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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August, 2024

2024.8.26 (월) 살전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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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6 (월) 살전5:12-22 본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주는 가르침의 마지막 부분으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고 섬길 때 지켜야 할 원칙과 각 개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을 살아갈 때 마음에 품어야 할 큰 틀을 제시한다. 1 교회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지켜야 할 첫째 덕목은 섬기는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초신자들이었기에 그들 가운데 세워진 지도자들에게 대한 영적 능력이나 탁월한 지식을 기대하긴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앞서서 섬기는 자들이 비록 부족하다 해도 그를 인정할 것을 권면한다(12). 그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야 그들 가운데 화목함이 이뤄질 수 있음을 가르친다(13). 세상은 더 큰 능력, 더 많은 인정을 받는가를 따지며 세우지만 교회는 모두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공동체이기에 그런 방식을 사용할 수 없다. 똑같이 나약한 인간임을 알고 말씀과 진리에 관련한 문제가 아닌 한 그를 인정해 주고 그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가 지켜야 할 덕목이다. 2 교회에서는 뒤쳐진 사람들을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 교회는 이런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게으른 자는 꾸짖고, 약한 자는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는 붙들어 주어 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 모든 사역은 ‘오래 참음’을 기본으로 한다(14). 무엇보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서로 선하지 않은 것을 본받아선 안 된다(15a). 세상은 뒤쳐진 이들을 ‘무능하다’며 내치지만, 교회는 모든 이를 붙잡고 함께 가는 공동체임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3 가르침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방법을 간략하게 가르쳐 준다. 즉, 어떤 거창한 과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놓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한다. 또한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풀어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갈 것을 강조했다(19-20). 끝으로 매순간 좋은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고, 좋...

2024.8.24 (토) 살전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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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4 (토) 살전4:1-12 데살로니가에 단 3주밖에 머물지 못했던 바울은 성도들에게 아직 가르쳐야 할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 만은 꼭 기억하고 실천하라’고 할 만한 핵심 가르침을 본문에서 주고 있다. 1 우선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신이 가르쳤던 내용을 기억하고 실천하라고 권면한다. 신앙생활의 대원칙이 바로 ‘거룩함’이며, 거룩함을 지키지 않음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임을 강조한다(3, 7-8). 당시 사회적 부도덕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데 바울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고, 색욕을 따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율법도 자신과 가정과 이웃을 파괴하는 악행인 간음을 살인과 동등한 죄로 취급한다. 세상은 점점 더 부도덕한 영에 잠식되어 가고 있는 현 세대에서 우리 성도들은 세상의 음란한 문화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2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모든 형제 자매에 대해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기에 그 사랑을 계속 유지하도록 권면했다(9-10). 또한 성실히 일할 것을 권면했다. 신앙생활을 한다, 교회를 섬긴다는 이유로 직장이나 가정에서, 기타 사회적인 관계 가운데 맡은 일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 가정에서, 직장에서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면 그로 인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마련이다. 가정에서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은 함께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도록 저희를 부르셨으니 세상의 악한 문화와 단호하게 절연하면서도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 되게 하소서!

2024.8.23 (금) 살전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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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3 (금) 살전3:1-13 본문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쁨을 설명한다. 우리는 복음을 위한 헌신자로 서야 한다. 1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기도 전에 자신이 그곳을 떠나와야 했기 때문에 교회의 상황이 염려가 되었다. 바울과 동역자들이 예상했던 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4). 그래서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고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믿음을 붙잡아 주기 위해 디모데를 파송했다(2, 5). 그런데 놀랍게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여전히 견고했다는 것이다. 또한 영적 지도자를 보고 싶어 할 정도로, 지도자들을 향한 끈끈한 유대감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디모데가 돌아와 들려준 소식에 바울 일행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결코 헛수고가 아님을 알고 위로를 받았다. 세상이 주는 위로와 소망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생명의 풍성함으로 누리는 기쁨은 영원하다. 2 성도는 복음 안에서 굳게 서 있다고 하지만,선 줄로 생각할 때 항상 넘어짐을 경계해야 한다(고전10:12). 따라서 바울은 당장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만나러 갈 수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곧 하루 속히 다시 만나 믿음의 부족한 것을 채워 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다. 또한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이 넘치고(12),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거룩하고 흠 없는 교회로 계속 세워져 가기를 중보했다. 진정한 복음의 사람은 자신을 위하 기도보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더 힘을 다해 기도한다. 그럴 대 자신을 위한 기도의 영역세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주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가 결코 헛되니 않고, 오히려 놀라운 열매를 맺는 기쁨이 있음을 알아 끊임없이 주변을 돌아보며, 중보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소서!

2024.8.22 (목) 살전2: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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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2 (목) 살전2:13-20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지만 율법에 관심을 갖고 회당 예배에 참여했던 자들이었다 (행17:4). 헬라 문화에 익숙한 이들은 유대율법의 규례를 일일이 지킬 수 없었기에 회당에서 유대인들로부터, 또 동족들로부터 차별과 박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이 더 존귀한 자들이 되었다고 선포한다. 1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 말씀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또 유대에 있는 교회들을 본받아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동족에게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가족, 친구, 이웃, 동료 등 가까운 사람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길에서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도 끝까지 복음의 길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명백한 구원의 증거다. 2 유대인들이 일으킨 소요 때문에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데살로니가로 돌아갈 기회를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바울 일행은 마게도냐를 떠나 아테네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b, 행17:10-14). 그러나 바울은 자기 ‘얼굴’이 데살로니가에서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바울은 이들을 자신의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 영광이라고 고백할 만큼 소중하게 여겼다. 이처럼 성도 각 사람을 섬기며 성도들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일꾼이다. 주님,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착하고 충성된 일꾼’으로 매순간 살아가도록 성령의 기쁨과 용기를 더 하소서!

2024.8.21 (수) 살전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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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1 (수) 살전2:1-12 마게도냐의 세 도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 바울은 심한 고생을 했고 오래 머물지도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역을 헛수고로 여기지 않고,계속해서 사역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 이유가 뭘까? 1 바울은 데살로니가 직전, 빌립보에서 매도 맞고 옥에 갇히는 고생을 했다 (2; 행16:19-24). 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면 배척당하고 생명의 위협도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이며, 그 안에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동기, 속임수가 없기에 위험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했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동기였다(4). 우리의 신앙생활 모두가 불신자들의 눈에는 헛된 것으로 보이겠지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2 ‘종교 사기꾼’들은 아부의 말을 앞세우고, 인기를 얻으려 하지만 바울 일행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의 생명까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줄 수 있다는 자세로 성도들을 사랑했다. 사도의 권위를 세울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젖먹이를 양육하는 유모 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베풀었다. 이처럼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섬길 때,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얻을 수 있다. 3 바울은 한 영혼을 귀히 여겼다. 바울은 성도들 중 한 사람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했다. 이는 성도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9-10). 또한 모든 자녀에게 관심을 두는 아버지처럼 바울은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에 합당히 행하도록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알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을 위해 자기 노력과 시간을 바칠 자세가 되...

2024.8.20 (화) 살전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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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는 온전한 돌봄과 양육 속에서 시작된 교회가 아니다. 설립 초기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시련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1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중 세워진 교회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경험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회심자들을 남겨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박해 속에 다 쓸려가 버릴 줄 알알던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갖고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3). 이는 복음을 깨닫고 확신시키시는 성령의 능력이었다(50. 성령은 환난 속에서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뻐할 수 있게 하신다(6). 많은 사람이 시련이 오면 자신의 힘으로 싸우다 패배한다. 성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싸우는 자들이다. 성령님을 기대하며 이뤄 가시는 역사를 기뻐할 때 우리는 얼마든지 영적 승리를 이룰 수 있다. 2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신앙이란 고난이 평안으로 바뀌고,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복 받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인 후 우상을 버렸고, 어떻게 하나님을 참되게 섬길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9).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소망했다(10). 성도는 시련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사실을 더 가까이 붙들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시련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장차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누릴 천국의 삶을 소망하자. 주님, 신앙의 여정 속에서 그 어떤 위기가 닥쳐도 그 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기뻐하고 우리를 건지시는 주님이 계심을 소망하는 든든한 믿음을 주소서!

2024.8.19 (월) 왕하25: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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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19 (월) 왕하25:18-30 열왕기의 본문은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열왕기의 대주제인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짚어 준다. 나라가 세워지는 것도, 성전이 세워지는 것도,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또 심판 받는 것도, 마지막에 작은 회복의 소망을 남겨 두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1 하나님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 계획, 책략과 상관없이 계획하신 일들을 진행하신다. 유다의 대부분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갔고 땅은 황폐해졌다. 그러나 주권적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남겨 두셨다. 그중 일부는 바벨론에 대항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 평안의 때나 훈육의 때나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한다면 소망이 있다. 2 열왕기의 마지막 부분인 이 본문에 여호야긴이 옥에서 풀려난 일을 기록함으로 소망이 있음을 암시한다. 언뜻 갑작스럽게 보이는 이 기록은 독자들이 이 기록을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비록 많은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어도 소망은 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훈육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뜻은 정하신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이며, 다윗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성취된다. 주님,온 세상이 우릴 향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비웃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얼마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음을 믿고 주만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소서!

2024.8.9 (금) 왕하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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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9 (금) 왕하21:1-9 부전자전은 아버지와 아들은 닮기 마련이라는 의미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며 사용한다. 그러나 히스기야와 그의 아들 므낫세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므낫세의 타락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1 영적 축복은 저절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아버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통치 기간 내내 아버지 히스기야의 선한 정책들을 철저히 깨뜨리고 타락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가 헐어버렸던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 신을 위한 제단을 쌓았고,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이방민족의 풍습을 따랐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자녀와 후손의 안녕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다윗은 죽기 전 아들 솔로몬을 불러 마음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것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겼다.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짓도록 가르쳤고 필요한 준비를 하는 데 다윗은 최선을 다했다. 자녀들이 믿음의 반석 위에 서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쳐야 한다. 2 므낫세의 악행은 이전의 왕들보다 한층 더 심각했다. 그는 하나님이 멸망시키신 이방 민족들보다 더 악한 일을 하도록 백성을 미혹했다(9). 그 결과 하나님은 유다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다. 지도자의 신앙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자녀들이 형통한 인생을 살도록 참된 형통의 비결을 가르쳐야 한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지키는 것이다. 아무리 악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도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면 선한 생을 살게 된다. 마음이 문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이 바르고 굳건해야 한다. 주님, 아무리 혹독한 세상에서 산다 하더라도 마음을 빼앗기기 말고 온전히 주님께 내어 드리게 하소서!

2024.8.8 (목) 왕하2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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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8 (목) 왕하20:12-21 죽음을 선고받고 눈물로 기도했던 히스기야에게 15년 생명 연장이라는 놀라운 은혜가 주어졌지만, 그는 다시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도가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대상과 태도에 대해 분명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다. 1 히스기야가 병들자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이 사신들을 통해 편지와 예물을 보내온다. 물론 정치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만남이다. 이때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들에게 자신의 보물고와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준다. 나라의 국력을 가늠할 수 있던 모든 것을 별 생각 없이 했다. 하지만 이는 국력을 자랑함으로써 모든 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려는 교만한 태도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다(잠16:18). 죄악은 마음으로 계획하고 의도적으로 실행하는 것만은 아니다. 별 생각 없는 행동, 무지한 판단, 어수룩한 실수도 따져 보면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인간의 교만과 자기중심적 경향으로 인한 죄악인 것이다. 자기 스스로 주인공이 되려 하는 것은 교만이요 가장 큰 죄악이다. 2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교만함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때가 되면 왕이 자랑했던 모든 것이 그대로 바벨론으로 옮겨 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16-17). 왕의 아들 중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종노릇하는 일도 일어날 것이다(18). 이에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말씀은 선하십니다’라고 대답하며 징벌적 예언을 받아들인다. 다만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성공적으로 종교 개혁을 단행했고,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기적을 체험한 믿음의 왕의 마지막 치고는 너무 평범하고 건조한 마지막이다. 히스기야는 때마다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자랑했어야 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자랑할 것을 자랑해야 한다. 선하신 하나님을 크게 외쳐 자랑하자. 주님, 주님을 자랑하고, 명철하여 여호와를 아는 것과 여호와께서 사랑과 정의와 ...

2024.8.7 (수) 왕하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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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7 (수) 왕하20:1-11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많은 핑계로 기도 생활에 소홀할 때가 많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확신 없음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기도 응답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다. 1 히스기야는 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그는 벽을 향해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했다. 이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바로 응답하셨다. 그의 눈물을 보셨고, 그의 수명이 15년 연장될 것을 알려 주셨다. 기도는 이처럼 허공을 향해 공허하게 외치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응답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기도 응답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히스기야는 국가적 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신뢰하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을 넘치게 채워 주실 것이다 (엡3:20). 2 은혜를 입어 병이 나은 히스기야는 생명 연장의 징표를 구했다(8).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요청을 그대로 수용했다. 하나님은 해시계에 나타난 해 그림자의 위치가 10도 (40분) 뒤로 물러나는 이적을 징표로 보여 주신다. 창조주 하나님이 못하실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은 논리적 설득 이상의 관계와 믿음에서 온다. 히스기야의 경우처럼,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징표 하나만 있으면 적군을 이기고 제국을 넘겠다는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주님, 언제라도 한계가 분명히 있는 인간인 저희가 주의 은혜로 날마다 새로운 호흡을 주시고 삶을 연장시켜 주심을 믿고, 죽음에 이르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만 붙잡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소서!

2024.8.6 (화) 왕하19: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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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6 (화) 왕하19:29-37 하나님이 없다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산헤립이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권세를 누리며 하나님을 모독했지만 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최후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1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막대한 조공을 받았다. 당시 앗수르와 버금가는 나라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를 세우고 통치했다. 그 세상 권세로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욕했다. 그러나 산헤립의 교만을 보신 하나님은 어느 날 밤, 한 천사를 보내 앗수르 군인 18만5천명을 쳤고, 모두 죽었다. 군사를 잃은 산헤립은 니느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0년이 지난 후 그가 그토록 숭배하고 자랑했던 앗수르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자기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상 모든 권세는 유한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덧없는 세상의 부와 권세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한 가치를 갈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세상의 통치자들은 잠깐 동안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존재다.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거기에 합당한 사람을 택하시고 사용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주권의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뭘까? 바로 말씀에 순종하여 공의를 실천하는 나라에 복을 내리시고 불순종하는 부패한 나라에는 저주를 내리신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따라 의와 거룩함으로 세워져 나가도록 기도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권력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사용하도록 간절히 기도하자. 오직 하나님만이 온 만유를 통치하시는 영원한 왕이심을 기억하고, 항상 주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게 하소서!

2024.8.5 (월) 왕하19: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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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5 (월) 왕하19:14-28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높이고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산헤립의 편지를 들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 편지를 펼쳐 놓고 기도를 시작했다. 이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적을 물리치실 것을 약속하셨다. 위기의 순간에 성도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나? 1 교만과 조롱이 가득한 전언을 편지로 전해받 은 히스기야는 성전으로 올라갔다.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해 먼저 기도하는 길을 선택했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누구시고(15),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간구한 다음, 나라를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고백하여 수많은 지역의 우상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심을 히스기야는 분명히 알았다. 그에게 유다의 구원은 이 땅에 유일한 신이 바로 하나님밖에 없음을 천하만국이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19). 하나님을 따를 때 영원한 승리와 안전히 보장된다. 맨 먼저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했던 히스기야허첢, 하나님을 높이고 진리를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2 성전에서 간절히 기도했던 히스기야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이 전해졌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려는 앗수르가 오히려 조롱을 당할 것을 경고하셨다.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던 교만한 앗수르를 오던 길로 끌어내 가시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성도의 간절한 기도를 귀담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시65:2; 잠15:29). 또한 인간의 교만한 마음과 행위를 절대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신다(잠3:24; 사13:11). 우리는 이처럼 들으시고, 보시고, 행하시는 주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기대할 수 있다. 주를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은 완전하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주님, 모든 상황 속에서 완전하게 통치하시는 주를 바라며 기도로 잠잠히 기다리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2024.8.3 (토) 왕하18: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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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3 (토) 왕하18:26-37 유다는 연이은 앗수르 군대의 침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헤립 왕이 보낸 군대 장관의 모욕과 회유를 성안에 있던 백성이 모두 들었다. 싸우기도 전에 포기하게 만드는 책략이 사탄을 닮았다. 이럴 때 성도는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하나? 1 히스기야가 보낸 신하들이 ‘히브리어로 말하지’ 말아 달라는 희대의 요청을 한다. 성안의 백성이 그 모든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랍사게는 계속해서 히브리어로 백성의 마음을 약하게 했고 회유하여 앗수르 왕에게 투항하게 위협했다. 히스기야와 여호와를 의뢰하지 말고, 지금 당장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각각 자기의 우물을 마실 것’이라는 달콤한 말로 백성을 유혹한다(31). 사람의 욕망을 정확히 건드린다. 진실을 숨기고 현실을 과장해 마음을 무너뜨리고, 욕망을 자극하는 헛된 약속으로 변심시키는 것이 바로 사탄의 특기다. 지금도 사탄은 ‘누가’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마음에 의심을 심고, 답답한 현실에 낙심하게 만들고, 헛된 욕망을 자극해 변심케 만드는 사탄의 회유책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 길은 오히려 진짜 낙심으로 인도한다. 2 랍사게는 앗수르가 점령한 여러 민족의 신들을 언급하면서(33-34), 유다의 신 여호와도 자기 백성을 앗수르의 손에서 건지지 못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신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니 당연히 구원할 능력이 없다(행19:26). 그러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어 노예 된 것을 면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신 분이다(레26:13; 출19:5-6). 우리로 의심하고 변심하게 만들려는 사탄의 간계에 대항하는 방법은, 그분이 이루신 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신8:1-20).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며 산성이며 생명이 되신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평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이 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여 완전한 평안에 이르는 주...

2024.8.2 (금) 왕하18: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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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 (금) 왕하18:13-25 사마리아성을 함락시켰던 앗수르가 이번에는 유다의 성읍들을 쳐서 점령한다. 이 위협 앞에 히스기야는 조공을 제공하는 정치적 타협을 보인다. 이 타협은 이후 문제를 더 크게 했고, 유다가 적국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 1 사마리아성이 앗수르에 의해 함락당한 지 8년이 지나고, 유다의 성읍들이 점령을 당했다. 히스기야는 대항 한 번 하지 않고 스스로 조공을 바치겠다고 했다. 산헤립은 10톤이 넘는 은, 1톤가량의 금을 요구했다(14). 문제는 왕궁의 보물창고에 있는 것으로 충당할 수 없어 여호와의 성전 문과 기둥에 자신이 입힌 금까지 벗겨 내 바쳤다. 이 행동은 부왕 아하스가 오래전에 보였던 것과 유사하다 (16:8). 정치적 군사적 위협 앞에 성전 기물을 건드리는 것은 믿음 없는 행동이다.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 협상하거나 매수하려 하지 않고 싸워 이겼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삼상17:47). 세상의 거센 위협과 겁박은 우리의 믿음을 평가할 기회다. 세상의 위협 앞에 타협하지 말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싸워 이기자. 2 앗수르의 산헤립은 고위 관리에게 많은 병력을 주고 예루살렘을 치게 한다(17). 랍사게는 히스기야에게 완전한 항복을 받기 위해 조롱하고 협박으로 압박을 가한다 (19-22). 히스기야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하나님이 친히 유다를 치라 하셨다면서 신성모독까지 거침없다(25).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꾀를 내어 앗수르에 굴종적인 태도를 보였더니 이러헥 모욕적인 일로 되돌아왔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나?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하고 있나? 반쯤 의지하고 적당히 타협해서는 영적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승리의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자. 주님, 적당한 타협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보았으니, 끝...

2024.8.1 (목) 왕하1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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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1 (목) 왕하18:1-12 오늘 본문은 완전히 다른 두 나라의 운명을 소개한다. 한 나라는 회복하여 번영한 유다, 다른 한 나라는 멸망당한 북 이스라엘이다. 두 나라의 형편이 완전히 달라진 중심에는 그 나라의 지도자와 백성의 완전히 다른 삶이 있다. 이 두 나라의 결정적 차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1 히스기야왕은 온전히 하나님을 따른 믿음의 사람이었다. 아버지 아하스 시대까지 남아 있던 산당을 훼파하고 우상을 제거했고 아세라 목상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처럼 섬기던 놋뱀을 깨뜨렸다.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남 유다는 영적 각성과 개혁을 이루어 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섰으며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했다. 이런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나라의 안정과 인생의 형통함으로 보상해 주셨다. 우리에게도 버려야 할 잘못된 가치관과 삶의 죄악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며 변화를 촉구하실 때 우리는 남을 탓하거나 환경을 핑계 삼아 삶의 변화를 거부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선택할 때 하나님이 형통의 복을 주신다. 2 반명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거부했고, 그 결과 BC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배반한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대가였다. 자기 나라의 멸망을 누가 바랄까. 북 이스라엘 왕들은 자신들이 택한 우상이 번영을 가져오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나라나 개인에게 형통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자리를 피하면 우리의 영적 상태는 더욱 악화된다.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지체들과 교제하는 영적 생활에서 멀어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지체들과의 교제를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게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은 죄와 가까워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 세상의 유혹에서 날마다 승리하고 온전히 주를 따르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도록 매사에...

2024.7.31 (수) 왕하17:3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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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31 (수) 왕하17:34-41 본문은 이스라엘 멸망 보고의 마지막 부분으로 요약적/종합적/신학적 평가를 남긴다. 오늘날 성도들이 받아야 할 교훈은 어떤 것일까? 1 ‘오직’ 여호와만을 경외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분문은 그 땅의 거주자들이 여호와를 경외했다, 돈느 하지 않았다고 교차, 반복하여 기록한다. 여호와를 경외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외형적 제의만 강조했음을 알려 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방 신들에게 경외, 경배, 섬김, 제사하는 것이 아닌, 이 모든 것을 여호와께 해야 한다. 성도의 삶은 어떤가? 예배자의 삶과 비예배자의 삶이 모두 나타나고 있지는 않는가? 본문은 한 사람의 삶에 이분법적 신앙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배자 또는 비예배자만 존재할 뿐이다. 그 중간은 없다. 2 왜 이방 신을 섬기게 되는 것일까?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께서 어떤 분인지 잊기 때문이다. 과거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큰 능력과 편 팔로 구원하신 분임을 잊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장차 구원을 펼치실 능력의 하나님인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함으로 미래의 소망도 없는 것이다. 주여, 세상의 다른 것에 관심을 갖게 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은혜와 영원한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게 하소서!

2024.7.30 (화) 왕하17: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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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30 (화) 왕하17:24-33 고대 근동에서는 한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 사람들이 섬겨오던 신이 몰락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멸망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곳에 높임을 받으실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1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그 땅은 이방인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 가운데 사자를 보내 몇 사람을 죽이심으로 그 땅이 여전히 거룩한 땅이며, 이방 우상들의 땅이 될 수 없음을 보이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아 그 땅에서 내쫓김을 당했듯이, 그 땅에 이주해 온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그 땅에서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 포로 중에서 제사장을 찾아 이스라엘 땅에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가르치게 된다(27).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사용하셔서라도 온전한 예배와 섬김을 받으실 것이다. 2 이스라엘 땅에 살게 된 이방인들은 여호와 섬기는 법을 배웠지만, 각기 자기의 신상도 만들었다. 결국 이스라엘 땅은 헛된 우상으로 뒤덮였고, 인신제사까지 자행되었다(30-31). 이방인들이 여호와와 이방신을 함께 섬기는 현상이 계속 이어졌다.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그 어떤 차이점도 없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된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도 다 하는 수준의 정직함과 도덕성 정도에서 우리가 절대 머물러선 안 되는 이유이다. 주님,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온전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구별되이 예배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2024.7.29 (월) 왕하17: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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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9 (월) 왕하17:13-23 아무리 이스라엘이라 해도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면 망할 수밖에 없음을 반복해서 가르쳐 온 것이 바로 여러 왕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끈 원인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1 하나님의 심판이 ‘도적같이 임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전혀 갑작스럽지 않다. 심판하시기 전에 계속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시기 때문이다(13). 북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엘리사, 호세아, 아모스, 요나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왕과 백성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을 반영했던 조상들과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고, 이방인들이 숭배하는 우상을 섬겼다. 자신의 자녀를 불태워 바치는 극악무도한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그 결과 북쪽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말씀에 불순종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 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준엄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 북 이스라엘의 예배는 금송아지를 예배했고, 여호와가 아닌 바알과 아세라 등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포함했다. 거짓된 예배는 결국 멸망으로 이끈다(21-22; 10:31).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예배 가운데 우상을 사용하고, 말씀의 진리가 나타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씀을 끊임없이 주셨지만, 끝끝내 불순종했을 때, 이스라엘을 이 시점에서 멸망시키셨다. 우리의 예배는 온전히 영과 진리로 드려져야 하며, 우상 숭배적 요소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주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속적 번영을 기대하고 선포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고 바른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2024.7.27 (토) 왕하1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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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7 (토) 왕하16:10-20 교회와 신앙이 세상의 문화와 융합될 때 종교혼합이 일어나고, 신앙은 타락하기 시작한다. 1 아하스는 다메섹에 있는 우상의 제단을 보고는 제사장 우리야에게 그와 똑같이 만들에 한다. 아하스의 눈에는 다메섹의 제단이 훨씬 더 좋아 보였던 것이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던 제사장은 왕의 명령에 따랐다. 결국 성선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생각없이 세상을 답습하면 결국 세상의 신을 섬기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2 아하스는 다메섹 제단과 똑같이 만들어진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고, 그것을 성전에서 주로 사용하게 했다(12-13, 15).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거나 감사할 때 필요했던 놋 제단을 왕이 지금은 점을 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게다가 왕은 대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직접 하나님께 여쭐 수도 없었다. 아하스는 이방의 화려한 우상 제단에 미혹되어 이처럼 성전 제사를 완전히 왜곡시키고 말았다. 3 물두멍과 성전 낭실 역시 개조되었다. 그 이유는 앗수르 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8). 자신이 앗수르의 충실한 신하임을 표현하기 위해 앗수르의 종교를 모방하고, 정치적 관계를 위해 성전도 개조했고, 그 안의 기물들도 바꾼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앗수르의 종교와 혼합함으로써 유다를 앗수르와 구별되지 않는, 앗수르에 속한 지방처럼 만들어 버렸다. 교회가 세상의 권세에게 부역하기 시작하면 심각한 종교혼합이 오늘날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우리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주님,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배와 경건 생활 그리고 일상의 기준을 삼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