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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ly, 2024

2024.7.26 (금) 왕하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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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6 (금) 왕하16:1-9 1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했지만 산당을 없애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스리는 동안 크게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 왕가의 신앙은 점점 무너져 가고, 아하스는 급기야 그 아버지 정도의 정직함도 유지하지 못했다(1-2). 우상숭배 뿐 아니라, 아들을 인신제사로 드리는 가증한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3-4; 대하28:24-26). 지금 당장 아무 일이 없다고 죄악의 근원을 내버려두면 결국 그로 인한 폐해는 절대 피할 수 없게 된다. 2 왕들이 다윗의 신앙전수에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은혜를 끊지 않으셨다.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을 맺고 유다를 공격했지만, 하나님은 유다를 지키실 것을 약속해 주신 말씀이 임마누엘 예언이다. (사7:2, 4, 14). 이처럼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끊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문제는 우리 인간의 불신앙, 불순종에서 비롯된다. 3 아람과 이스라엘이 쳐들어 왔을 때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의지할 만큼 신실하지도,담대하지도 않았다.하나님보다 앗수르를 의지하고, 앗수르 왕 티글랏 빌레셀에게 아람과 이스라엘의 배후를 칠 것을 요청했다. 이를 위해 성정과 왕궁에서 은금을 바쳤고(8), 앗수르가 아람을 공격했다. 아하스는 아마도 앗수르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7) 앗수르를 의지했고, 이는 자신뿐 아니라 온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님, 우상숭배로 인도하는 죄의 싹을 철저히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2024.7.25 (목) 왕하15: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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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5 (목) 왕하15:27-36 병을 낫게 하려면 근원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심각한 영적 질병에 걸린 상태였다. 바로 우상숭배가 근원이다. 근원을 제거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1 이스라엘 왕들은 역모로 왕이 되지만 자신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는다. 베가 역시 20년이란 꽤 긴 기간을 왕으로 있었지만 문제의 근원인 금송아지 숭배에서 떠나지 않았다. 베가는 므나헴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친 문제로 반감을 가진 세력을 정치적 배경으로 갖고 있었을 것이다(20). 자연히 반 앗수르 정책으로 왕권을 유지하려 했고, 그 결과 앗수르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결국 티글랏 빌레셀에 의해 이스라엘 영토 대부분이 점령당하고, 백성들이 끌려갔고, 친앗수르파 호세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30-31). 우상숭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아무리 정치 수완이 뛰어나고 국제정세를 잘 파악해도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2 남 유다 역시 성전이 아닌 산당에서 백성들이 제사하고 분향하는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32-35). 솔로몬 시절, 성전이 완공되면 산당을 없애야 했지만, 그러지 않아서 산당은 다윗 왕조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는 문제의 근원이 되고 말았다. 요담 역시 성전 보수로 신앙적 열심을 포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진 못했다. 결국 하나님은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를 사용하셔서 유다를 치셨다(37-38). 내면의 죄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거나 성경 공부에 열심을 내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고통이 따른다 해도 죄악의 환부를 도려내야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 주님,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을 철저히 회개함으로 주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회복의 은혜를 얻게 하소서!

2024.7.24 (수) 왕하15: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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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4 (수) 왕하15:13-26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는 여로보암2세 치하의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보내고 있을 때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실 것을 경고했다. 결국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두 예언자의 예언처럼 그대로 실현되고 말았다. 1 살룸은 예후 왕조를 끝내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로 재위 기간은 겨우 한 달에 불과했다. 므나헴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시므리에게 일어났던 일과 다른 바가 없다(16; 왕상16:15). 게다가 살룸 때문에 사마리아성에 살던 백성까지 므나헴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살룸 때문에 사마리아 백성들까지 죽음으로 내몰렸다. 살룸이 스가랴를 죽이고, 므나헴이 살룸을 죽이는 정변 가운데 북 이스라엘은 점점 멸망으로 치닫는다. 2 살룸을 죽이고 왕이 된 므나헴은 10년간 통치했지만 우상을 숭배했던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행위다. 오히려 므나헴은 앗수르 왕 불(Tiglath-Pileser III)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성을 수탈했다. 금송아지를 숭배할수록 나라는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은 수탈당할 뿐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번영의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빈궁한 삶만 주어질 뿐이다. 우리 인생을 견고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3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도 이전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나 바아사의 아들 엘라의 통치처림 신하의 반역으로 죽임 당하고 왕조가 막을 끝났던 것처럼, 2년을 재위하고 죽임을 당했다(22-23; 왕상15;25; 16:8). 호위병도 있고, 안전한 곳으로 피했지만 결국 죽임 당한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 않으시면 그 어떤 것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복을 바라며 금송아지를 섬겼지만 오히려 나라를 빈궁하게 만들고 통치권을 위태롭게 했을 뿐이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의 결말은 결국 다 똑같다. 파멸과 영원한 형벌 뿐이다. 주님,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신 주님만이 온전한 통치자이심을 기억하고, 저희 믿음...

2024.7.23 (화) 왕하1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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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3 (화) 왕하15:1-12 아직 앗수르가 발흥하기 전까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나름대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잠깐의 평화이자 마지막 회개의 기회였다. 아쉽게도 왕들은 그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했고, 결국 두 왕국은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1 북쪽 여로보암2세나 남왕국 아사랴(웃시야)는 모두 통치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 그러나 아사랴는 다윗의 길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고, 산당을 없애지 못한 선왕들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했다. 열왕기 저자는 나라의 번영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그 왕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정직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철저히 순종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2 역대기를 보면 아사랴가 직접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 했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나병이 걸렸는데(5; 대하26:16-19), 이는 국가적 번영에 도취되어 영적교만에 빠짐으로, 성전에서 자기 권위를 드러내며 자신을 솔로몬에 견주려다가 나병환자가 된 것이다. 어떤 인간적 승리나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과 진실함, 그리고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했었다. 자신의 사명을 모르면 자신을 높이게 되고 결국 추락하게 된다. 3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2세, 그리고 스가랴까지 이어진 예후 왕조는 북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긴 왕조였다. 하지만 갑자기 망해 버렸다(10). 그러나 호세아와 아모스는 여로보암2세 시대에 이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리시리라고 경고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했으며, 이스라엘의 멸망은 상당기간 전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또한 예후에게 약속하신 기간이 끝났기에 심판이 미뤄질 이유도 없었다(12; 10:30).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 심판은 도적처럼 임한다. 주님, 평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하는 부분은 없는지 늘 깨어 돌아보게 하시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때일수록 주의 말씀에 더 귀 기울이게 하소서!

2024.7.22 (월) 왕하14: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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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2 (월) 왕하14:17-29 우리가 사는 현실은 매번 흑백논리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악한 사람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저지른 일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기도 한다. 본문은 하나님이 부족한 자의 잘못을 메우시고, 악인을 사용해 나라를 번영케 하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1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 의해 포로가 되고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음에도 요아스보다 15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그의 말년과 최후 역시 ‘짝퉁 다윗’의 면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듯, 그 역시 반역을 피해 도망했고, 그의 최후는 다윗이 아니라 아버지 요아스와 같았다(19-20). 그러나 하나님은 아마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왕조가 무너지지 않게 지키셨고, 그의 아들 아사랴(웃시야, 15:13)가 왕이 되었다. 아사랴는 엘랏(엘롯)을 건축하며 통치를 이어 갔다(21-22; 왕상9:26). 남 유다 왕들이 북 이스라엘 왕들보다 크게 나은 점이 없어도, 하나님은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을 기억하셨기에 그들을 지키시고 그 왕조를 이어 가게 하셨다 2 북 이스라엘에서는 요아스의 뒤를 이어 여로보암2세가 즉위해 41년이란 긴 기간을 다스렸다. 요나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대로 여로보암2세가 다스리는 기간에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 중흥기를 맞게 하셨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여로보암2세는 유능한 왕이었다. 아직 앗수르가 발흥하기 전이어서 주위 나라들 중에는 이스라엘에 필적할 나라가 없었다. 그럼에도 여로보암2세는 하나님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 초대왕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24). 이스라엘의 중흥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26-27).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력했는지 모르나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영적 암흑기였다. 성도는 세상의 모든 평가와 달리 하나님의 심판이 따름을 기억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 결과가 좋다고 악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눈에 ...

2024.7.20 (토) 왕하13: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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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0 (토) 왕하13:14-25 생과 사의 문제는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영원한 숙제 같은 것이다. 그래서 걱정되고 두려워한다. 본문은 죽어 가는 엘리사와 요아스 왕의 삶을 대비한다. 죽음을 초월하는 부활의 생명력을 가진 영생과 살았으니 죽음으로 치닫는 무기력한 인생. 1 엘리사는 중한 질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음에도 생명의 불이 사그라들지 않은 모습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엘리사는 아람의 침입으로 풍전등화 같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염려하여 요아스왕에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한다. 또 하나님의 명령에 형식적으로 순종하는 왕을 책망한다(19). 엘리사는 죽음 앞에 결코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욱 생명력 있는 넘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 비결이? 그는 스승 엘리야의 승천을 목격한 바 있다. 인생의 끝이 죽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 직전에 있던 모세 역시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아지 않았따(신34:7).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선물로 반은 영생을 신실하게 살아 내기를 워하신다. 2 여호아하스 때 아람의 침공으로 북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보잘것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아람의 침공을 받았고, 정신적 지주가 되는 선지자 엘리사도 곧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었으니 요아스는 얼마나 공황에 빠졌을까? 불행 중 다행은 요아스가 엘리사를 찾았고 그의 말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순종은 형식적인 순종에 불과했다(18). 요아스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사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화려해 보여도 죽어가는 삶,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삶이 아닌 어느 때든지 주님과 연결되어 생기 있고 활력있는 영생을 누려야 한다. 주여, 주님 안에서 죽음 이후 부활의 삶을 소망하며 매 순간 영원한 값어치를 가진 하나님 나라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게 하소서!

2024.7.19 (금) 왕하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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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9 (금) 왕하13:1-13 북 이스라엘의 11, 12대 왕인 여호아하스와 그의 아들 요아스는 계속 여러보암의 길을 걸으며 죄악을 저질렀다. 본인들이 자초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두 왕의 실패와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심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1 하나님이 죄악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내버려두시는 경우(롬1:24)도 있고, 죄악 중에 있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도 있다(4). 어떤 경우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를 떠나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다. 아합 가문을 말살시킨 예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고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 아들 여호아하스도 아람 왕때문에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4-5). 그러나 그 또한 여러보암의 길로 갔다. 하나님의 은혜를 일회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원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변함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은혜를 곱씹으면 더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매일 새로운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을 사탄은 결코 넘어뜨리지 못한다. 2 여호아하스와 요아스의 삶의 궤정에는 분명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시간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여로보암의 길을 걸으며 죄악에서 떠나지 않았다(2,11). 자신들의 아버지의 성공과 실패를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그럼에도 이들 역시 죄악의 길을 걸어갔다. ‘사람의 인정’을 추구하며 살면 결국 죄악의 길로 가게 된다. 할아버지 예후 때부터 반복된 죄를 짓게 된 것이다. 반복되는 죄악은 스스로 끊어 낼 수 없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강력한 죄의 힘을 거부하고 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님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주님,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며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맛보고 성령 하나님께 인도 받아 반...

2024.7.18 (목) 왕하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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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8 (목) 왕하12:9-21 개혁을 주도하고 나서는 것은 쉽지만, 자신이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을까? 1 지금까지는 성전으로 들어오는 헌물 창구가 통일되지 않아 제사장들이 각자 헌금을 받고, 각 제사자들의 판단으로 제일 급한 일에 재정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되면 힘을 합쳐 이뤄야 할 일들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마련이다. 이제는 성전 수리를 위해 드려진 은이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게 함으로 모든 일이 잘 진행되어갔다. 당연한 이치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지켜지지 않았기에 성정 보수가 늦춰진 것이었다. 아마도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정직히 행한 왕으로 요아스가 평가받는 근거가 되었다. 2아람의 하사엘이 남 유다까지 위협하며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왔다. 요아스는 당연히 유다를 지키실 하나님을 믿고 하사엘을 대적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성전에 바쳐진 성물과 성전의 곳간과 왕궁의 금을 다 하사엘에게 바침으로 전쟁을 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위기 앞에서 그는 아달랴처럼 성전을 수탈했다(17-18). 이로 인해 그가 이뤘던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대제사장 여호야가 사후에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된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요아스에게 경고하고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다가 요아스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한다(대하24:18, 21). 성전을 수탈하고 우상을 섬기다가 암살당하고 말았다. 초심을 유지하지 못하면 아무리 과거에 올바른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주님, 개혁의 주체였으나 개혁의 대상으로 추락하고 만 사람들의 길을 걷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게 하소서!

2024.7.17 (수) 왕하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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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7 (수) 왕하12:1-8 오늘 본문, 요아스 때 성전을 수리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 교회와 신앙을 바로잡으려 할 때 그 개혁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1 요아스는 7세에 즉위해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는 동안에는 정직했지만, 여호야다의 사후에 심각하게 부패했다(2; 대하24:15-21). 산당 종교를 없애지는 못했던 것이다. 예후가 북 이스라엘의 아합 집안을 멸절시켰지만, 여로보암부터 내려온 금송아지 숭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듯(10:29), 아합의 딸 아달랴를 처단한 유다 역시 산당 종교를 제거하지 못했다. 죄악의 뿌리는 이처럼 견고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어 세상과 타협할 때는 절대로 죄악을 이길 수 없다. 2 어린 요아스에게는 아달랴에 의해 약탈당한 성전 보수는 당연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보수의 명령은 23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 그 이유야 어떠하든 제사장들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뭔가를 바꾸고 발전시키기보다는 기존의 질서 안에 머물려고 한다. 결국 개혁을 위해선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세워져야 한다. 3 여호야다를 비롯한 제사장들은 요아스를 왕으로 옹립해 다윗 왕조를 재건한 종교개혁자들이었다. 하지만 23년이 흘러 그들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고, 그 개혁의 주체는 바로 자신들이 세운 왕 요야스였다(7). 다행히 제사장들은 왕 요아스의 책망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정해 자신들의 소관이었던 성전에 헌물 관리와 성전 보수하는 역할을 내려놓는 데 동의했다. 이를 보면서, 제사장은 자기가 세운 어린 왕에 의해 책망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바로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주님, 끊임없이 내 안에 있는 문제를 인식하고 바로잡아 가는 깨어 있는 공동체로 저희를 인도하여 주소서!

2024.7.16 (화) 왕하11: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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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6 (화) 왕하11:13-21 성도인 우리가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힘있게 살기 원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가 새롭게 해야 할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특징은 무엇일까? 1 요하스가 유다 왕이 된 후에 여호야다는 가장 먼저 유다 백성을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했다. 왕이 하나님과, 왕이 백성이 언약을 새롭게 했다. 나이 어린 왕이 세워지면 왕을 도울 내각이며 여러가지 안정을 위한 제도가 필요하지만, 여호야다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모든 문제 해결은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삶의 우선순위에 놓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최우선인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회복될 때 온갖 문제를 해결할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된다. 2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길 것을 다짐했다. 바알 신전을 허물고 그 제단과 우상을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바알 숭배자 맛단을 제단 앞에서 처단했다. 우상숭배는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우리 시대는 대다수가 돈을 사랑하고 외모를 중시하고 성공과 쾌락을 따라 산다.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세속의 가치에 굴복하지 않는 자들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하는 자들이다. 유다의 우상숭배를 뿌리 뽑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여호야다처럼, 우리도 하나님만을 올곧게 예배하려면 이 시대의 세속적 가치를 단호히 거절하는 결단과 헌신이 필요하다. 고난과 박해를 피할 수 없지만, 온전한 예배자로 선 자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영원한 기쁨과 평안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주님, 언약 백성으로 마땅히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가정과 일터에서 순종으로 하나님을 높이게 하소서!

2024.7.15 (월) 왕하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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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5 (월) 왕하11:1-12 우리에게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섭리와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다. 아합의 딸 아달랴가 유다를 장악했던 영적 암흑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제사장 여호야다를 사용하신다. 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든 이유는? 1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남 유다는 큰 혼란에 빠졌다. 아달랴는 왕권을 장악하고는 자신의 손주들을 포함 왕위를 위협할 만한 사람들 모두를 학살했다. 그리고 바울 숭배를 더욱더 퍼뜨렸다. 이런 참담한 국가적 위기 때에 제사장 여호야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린 왕자를 은밀히 보호하면서 바알숭배에 빠져 있던 아달랴와 그 무리를 제거하고 왕권을 다시 세울 때를 기다렸다. 영적으로 깨어 있던 여호야다를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유다를 그녀의 폭정에서 구하셨다. 여호야다는 환경을 탓하거나 원망하면서 좌절하지 않았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땅에 새롭고 놀라운 일을 이런 사람들을 통해 행하고 계신다. 2 권력자를 바꾸는 일에는 항상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위험이 따른다. 여호야다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백부장들을 불러 모으고는, 다윗 왕조의 회복을 위해 협력할 것과 완수될 때까지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하게 했다. 이들은 여호야다의 명령에 따라 성전 호위병들을 배치했고, 안식일에 성전에 모인 백성들 앞에서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옹립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위해 헌신한 자들을 사용하시고, 이들을 통해 놀라운 회복과 새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땅 구석구석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실 것이다. 이 영광스런 일에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된 자들을 찾으실 때 내가 그 무리들 ...

2024.7.13 (토) 왕하1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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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3 (토) 왕하10:12-27 아합 가문과 바알 숭배자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처단이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었다. 긑까지 하나님을 등진 자들의 최후를 보며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으로 민감해야 함을 되돌아보게 된다. 1 예후와 그 일행은 사마리아로 가다가 유다 왕 아하시야의 친족들로 모두 바알을 숭배하던 자들로 여겨진다. 예후는 이들을 사로잡아 모두 도륙한다. 이어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났다. 그는 하나님을 충실히 따르고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으로(렘35:6-7),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의 모범이 되었다(렘35:18-19). 예후는 그가 자신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음을 확인하고 함께 동역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도착해 남아있던 아합의 가족들을 진멸했다. 엘리야에게 이르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누구와 어울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만약 주님이 우리에게 “네 마음도 진실하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주님을 향해 변함없이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언제나 주님 손 놓지 말고 동행하는 증인이 되자. 2 이제 예후는 바알 잔당들의 소탕작전에 돌입한다. 자신을 바알 숭배자로 위장해서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제사장을 빠짐없이 바알 신당으로 불러 모았다. 이들을 쉽게 구별하기 위해 바알의 예복을 입히고(22), 여호와의 종을 대피시키고(23), 군사들에게 명령해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진멸하고, 우상을 불사르고 산당을 헐어서 가장 경멸스런 변소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자신이 섬기는 대상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 성도라 하면서 물질과 성공이란 이름을 가진 바알 숭배자로 살아가는 자들을 본다. 절대로 물질이 우리의 우상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에 영적으로 민감한 성도가 되자. 주님, 진실한 마음을 주셔서, 항상 거룩한 무리와 함께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이 되게 하소서!

2024.7.12 (금) 왕하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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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2 (금) 왕하10:1-11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신다. 아합 가문은 음행과 바알 숭배의 죄악을 온 이스라엘에 퍼뜨린 죄를 하나님은 예후에게 아합 가문을 단죄해 이스라엘의 죄를 제거할 것을 명하셨다. 우리는 죄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바른가? 1 예후는 아합 가문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지체 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이세벨을 처단한 다음, 아합의 아들들 70명을 제거했다. 사마리아에 있던 고관과 장로와 아합의 아들들의 교육을 맡은 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들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예후는 자신의 어떤 정치적인 상황과 조건을 따지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악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예후처럼 지체 없이 죄를 제거해야 한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말씀에 즉시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신다. 2 아합은 아합의 아들들 뿐만 아니라 아합 가문의 지도자와 측근 그리고 제사장들까지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제거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수행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죄를 온전히 버리지 않으면 그 죄가 언제든 우리 삶에 악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뿌리 봅기 원하시는 죄들에 대해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남겨 놓은 작은 죄들이 우리를 영적으로 부패시킨다는 경계심을 갖고 철저히 죄악을 제거하자. 주 앞에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죄라도 우리를 얼마든지 부패시킬 수 있음을 명심하고 죄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소서!

2024.7.11 (목) 왕하9:2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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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1 (목) 왕하9:27-37 이제 예후의 칼날은 유다 왕 아하시야를 향하고, 이세벨 역시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이는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미 오래전에 말씀하셨던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실패하지 않고, 그분의 목적이 꼭 성취된다. 1 유다 왕 아하시야가 예후의 부하들에 의해 부상을 입고, 결국 므깃도까지 도망가다가 죽었다. 그가 사력을 다해 도앙갔지만 끝내 잡혔고 죽음으로 죗값을 치렀다. 그가 아합 가문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고 북 왕국의 요람과 타협하고, 요람의 악한 모친인 아달랴의 계략을 받아들여 결국 죽임 당한 것을 볼 때, 이것 역시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이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 우리의 소망은 세상을 구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에 기대는 것 이엔 없다. 우리의 모든 죄 짐을 대신 지신 예수님을 높이자. 2 예후가 으스르엘에 오자 이세벨은 기다렸다는 듯 화장과 치장을 하고 창에서 내려다본다. 자신의 최후가 가까웠음을 알고도 끝까지 고개를 쳐드는 모양새다. 예후를 향해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라고 소리친다. 약 50년 전 시므리는 엘라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단 7일 동안 통치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인물이다. 예후의 반역이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이렇게 이세벨이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세벨은 죽임을 당했고, 예후는 말을 타고 그녀의 죽은 몸을 여러 번 짓밟았다(33-34). 승리의 만찬 후에 문득 이세벨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내라고 명했는데,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든 들개로 인해 시신이 훼손된 상태였다. 엘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왕상21:23-24).주님의 때에, 상상치 못할 방법으로 이루실 주의 말씀을 항상 신뢰하자. 주님, 말씀하시는 것을 꼭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고 경건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2024.7.10 (수) 왕하9: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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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0 (수) 왕하9:14-26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는 요람왕을 배반해 왕위를 찬탈하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 약속은 더딘 것처럼 보여도 결국 이뤄진다.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약속이 오히려 믿는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가 됨을 다시 확인한다. 1 아합의 집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는 도구로 하나님은 예후를 택하셨다. 이스라엘의 요람왕은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치료차 이스르엘에 머물고 있었다. 악한 아합 집안의 사위였던 유다 왕 아하시야까지 요람을 병문안차 온 상황이었다. 예후는 무서운 속도로 부하들을 이끌고 길르앗 라못에서 이스르엘까지의 50마일을 달렸다. 이렇듯 달려오는 예후와 뒤에 이어질 엄혹한 일들을 두 왕들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 간에 행한 것을 따라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고후5:10). 2 예후의 무리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전쟁의 의도를 가진 자인지 묻는 말에 예후는 자신을 뒤따르라고 말한다. 이상한 징후를 느낀 요람이 병거를 타고 나타남으로 예후의 반역을 훨씬 더 쉽게 실행된다. ‘평안’을 묻는 요람에게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마술이 이렇게 많은데 어찌 평안이 있겠느냐’가 그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도망가던 요람은 화살에 죽임을 당한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합 집에 재앙이 내릴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대로 성취되었다(왕상21:18-29). 하나님의 약속은 악한 일을 행한 자에게는 불같은 심판이며, 하나님을 바라는 자에게는 온전한 구원이 된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 바라며 소망하는 마음으로 기대하자. 주님,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한 자에게 영생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 앞에 항상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4.7.9 (화) 왕하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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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9 (화) 왕하9:1-13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셔서 이세벨과 아합 가문의 남은 자들을 멸하시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위반하고, 그분의 백성을 타락시키며, 하나님의 사람들은 탄압한 세력의 말로를 생생하게 목격하다.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 1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시는 일은 정당한 과정이다. 먼저 예후를 왕으로 세우셨다. 본문이 여로보암이나 바아사의 패망을 언급하긴 하지만, 예후의 경우처럼 자세히 왕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 적이 없었다. 예후가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주변인들에게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나팔을 불어 공공에 선포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열심을 내야 한다. 하나님이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매우 열심히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의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지하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어떻게 지금 쓰임 받고 있는가? 2 하나님은 매우 열심히 행하신다는 사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저항할 수 없다. 엘리사의 위험한 명령을 젊은 선지자는 그대로 실행했다. 예후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순간 저항하지 않았다. 그가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고 공공에 알려질 때 사람들도 저항하지 않았다. 군대 장관들을 봐도 예후를 인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과정에서 앞서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의 공의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겸손하게 내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켜야 하며, 그분의 부르심에 겸손히 순종해야 한다. 주님,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당하게 주의 명령을 전하고 따름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역사가 우리 시대에도 펼쳐지게 하소서!

2024.7.8 (월) 왕하8: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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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8 (월) 왕하8:16-29 남 유다의 백성도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져들어 갔다. 유다왕 여호람이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한 후, 바알을 섬기는 이방종교가 유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유다의 영적반역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음에도 하나님으 유다를 당장 진멸하지 않으셨다. 왜 유다의 멸망을 유보하셨을까? 1 여호람과 그의 아들 아하시야는 북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들의 아내요 어머니인 아달랴는 아합의 딸로 우상숭배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배신한 유다는 국력이 쇠락해 가는 대가를 치렀다. 에돔이 유다에 반기를 들었다. 여호람이 병거를 이끌고 에돔을 치러 갔지만 오히려 에돔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립나 역시 유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바로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높이셔야 높아진다. 우리가 누리는 형통함 역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결과다. 우리가 주의 뜻에 불순종하는 길로 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함과 영혼의 평강은 점차 약화된다. 인생의 여러 어려운 문제들은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시간이다. 놓쳐선 안 된다. 2 하나님이 당신을 배반한 유다를 징계하셨으나 진멸하지는 않으심은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일찍이 하나님은 다윗과 그 자손에게 다윗 혈통의 영원한 왕조를 약속하셨다. 유다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거역했음에도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철저히 지키셨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바알숭배가 가득했던 남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할 소명이 있다. 하지만 때로 화려한 성공과 풍요를 동경하고, 세상에 취해 방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축복 속에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우리의 허물을 변치 않는 자비로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상을 버리자.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징계하셨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며 섬기자. 주님,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다고 세속의 쾌락과 만족을 탐하...

2024.7.6 (토) 왕하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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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6 (토) 왕하8:1-6 신앙은 기대하는 것이다. 열왕기하8장은 3 사건을 소개하면서 엘리사의 사역을 일단락 시킨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여인이 다시금 기업을 되돌려 받는 사건을 통해, 우리는 성도를 환난에서 구하시고 생명을 잇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발견한다. 1 열왕기의 기록에서 연약한 여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함을 통해 회복되지만,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했던 왕들은 모두 쇠퇴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은 아들이 다시 살게 되는 은혜를 받았던 수넴 여인이 하나님의 기근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 기근은 오므리 왕가의 우상숭배, 특히 아합과 이세벨 같은 악한 인물들이 행한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런 심판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연약한 여인을 구원하신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기억하자. 세상에 만연한 악 가운데서도 건짐을 받는 길은 구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2.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 수넴 여인은 자기 집과 토지를 되찾기 위해 왕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여인이 직접 나선 것을 보아 4장 사건 때 살아 있던 늙은 남편이 죽었음을 짐작케 한다. 당시 사회구조에서 7년을 비운 땅을 과부가 홀로 되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인이 사정을 읍소하기 위해 왕을 찾았을 때 마침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왕 앞에 있어 놀랍게도 영영 잃어버릴 뻔했던 기업과 그간의 소출 모두를 이 여인은 되찾게 된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어떤 위기에 처하든 그때 우리가 기억하고 기대해야 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지금도 수넴 여인처럼 주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주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주를 믿는 믿음으로 주의 은혜를 맛보게 하소서!

2024.7.5 (금) 왕하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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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5 (금) 왕하7:11-20 사마리아 백성은 아람 군대가 두고 간 물건으로 굶주림을 해결했다. 그런데 왕의 장관 한 사람만 모두가 누리는 풍요를 맛보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한 채 비극을 맞이했을까? 1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근을 놀랍게 해결하실 것이란 말씀을 선포하자 왕의 장관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며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아예 믿지 않았던 것이다.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 이후로 이스라엘은 계속 우상숭배애 빠져 있었기에 이 사람도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간단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파멸의 길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풍성한 은혜의 길임을 말씀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는 자들을 위해 마련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한 약속을 믿어야 한다. 2 엘리사의 예언을 두고 왕의 신하는 즉각 반발하며,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를 여신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며 그의 말을 일축했다. 하지만 엘리사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엘리사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 입술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 왕의 신하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과 조롱의 말은 심각한 죄가 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히심을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왕에게 신임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하나니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 갖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기를 애쓰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주님,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식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하소서!

2024.7.4 (목) 왕하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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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4 (목) 왕하7:3-10 본문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들은 그들이 보고 알게 된 사실을 전함으로 침묵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을 준다.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메시지는 뭘까? 바로 복음의 진리다. 1 당시 나병환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던 존재였기에 기근 중에 이들을 돌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죽음을 피할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아람 군대로 가서 항복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아람군들이 주둔했던 곳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쫓아내신 것이다(6). 그리하여 이들은 성으로 달려가 적들이 사라졌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을까?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살 소망이 없는 죄인들에게 우리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영생의 기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2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은 아람 군대의 진영에서 풍성한 음식과 보화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눈 앞의 금은보화를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런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백성에게 죄를 짓는 셈임을 깨닫는다. 순간 그들은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겼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 어떤 결핍도 채움을 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 안에 있는 부요함과 풍요로움을 경험케 하셨다. 우리도 나병환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부요한 복을 이웃에게 지체 없이 전해 줘야 한다. 주님, 나병환자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즉시 움직인 것처럼 나도 속히 순종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2024.7.3 (수) 왕하6: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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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3 (수) 왕하6:16-7:2 우리 인생에 얼마든지 기근 같은 어려운 시기가 찾아올 수 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백성이 취해야 할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일까?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극한 고통을 경험했다. 이들의 모습에서 우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1벤하닷왕은 온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다. 성은 이제 아람 군대에게 포위되고 곧 멸망할 운명 앞에 있다. 기근이 심하고 전쟁으로 인해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급기아 서로의 자녀를 잡아먹으며 연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왕은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 아합의 아들 여호람 왕은 하나님께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길 원하신다. 우리의 궁핌함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로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사람 앞에 보여주는 신앙(30)이 아니라, 온전히 나아가는 회개와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성이 절대로 필요하다. 2 엘리사를 죽이려고 왕은 사람을 보낸다. 신하가 와서 엘리사에게 ‘이 모든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왔다. 더 이상 여호와를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는 식의 왕의 말을 전한다. 계속해서 더욱 우상숭배를 하겠다는 말이다. 성이 포위되고 끔찍한 일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을 본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 엘리사가 성문 안의 상황이 24시간 안에 회복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믿지 않는다. 귀를 막고 듣지 않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는 무도한 인생의 종말은 뻔하다.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보고 절망하면서 믿음 없는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봐야 한다. 주님, 온 우주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라는 것을 다 내려놓고, 주만 의지함으로 기적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소서!

2024.7.2 (화) 왕하6: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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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안한 환경이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이 변함없는 평안과 승리를 경험할까? 1 아람 왕은 모든 비밀을 꿰뚫어 보는 선지자 엘리사의 존재를 알고 두려움을 느꼈다. 이에 선지자를 제거할 계획으로 군사를 보내 선지자가 사는 성을 포위했다. 아침에 엘리사의 종이 이 광경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을 보고 그의 영적 눈이 열리도록 엘리사가 기도했더니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진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언제나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다. 믿음의 눈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적 세계의 비밀을 새롭게 보게 하는 힘이 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도 평안과 승리를 누릴 수 있다. 2 엘리사는 아람 군대의 공격에 맞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적들은 곧 방향 감각을 잃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에 엘리사는 그들을 사마리아로 끌어들였다. 뒤늣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람 군대는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들을 죽이지 않고 마치 자신들의 나라에 찾아온 손님으로 대접했다.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신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로 아람은 이스라엘 땅을 다시는 침공하지 못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 앞에 경외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두려움과 염려를 주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예수의 제자의 도리임을 기억하자. 주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주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나의 인생이 주의 도움과 임재로 가득차게 하옵소서!

2024.7.1 (월) 왕하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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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 (월) 왕하6:1-14 하나님은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일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또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해야 함을 오늘 본문은 가르친다. 1 엘리사 지도하에 있는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 이제 좀 더 큰 새로운 처소가 필요했다. 그런데 엘리사와 함께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던 중 한 사람이 쇠도끼를 물에 빠뜨리게 되었다. 그가 크게 탄식하는 가운데,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지니 쇠도끼가 떠오르는 기적이 일어난다. 중력의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 법칙을 거스르는 커다란 기적으로도 응답하셨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백성이 취해야 할 믿음의 자세를 본문은 보여 준다. 일상의 사건을 잊지 못할 기적의 순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우리의 작은 한숨에도 응답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2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진지를 정하고 구축하려 할 때마다 이스라엘 왕이 사람을 보내 미리 방비하는 일이 반복되어 아람 왕이 절망에 빠졌다. 내부에 첩자가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11). 이때 한 신하를 통해 선지자 엘리사가 신비한 능력이 있어 왕의 침실에서 하는 말까지 모두 듣고 대비하게 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러나 그는 엘리사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사를 잡아들일 계획을 세워 많은 군대를 동원해서 그가 있다는 도단 성읍을 포위했다(12-14). 이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며, 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뢰하는 자를 하나님은 끝까지 보호하심을 몰랐던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는 능력으로 당신 백성을 보호하신다. 그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고 의뢰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주님, 사소하든 중대하든 주의 공급과 보호하심을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진정한 믿음이 있게 도와주소서!

2024.6.29 (토) 왕하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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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9 (토) 왕하5:1-14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의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기적적인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다. 본문은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의 치유를 통해 기적과 말씀의 상관관계를 교훈한다. 1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제한해선 안 된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 사람도,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도 아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고, 불치병도 치유 받았다. 그가 잡아 온 어린 여종이 그를 엘리사에게 인도했다. 이렇듯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의 영토와 민족적 혈통을 뛰어넘는다. 2 기적은 재물이나, 외교관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만남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올바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일은 종종 인간의 무지, 착각, 지식의 한계로 일어난다. 그러한 오류는 기적이 필요한 급박한 상황임에도 이스라엘 왕이 화를 내듯이 불편한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3 하나님의 주권은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얼마든지 뛰어넘는 것을 본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무능력을 나타낼 뿐이다. 기적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를 기적의 현장으로 인도하심을 볼 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기적을 인간은 저항할 수 없다. 교만하게 보이던 나아만 장군도 부하의 설득에 따라 순종하게 된다. 4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선 어린아이와 같은 완전한 순종이 필요하다. 기분이 상해 돌아가려는 나아만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교만한 죄성을 본다. 그러나 재물도, 자기 생각도, 군사력도 하나님을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의 능력에 순종할 때 기적은 일어난다. 주님, 주권을 갖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나의 한계를 인정하며, 나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요구에 항상 겸손히 순종하는 주의 일꾼 되게 하소서!

2024.6.28 (금) 왕하4: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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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8 (금) 왕하4:38-44 본문은 마치 여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던 예수님의 사역과 흡사한 일들이 엘리사를 통해 이스라엘에 일어난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1 엘리사가 동쪽 요단 강변의 길갈로 이동했다. 거기서 만난 예언자의 자자들이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결핍의 어려움을 격어야 할 때가 있다. 이들이 큰 솥에 국을 끓이면서 독이 든 들호박을 따 와서 국에 넣는 실수를 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 고통을 이겨 낼 능력을 얻는다. 2 독이 든 들호박을 넣은 국은 위험했지만, 풍족하지 않던 시기에 차마 쏟아 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에 엘리사가 국에 밀가루를 넣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독이 없어져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가난과 고난을 통과하는 동안 얼마든지 우리를 위해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3 바알 살리사에서 온 사람이 엘리사를 공경하는 의미로 보리떡과 채소를 드렸는데, 엘리사는 이를 무리에게 나눠 주라고 했다. 엘리사의 종이 보기엔 그 양이 몇 명이 먹을 만큼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사는 무리가 다 먹고 남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전한다(43). 사실상 초라한 음식에 하나님의 권능과 말씀이 임했고,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세상 시각으로 볼 때, 우리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소박함 가운데서도 세상이 알 수 없는 넘치는 기쁨과 만족이 있게 마련이다. 주님, 눈에 보이는 세상의 풍족함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풍성을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갈 길을 마치게 하소서!

2024.6.27 (목) 왕하 4: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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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7 (목) 왕하4:18-37 누구나 살면서 인생의 풍랑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풍랑을 대하는 자세는 각기 다르다. 수넴 여인의 모습은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이상적인 태도와 그 결과를 잘 보여 준다. 믿음의 걸음을 걷는 사람은 풍랑을 이기고 풍랑 너머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만나는 복이 있다. 1 하나님께 기적적으로 얻은 아이가 자기 무릎에서 죽어 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수넴 여인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수넴 여인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대처한다. 아들의 시신을 엘리사가 묵던 방의 침상 위에 눕히고, 남편에게도 아들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엘리사가 있는 갈렐산으로 달려간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아들을 이렇게 허무하게 데려가실 리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성을 잃을 만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당황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하나님은 역사를 보게 한다. 2 남편에게도, 게하시에게도 ‘샬롬’이라 말하며 당황하지 않고 담대했지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앞에서는 그 발을 껴안고 슬러하며, 자기는 아들을 구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만일 아들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엘리사가 자신의 지팡이를 게하시에게 주어 아이 얼굴에 놓으라 지시하지만,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함께 가기를 요청했다(30; 2:2, 4, 6; cf. 출33:2, 15). 이 여인의 간절한 믿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목적만 달성되면 된다는 생각보다, 그 과정에서부터 은혜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3 게하시가 아이의 얼굴에 엘리사의 지팡이를 두었지만 변화가 없었다. 뒤이어 도착한 엘리사는 아이의 시신 위에 엎드린다(왕상17:21).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은 다시금 아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다.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창조주의 권세가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세상을 창조하시는 권능까지 사용하셔서라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주님...

2024.6.26 (수) 왕하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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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복을 받는가?’란 질문에 우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엘리사의 사역 이야기들은 모두 선지자의 통치가 가진 성격을 드러낸다. 1 수넴의 한 귀한 여인, 즉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교만하지 않았고,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 늘 대접했던 자다. 더 나아가 엘리사가 머물 수 있는 숙소까지 마련해 주었다. 이런 것은 재산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임을 아는 지혜가 있었기에 기쁘게 엘리사를 섬겼던 것이다. 부유해도 교만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후원하고 섬기는 데 마음을 다한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 잊지 않으시고 더 큰 복을 주신다. 2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호의를 받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느꼈고 시종을 통해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저는 제 백성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재산을 가졌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욕심이 끝이 없게 마련이다. 수넴 여인은 그거 감사하며 자족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지혜롭게 자족하며 하나님의 일을 돕는 사람이야말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다. 3 시종 게하시가 그녀에게 아들이 없고 남편이 연로함을 엘리사가 들었다. 당시 여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극히 수치스런 일로 여겨졌다. 이에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1년 뒤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을 말한다. 이 말에 아마도 임신하기엔 이미 나이가 많았다고 여겼는지 이 여인은 ‘주의 여종을 속이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한다. 자족하며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시기에 그녀는 엘리사가 예고한 대로 생각지도 못한 아들을 품에 안게 되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감사하지 못하면 언제나 부족하게 마련이다. 내게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자족하는 지혜를 가질 때, 하나님은 그 위에 더 큰 복을 주신다. 주님, 모두가 더 많이 가지려는 세상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