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Showing posts from May, 2024

2024.5.31 (금) 왕상22:41-53

Image
2024.5.31 (금) 왕상22:41-53 본문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여호사밧의 통치를 요약한다. ‘개혁을 통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했는가’란 질문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에게도 적용된다. 어떻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보고도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는가? 1 우리는 이 두 왕을 바라보며 부모 신앙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신앙의 유산은 가문의 존속을 좌우한다. 의로운 왕 아사의 길을 따른 여호사밧은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강력하게 남자 창기들을 모두 멸절했다. 아합과 이세벨의 길을 따른 아하시야는 ‘통치 기간 2년’이란 묘사에서 그 멸망을 예감하게 된다. 성도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2 여호사밧에 대한 기록이 모두 좋지만은 않다. 분명 실패도 담고 있다. 그는 산당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기에 종교개혁이 완벽하지 않았다. 이 또한 아버지의 영향이기도 했다(15:14).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신앙의 참된 개혁과 정화는 부모에게 받은 신앙의 유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 관습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오랜 신앙의 전통과 관습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주님, 세상적인 성공을 추구하기 보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섬기고 따르는 삶을 추구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허락하실 참된 풍요와 형통함을 누리는 은혜가 있게 하소서!

2024.5.30 (목) 왕상22:29-40

Image
2024.5.30 (목) 왕상22:29-40 인간이 아무리 거부하고 대적해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뤄진다. 아합은 전쟁에서 어떻게든 사고자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사하고 말았다. 1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 출정했다. 충격적인 것은 남 유다의 여호사밧도 함께 갔다는 것이다. 거짓 예언을 분별하는 영적 지혜도 있었고, 하나님의 참된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의 이런 행동은 그의 치명적인 약점 때문이다. 그의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시킨 것이다. 결혼 동맹 때문에 아합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호사밧은 이 일로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다 (대하19:2).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했다는 책암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이 좁은 길이지만 동시에 승리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아람 군대가 아합왕을 찾지 못하도록 변장하고 전쟁터로 갔지만, 누군가 무심코 쏜 화살이 아합의 갑옷 솔기를 꿰뚫었다. 맹렬한 싸움 때문에 빠져나가지 못한 아합은 결국 죽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대로’라고 말씀한다. 세상에는 우연이 없다. 그렇게 보여도 하나님의 필연이 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입히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움직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 붙잡아야 할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님, 반드시 성취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2024.5.29 (수) 왕상22:13-28

Image
2024.5.29 (수) 왕상22:13-28 때로는 상황과 환경이 우리의 믿음이나 기대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소망이다. 그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대 우리는 궁극적인 믿음의 승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1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심기에 맞는 말씀을 전하는 참선지자였기에 왕의 심기에 맞게 말씀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가야는 하나님이 이 전쟁을 통해 아합이 죽을 것을 정하셨으며, 승리를 외치는 예언자들은 거짓의 영에 미혹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이에 거짓 예언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렸다. 아합도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물을 먹이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대가는 이처럼 혹독했다. 그러나 이것은 특권이며 영광이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이다 (마5:12). 우리는 온전히 주의 말씀 위에 서고 말씀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 2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고 주장한다(24). 그러나 미가야는 시드기야가 골방에 숨게 될 것을 예언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후에 일어날 일을 모두 알려 주시고 경고하셨지만, 무지한 자드은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만다. 미가야는 아합이 평안히 돌아온다면 자기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율법에는 하나님을 빙자해 거짓 예언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되어있다(28; 신18:22). 미가야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던 교만한 아합은 죽을 자리로 나아간다. 주님, 주님의 지혜를 따라 겸손히 듣는 귀를 가질 수 있게 하셔서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항상 신령하고 순전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2024.5.28 (화) 왕상22:1-12

Image
2024.5.28 (화) 왕상22:1-12 평안이 꼭 경건을 증언하는 것은 아니다. 아합이 3년 동안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던 것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았다는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 (여호사밧 –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 을 소개하면서) 아합의 마지막. 때가 다가옴을 암시한다. 1 아합은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시도하는데,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여쭤 볼 것을 강권한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께 여쭤 보고 승인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전쟁’을 할 때 승리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의할 것은, 아합과 그 선지자들과 같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승인을 얻으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이익 실현의 수단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2 우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을까?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전달됨을 말한다. 예언의 주체(하나님)도, 예언 실현의 장소 (길르앗 라못)도 명확하지 않는 거짓 예언이 선포되자, 여호사밧은 아합의 선지자들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에게 확신을 준다. 우리는 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거짓 예언과 옳지 않은 기준과 판단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소리들이 종종 큰 설득력을 가진다. 교회 안에서 조차도. 성도는 온통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말씀의 진리를 구해야 한다. 주님, 주신 말씀이 나를 격려하든, 가슴을 찌르든, 복을 약속하든, 말씀이 주어질 때 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하셔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 가운데 큰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소서!

2024.5.24 (금) 왕상20:26-34

Image
2024.5.24 (금) 왕상20:26-34 아람과 이스라엘의 두 번째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다. 아람 사람들은 여호와가 산의 신이기에 평지에서는 힘을 쓰지 못할 것이란 오만한 말을 했다. 이에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들을 심판하신다. 1 아람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지는 않았지만, 여호와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호와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람은 군사적으로 더 유리한 위치였지만 대패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중요한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기준과 판단을 뛰어넘는 결과를 얼마든지 가져 오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순종과 믿음이 필요하다. 2 하나님을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닌 그분 말씀에 순종할 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합은 악한 왕으로 지속적으로 여호와를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위기의 순간에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두 번째 전쟁을 준비했고 승리했다. 하지만, 세상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목적임을 아합은 알지 못했고(28), 벤하닷과과 조약을 맺음으로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을 도발했던 자를 심판해야 하는 그가 지금까지의 승리를 자기가 이뤄 낸 성과인 양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것인 양 생각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 주님, 저희가 누리는 것들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자만이 그분의 은혜를 진정으로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소서!

2024.5.23 (목) 왕상20:13-25

Image
2024.5.23 (목) 왕상20:13-25 승리는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가능한 일이다. 본문은 이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심지어 악한 아합왕을 통해서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에 책임을 다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1 현재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합은 임박한 전쟁 앞에서 상황을 역전시킬 능력이 없다. 그는 상황에 수동적으로 떠밀려 가며 위협에 굴복하거나 타협을 시도할 뿐이다(1-12). 하지만 선지자가 개입하자 이런 상황이 바로 역전됨을 본다. 아합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합을 찾아와 돌파구를 제시한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다. 성도는 도전적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한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단순히 당신의 백성을 전쟁에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악에 빠져 있는 백성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언약적 책임을 다하신다. 당신의 백성이 악을 행하고 있음에도 다른 악(아람)에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기회가 주어진 것이 은혜이므로, 이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항상 머무는 것은 최고의 지혜다. 주님, 지금도 주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위해 저희를 부르시게 계심을 알아 기쁨으로 항상 응답하게 하셔서 주의 구원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2024.5.22 (수) 왕상20:1-12

Image
2024.5.22 (수) 왕상20:1-12 20장에 들어오면서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멈추고, 아합왕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엘리야가 아합 앞에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게셨음을 본문은 설명한다. 1 아람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와 사마리아성을 포위했다. 아합은 바로 항복 의사를 전한다(1-4). ‘네 은금..네 아내들..네 자녀들… 다 내 것이다’란 벤하닷의 말을 조공을 바치라는 의미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지금 당장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빼앗겠다고 한다. 항복 의사를 밝힌 나라를 침공해서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겠다는 것은 지나치다. 아합은 이런 대적 앞에서 비겁하고 무능한 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대적 아람을 물리치게 하신다. 2 장로들과 백성은 한마음이 되어 벤하닷의 요구를 거절할 것을 요청하며 결사항전의 각오를 다지게 된다.이는 아합의 리더십 때문이 아니었다. 아합은 오히려 무도한 침략자에게 맞설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저 항복하려 했을. 뿐이었다. 백성이 마음을 모으고, 아람의 요구를 거부하며 전의를 다지게 한 이는 하나님이시다(9). 아합이라는 최악의 왕이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이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울 용기를 갖게 하신 것이다. 3 벤하닷은 전리품으로 가져갈 것이 없을 정도로 모조리 파괴해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아합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싸움을 시작할 때가 아니라 싸움이 끝난 다음 자랑하라고 답변을 보냈다(11). 이에 벤하닷이 즉시 침공을 재개한다. 이런 상황에서 벤하닷의 군대를 이스라엘이 막아 내기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계셨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왕이었던 아합도 하나님은 들어 사용하셨다. 주님, 온전하지 못해도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처럼, 나의 연약함을 뛰어넘으시고 우리 교회의 부족함을 메우셔서 주의 권능을 보여 주옵소서!...

2024.5.21 (화) 왕상19:11-21

Image
2024.5.21 (화) 왕상19:11-21 심각한 우울감에 빠져 힘을 잃어버린 엘리야처럼 성도들도 예외는 아니다. 사역에서 크게 성공한 이후에 공허함이 나 패배감을 경험할 수 있다. 악한 세력은 결코 성도들의 승리에 손뼉 쳐 주지 않는다. 성공의 절정기를 노리고 있는 악한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영적 침체기에서 회복될 수 있을까? 1 영적 침체기에서는 현재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역사적/경험적 사실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성도들이 삶에서 경험했던 소중한 간증들이 힘이 된다. 어두운 시절을 지나고 있는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며, 먹이시고, 승리하게 하셨던 임재의 기억은 회복의 시발점이 된다. 2 자연현상이 엘리야를 동굴 입구로 이끌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를 움직이게 했다(13).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하지 않으신다.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능력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우리는 회복을 갈구하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면하며, 도전이 되는 말씀을 따라 행동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롬10:17). 3 성도의 진정한 회복은 사명을 깨달을 때 가능하다. 감정은 공격받으며, 기억은 왜곡된다. 하지만 말씀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성도는 그 자리에 절대로 안주할 수 없다. 엘리야가 동굴 입구에 머무를 수 없던 것과 같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사역의 자리로 나아갈 때, 비로소 회복된다(15ff). 엘리야가 후계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비로소 어깨에 놓인 무거운 짐을 벗었다. 주님, 나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충성하며, 또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사람들과 주의 새 일이 있음을 알아 하나님의 뜻에 항상 주의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2024.5.20 (월) 왕상19:1-10

Image
2024.5.20 (월) 왕상19:1-10 강해 보이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이룬 승리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사실 열왕기의 독자들에게는 소망이 될 수 있다. 엘리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발견할 수 있는가? 1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때로 어려움에 휩싸일 수 있다. 본문은 악한 세력의 공격으로 인한 두려움이라 말한다. 엘리야는 초인적 힘을 가진 어떤 다른 차원의 인물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했던, 대다수의 성도들보다 조금 더 믿음이 강했던 사람이다. 엘리야의 절망적 호소(4)로 성도들은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두려움에 빠질 때 성도는 침묵할 것이 아니라 엘리야처럼 생각과 감정을 하나님께 표현해야 한다. 2 우리는 어려움에 빠질 때 의지를 다지고 하나님의 임지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엘리야는 스스로 죽고 싶다고 고백할 만큼 영적 침체기를 겪었다. 영적으로 매우 건강한 상태이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약할 때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적으로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끈질기게 대화해야 한다. 엘리야는 자신의 아픔을 하나님께 토로했다. 우리 또한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과 대화해야 한다. 3 회복은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때로는 성도가 잘못된 상황 판단을 하고 있을 때라도(20), 질문을 던지고 대화하시며 회복시키신다. 엘리야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이 돌보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나아가는 성도를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시켜 주신다. 주님, 원망의 마음이 들어도 여전히 주님은 주권으로 통치하고 계시며 우리를 붙잡고 계심을 믿어, 오늘도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한 하루가 되게 하소서!

2024.5.18 (토) 왕상18:16-29

Image
2024.5.18 (토) 왕상18:16-29 세상은 상대주의, 다원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이에 진리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아합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다. 이들 앞에서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나? 1 엘리야를 만난 아합은 먼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불렀다. 천둥과 번개, 폭풍우를 관장한다는 바알이 엘리야의 저주 한마디에 3년 동안이나 아무 힘도 쓰지 못한 것이야말로 우스운 일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아합과 그의 아버지 오므리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장본인이며, 그 재앙은 바알숭배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선포했다(18).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보자는 엘리야의 제안에 아합은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사람이 만든 우상이 어찌 사람보다 뛰어나랴? 2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백성은 질타한다. 이에 백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부끄러움은 죄의 결과다(21; 창3:7). 영적 양다리를 걸친 백성의 눈에는 분명 바알 선지자들이 유리하다. 압도적으로 수와 번개의 신이 불을 내리는 것이 훨씬 유리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면 그 결과는 부끄러움 뿐이다. 3 가짜는 가짜일 뿐이다.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송아지를 잡고, 바알의 이름을 하루 종일 부르고 ‘뛰놀기’를 시작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 열심을 내어도, 가짜는 가짜일 뿐이다. 종교적 열심과 모든 제사 행위는 무의미했고, 허무했다. 가짜임이 드러나도 그것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우상숭배다. 주님, 세상의 탐욕과 세속에 물들어 살아가는 삶을 철저히 경계하여, 참된 진리의 좁은 길로 주의 말씀 따라 걸어가는 용기와 지혜가 있게 하소서.

2024.5.17 (금) 왕상18:1-15

Image
2024.5.17 (금) 왕상18:1-15 오바댜는 아합의 악한 통치 아래에 신실한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반드시 지켜 주신다. 1 아합이 통치하던 시대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다 사라진 시대였다. 엘리야마저 목숨의 위협으로 인해 아합을 대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시대에 아합 왕궁 한복판에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합의 신하 오바댜였다. 그는 아합과 이세벨이 이스라엘 전역을 바알과 아세라 우상으로 뒤덮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았다. 얼마나 처절한 회의가 들었을까? 그러나 하나님이 오바댜를 궁에 두신 데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호할 도구로 쓰신 것이다. 때로 성도는 현실의 불의함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당신의 백성을 보내시고, 그곳에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 2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러 가는 길에 오바댜를 먼저 만난다. 아무리 엘리야라도 이 시점에 아합을 만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오바댜를 통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죽음을 피한 일을 듣고 엘리야에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엘리야를 통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이야기에 오바댜에게도 엘리야를 만난 것은 복이었다. 하나님은 만남의 축복으로 영적 곤고함에 빠진 이들에게 새로운 기쁨을 주신다. 복된 만남을 통해 사명자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 다윗과 요나단, 바울과 누가의 관계도 이와 같았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사명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 주님, 복된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복이 되게 하시고, 모두 함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믿음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2024.5.16 (목) 왕상17:17-24

Image
2024.5.16 (목) 왕상17:17-24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은 믿음을 성숙하게 하는 도구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갑작스레 죽은 것을 보고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에 이 과부는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그 과부의 믿음이 자라게 하셨다. 1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를 통해 엘리야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그런데 이 여인의 아들이 갑자가 병으로 죽었다. 이에 엘리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한탄하며 기도했다.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소년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다. 이 여인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의 과정 속에서 ‘왜 내 죄를 일깨워 주시냐’고 소리쳤다. 하나님 앞에서 초라한 죄인으로서 자기 실존을 자각한 외침이었다. 타인에 의지하던 믿음을 개인의 확신으로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고난은 믿음을 든든히 세운다. 고난의 때를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을 다시 체험하는 시간이 되도록 기도하자. 2 사르밧 과부는 우상 숭배가 팽배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 아마도 엘리야가 진정 하나님의 선지자인지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리야의 기도로 아들이 살아나는 경험을 하자 비로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진리임을 믿게 되었다. 세상에서 흔들리는 우리에게 고난은 세상 방식대로 살던 우리의 잘못을 일깨우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도록 이끌어 준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영원한 진리며 우리가 믿어야 할 신실한 약속이다. 시련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순종해야 할 말씀을 찾자. 반드시 말씀을 통해 우릴 만나 주시고 나아갈 길을 보여 주실 것이다. 주님,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고난 가운데서도 반드시 우리를 만나 주실 것을 확신하며 견고한 믿음 위에 서 있게 하소서!

2024.5.15 (수) 왕상17:1-16

Image
2024.5.15 (수) 왕상17:1-16 무거운 고난으로 삶이 무너진 사람들에게 본문은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기대하도록 소망을 준다. 1 하나님은 ‘우로’를 끊으셔서 비를 풍요와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알려진 바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참 신이심을 보이겠다고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선언하신다. 그리고 엘리야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그에게 떡과 고기를 공급하셨다. 마치 이스라엘 광야 40년 때처럼. 가뭄은 계속되었고, 시냇물도 말라 버렸지만, 그는 불안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꾼을 세밀히 살피고 돌보시는 분이시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2 가뭄이 계속되자 하나님은 엘리야를 새로운 곳으로 옮기신다. 말씀에 순종하는 엘리야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사르밧은 이세벨의 고향이자 바알 숭배의 중심지인 시돈에 속한 마을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열악한 상황 속에 있는 한 과부에게 엘리야를 공궤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절망에 빠진 소자 한 사람을 구원하실 분 아니라 당신의 역사에 사용하시는 놀라운 섭리를 보여 주신다. 성도는 광대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영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3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르밧 과부에게 자신을 공궤할 것을 요청했다. 그 과부에게는 죽기 전에 먹을 한 끼밖에 없었다. 이 과부에게 엘리야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축복이 임하리라고 언급하며 이방 여인을 믿음의 세계로 초대한다(13-14). 과부는 절망의 음식을 내련호고, 놀라운 순종을 보였다. 그 결과,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고 우리를 새 역사에 동참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자. 주님,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광대하신 역사를 믿으며 순종하여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복이 있게 하소서! ...

2024.5.14 (화) 왕상16:29-34

Image
2024.5.14 (화) 왕상16:29-34 죄의 특징은 악하게 변질되고 말씀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아합왕의 악한 행위를 보면서 죄의 성격을 알고 경계해야 한다. 1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된 종교적 편리주의는 아합왕에 이르러 본격저인 우상숭배로 정점을 찍는다. 바알과 아세라 상을 위해 신전과 제단을 세우고 절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아합은 악의 평가 기준을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에서 ‘아합의 집과 같이 행했다’로 바꾼 장본인이다(왕하8:7). 아합의 우상숭배 정책은 그의 정치력을 지지하는 셍력을 등에 업고 파죽지세로 진행된다. 성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을 방관하거나 더 나아가 악을 지지하는 자가 되어선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행해야 한다. 2 북 이스라엘은 부요한 삶이 우상이 준 복이라 착각했는지, 아합의 우상숭배 정책에 동조했다.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리고성이 무너졌다. 그 성을 다시 쌓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여호수아는 그 성을 다시 건축하려는 자의 가정에 저주가 임할 것을 선포했다(수6:26).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도, 심판의 경고도 잊고 살아가는 영적 암흑 시대의 왕 아합은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던 여리고성 재건을 추진했다. 하나님의 심판예언은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바뀌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예언대로 재건 책임자였던 벧엘 사람 히엘의 가정에 아들을 잃는 저주가 임한다 (34a). 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 그 악에 동조하고 따라가는 길과, 악을 거부하며 싸우는 길이 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악과 싸워 하나님의 영광을 이 시대에 나타내야 한다. 주님, 악이 관영한 이 세대 속에서 나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2024.5.13 (월) 왕상16:15-28

Image
2024.5.13 (월) 왕상16:15-28 1 성도는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것인가? 하나님은 말씀을 반드시 실현하신다. 때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도 쓰시면서 말씀을 이루신다. 이는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을 나타낸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시므리 조차도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다. 그러나 시므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일을 했고, 그 결과는 불행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악하다고 내려졌다.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기를 원하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나?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기질대로 하거나 사람의 인정에 영합하는 것을 경계하여, 여호와의 눈에 악하지 않은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성도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 없이 악한 것에서 돌이켜야 한다. 단 7일간 통치한 시므리도 예외 없이 악하다고 평가받는다. 악한 것을 돌이키는 것에는 즉각적이고 전격적인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 그는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즉각적이고 전격적인 방법을 썼고,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는 데도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공간 또한 마찬가지다. 오므리는 새로운 장소를 개척했음에도 그곳에서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을 이어 갔다. 죄는 장소를 초월해 퍼져 나간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척결하기로 결단할 때 장소의 제한을 받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주님, 세상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보다 하나님께 좋은 평가 받는 저희들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