 영원한 영광과 상급을 바라보며 이 땅을 기쁘게 걸어가게 하소서!

2024.6.8 (토) 벧전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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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은 충분히 기쁘게 이길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뭘까? 1 살아가면서 성도는 믿음 때문에 비난과 억압과 폭력을 당하고 절망할 수 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 고난이 오히려 복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주님도 십자가 고통을 당하셨고 하나님께 속했던 예언자들 역시 말씀을 선포하다가 고난과 때로는 목숨을 잃었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 인정받는 것보다 복되고 영광스런 것은 없을 것이다. 편안함에 길들여지지 말고, 믿음의 선배들처럼 고난도 불사했던 신앙을 사모하며 기도해야 할 때이다. 2 하나님은 죄를 단죄하시는 심판자시다. 아무리 세상에서 의인이라 칭송받아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한낱 죄인에 불과하다. 하물며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무섭고 엄중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정죄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심판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지금 받는 고난은 도리어 기쁨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실 것이고, 위로하시고 합당한 상급을 주실 것이다. 주님, 여러 모양으로 고난을 당해도 우릴 구원하신 은혜를 돌아보며 고난이 오히려 기쁨이요, 현재의 역경을 넉넉히 이길 힘이 되실 주를 더욱 의지하게 하소서!

2024.6.7 (금) 벧전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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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7 (금) 벧전4:1-11 베드로는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 살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이 책무를 통해 박해와 고난을 오히려 죄를 극복하는 도구로 바꾸는 태도를 배우게 된다. 1 ‘그러므로’로 이어지는 4:1을 통해 베드로는 앞 문단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더러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갑옷으로 삼도록 권면한다. 주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아 우리의 죄가 그쳤기 때문이다. 이는 로마서6:8-12에서 바울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살게 된 구원받은 자라는 신분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죄를 피하는 선택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할 수 있다. 2 구원을 통해 우리가 가진 새로운 삶의 특권은 바로 ‘자유’다.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자유가 이제 우리에게 있다(2). 세상의 방식이 아닌 천국 백성의 방식대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 잠깐 즐기는 방탕은 결국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반면 주어진 자유로 죄를 거절하고 경건하게 살 때는 구원의 온전함을 경험하게 된다. 종말론적 소망을 갖고 환난의 시기를 지난다면 반드시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3 4장 초반부에서 말한 모든 내용을 종합하며, 베드로는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 봉사할 것을 명한다. 농부기 농사의 때를 알듯, 환난과 핍박, 고난이 거세지는 것을 보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옴을 안다. 우린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기쁘게 서로 대접하고, 은사를 통해 서로 봉사해야 한다 (8-10). 자기 논리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원 삼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청지기직은 영광스런 특권임을 알아 이 마지막 때에 더욱 마음을 다해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2024.6.6 (목) 벧전3: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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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때문에 받는 고난은 복음을 전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 비난, 오해를 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1 공산주의 국가와 이슬람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나라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주변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 직장 동료들로부터 소외 당하거나 박해 받는 일이 있다. 적당히 신앙생활 할 때는 경험하지 않아도 될 미움과 고난이 있다. 이때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옥에 갇히고 위협을 당했을 때 그것을 자신들의 신앙을 설명할 기회로 삼았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전혀 없다면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2 세상에서 들려오는 기독교 박해 소식은 충분히 우리를 회의에 빠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낙담하기에 앞에서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해 승리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살리셨고,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조항들을 무효화시키셨고 악한 영적 권세와 영들의 세력을 소탕하셨다. 그렇기에 악이 판치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승리를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봐야 한다. 주님은 모진 십자가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비난하는 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자.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박해당하고 있는 주의 백성을 위해 더욱 간절히 중보기도 하자. 주님, 어떤 믿음의 시련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견디며 최후 승리를 믿게 하시고, 믿음의 이유를 믿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준비하게 하소서!

2024.6.5 (수) 벧전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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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실천은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소인 가정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부가 그리스도인다운 역할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부부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아내와 남편의 거룩한 역할은 과연 어떤 것일까? 1 과거나 지금이나 계속 번창해 가는 사업이 사람의 외모를 치장하는 뷰티와 패션 산업이다. 베드로 사도는 외모지상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아내들에게 세상 여자들처럼 외모에 대한 관심이 아닌 보이지 않는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가르친다. 온유하고 정숙하며 남편에게 순종하는 겸손한 성품이 진정 값진 아름다움이란 것이다. 그는 성경의 본보기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예로 들었다. 성경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중요하다. 2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남편들이 아내를 보호하고 가정의 머리로서 기도할 것을 권면한다. 이런 권면은 바울서신(딤전2:8; 엡5:25-30)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한다. 남자들은 분노하거나 다투지 말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는 것이다.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기도 생활을 유지하는 비결로 베드로는 무엇보다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내는 육체적으로 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보호해야 하고 영생의 선물을 함께 받은 지체로서 존중해야 한다. 남편에게 아내는 인생의 시련을 함께 헤쳐 나갈 동반자이며 함께 그리스도를 섬기는 동역자이다. 아내를 귀하게 여기며 사랑함이 곧 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 많은 가정이 상처 입고 깨지는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명하신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여 거룩한 성소인 가정을 더 든든히 세워 나가게 하소서!

2024.6.4 (화) 벧전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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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생활방식에 대해 따뜻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권면한다. 그것은 세상과 싸우기보다 세상을 얻는 것으로, 적극적이고 포용적인 삶의 방식이다. 1성도는 예수를 믿는 순간 신분과 정체성이 바뀐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임시 거처와 같다. 언젠가 돌아갈 고향을 고대하는 나그네인 것이다. 나그네는 하늘 시민으로 육체의 욕망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지 말고 거룩한 길을 걸어야 한다. 예전에 살던 그런 방식에서 벗어났음을 기억하고, 자유를 얻었으니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한다. 2 우리는 살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을 대하며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인이 바라봐야 할 대상은 사람들 대신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나무에 달리셨다 (사53:12; 롬7:4; 고후5:14-16; 갈2:19; 골2:20). 주님의 상처로 우리는 회복되었다. 우리를 돌보시는 목자가 우리를 위해 희생한 종이 되신 것이다. 우릴 대신해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가 마땅히 할 삶의 모범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인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을 맡길 목자이실 뿐만 아니라 삶의 기준으로 삼을 모범이시다. 주님, 하나님께 의탁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셨던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걸어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걸음 되게 하소서!

2024.6.3 (월) 벧전1:2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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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흩어진 지금의 상태가 오히려 영원한 가치를 상기시키는 하늘의 방편이며,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해 모범을 보이신 의도된 과정임을 알려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1 부르심대로 살아가야 할 성도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22). 거듭난 삶이기 때문이다. 그 삶은 영원한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다. 우리는 세상 영광에 굴하지 말고, 영영히 서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쇠하지 않고 굴하지 않는 성도로 살아가야 한다. 로마제국은 당시 철옹성처럼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잠깐의 영광에 우린 기대선 안 된다. 이 땅을 사는 나그네된 성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2 나그네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차원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자로, 그 신분에 맞게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22), 믿음을 방해하는 부정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1). 그리고 신생아가 어미의 젖을 찾듯 갈급한 심령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먹고 성숙한 자로 자라야 한다(2). 또한 그리스도께 날마다 나아가, 주께서 담당하셨던 제사장직을 본받아 이어 가야 한다(4-5). 우린 버릴 것을 버리고,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을 구할 때, 최종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3 그리스도는 성도의 삶에 가장 위대한 모범이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으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퉁잇돌로 사셨다. 성도의 삶이 마치 버림받은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과정에서 성도들을 중요한 일에 긴요하게 사용하실 것이다(6-8). 열방이 하나님께 나아갈 교량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으니, 우리를 불러 구원하신 하나님의 부르심 따라 그리스도를 열심히 따라가자. 주님, 우리를 아무것도 없어 보이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 만드셨으니, 영원한 말씀을 자원 삼아, 그리스도를 열심히 좇아 이 땅을 사는 천국 백성으로 계속 붙들어 주소서!

2024.6.1 (토) 벧전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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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사는 ‘나그데’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기록했다. 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하는 그들에게 영원한 영광과 복이 약속되었음을 통해 하늘의 위로를 전한다. 1 믿는 자들에게 자기 인식과 정체성은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흩어져 사는 나그네’지만,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란 사실은 영원한 본향집이 하늘에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1, 2; 요17;16). 우리는 아브라함과 많은 믿음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시고 완공하실 하늘 도성을 바라보며 이 땅의 나그네 삶을 견디는 것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자의 인생이다(히11:8-10).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 집이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자. 2 우리는 산 소망이 있기에 나그네처럼 이방처럼 살지라도 얼마든지 기쁘게 견딜 수 있다. 이 세상의 소망, 권력이 아무리 크고 강대해 보여도 결국 썩고 더러워지고 쇠하여 버릴 이 땅의 유업일 뿐이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부활의 소망, 영원한 소망, 살아 있는 소망이다. 영원한 산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는 결국 하늘의 유얿을 이어 마지막 때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세상의 권력과 부를 좇지 말고, 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붙잡고 살아가자. 3 세상의 박해는 잠깐 근심이 되지만 오히려 영원한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통로가 된다(7). 그러니 이 땅에서 그 영광을 미리 누리며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자들이 바로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거절당하고 집도 없이 떠도는 것 같은 나그네의 삶을 경험한다 해도 우리가 누군지를 말씀에서 확인할 대 우리는 얼마든지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충분한 능력을 얻는다(8). 주님, 우리의 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붙잡고, 이 땅에 살지만 저 하늘에 속한 천국 시민임을 기억하며 지금의 고난을 얼마든지 통과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