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Showing posts from September, 2024

2024.9.19 (목) 느9:32-38

Image
2024.9.19 (목) 느9:32-38 이 단락에서 저자는 현재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된 이유를 상세히 분석하며 그들이 현재의 상황에 처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고백에까지 이른다. 1 과거의 실패에 대한 묵상과 분석을 통해 성숙한 이해와 통찰에 이르는 모습을 발견한다. 고난을 당하는 당시엔 그저 고통밖에 느끼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지난 후에 과거를 돌이켜 보면,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셨음을 인정하며 고백할 수밖에 없다. 고난 속에 있는 당시에는 그것의 원인도, 그 안에 감추어진 교훈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 일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때가 있다. 레위 사람들과 함께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 역사의식을 되찾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서 다시 출발하듯, 우리의 삶이 항상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안에서 이어져 나가야 한다. 2 이 긴 기도를 통해 저자는 이스라엘의 지속된 배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결같이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셨음에 감격한다. 고난의 신비 중 하나는, 고난이 우리를 더 성숙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에 대한 더 깊은 이해는 우리 자신을 더 깊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또한 반역으로 얼룩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그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마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임재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며 다짐하듯, 우리도 매순간 하나님을 향해 ‘재헌신’의 마음으로 살아가자. 주님, 신실하신 주님께 기대어 긍휼과 은혜를 소망하며 항상 새언약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4.9.18 (수) 느9:19-31

Image
2024.9.18 (수) 느9:19-31 오욕의 바벨론 포로기를 끝내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은, 성전을 세우고 성벽을 만들면서 다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해 갔다. 레위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았다. 우리의 존재 근거 역시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 1 레위인들의 기도문은 율법을 요약한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40년 동안 만나와 물을 공급하셨고, 옷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지키셨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에게는 징벌의 기간이었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고 훈련하는 기간이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으면 징계하신다. 성도는 징계를 당할 때 오히려 감사하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느끼고 기뻐하기 마련이다 (히12:8; 계3:19). 2 이스라엘은 징벌 가운데 보호해 주신 하나님과는 정반대로, 은혜와 복을 누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했다. 40년 광야 생활이 끝났을 때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속하지도 않았던 요단강 동편 헤브손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땅까지 덤으로 주셨다(22). 약속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많게 하셨고, 땅을 차지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은 큰 복을 누렸다(24-25). 그러나 이들은 감사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고 오히려 거역하고 율법을 등지고 선지자를 죽이며 하나님을 모독했다. 이 기도문에서 보듯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자 자랑은 긍휼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뿐이다. 3 이스라엘은 조금 살 만하다 싶으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율법과 계명과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지만, 언제까지 그런 과정을 계속하지 않으셨다. 결국 이스라엘와 유다는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 죄악과 심판의 순환을 끊으려 하셨다(30).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은 당신의 백...

2024.9.17 (화) 느9:9-18

Image
2024.9.17 (화) 느9:9-18 서로 다른 개개인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는 힘은 바로 역사이다. ‘하나님의 백성’ 역시 같은 역사를 공유한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 공유하는 역사에는 일반 민족의식과 다른 점이 있다. 1 일반적으로 한 나라나 민족이 자기들의 역사를 말할 때는 전성기를 내세우거나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라고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원래 이집트 노예들로서 고통 중에 그저 부르짖기만 했던 자들임을 밝힌다(9). 바로 자신들을 구원하셨기에 높임 받을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고 노래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의식의 시작이다. 주의 십자가 아니고서는 아무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음을 기억하자 (요8;34; 롬5:8; 6:6). 2 레위인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큰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주셨는지를 노래했다.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시고, 광야에서 먹이시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율법을 통해 언약을 맺으셨다. 주의 백성에게는 자기 공로에 대한 인식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다. 우린 그저 받아 누렸을 뿐이다. 아무 공로 없는 우리는 오직 감사하고 찬양할 뿐이다. 3 한 나라가 역사를 서술할 때 어두운 측면은 대개 생략하고 넘어간다. 그렇지만 본문은 오히려 조상들의 잘못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을 거역해 40년 동안 광야에서 머물렀던 일을 굳이 언급한다(15-16).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을 그대로 진술한다. 도한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역사와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믿지 않았던 것까지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태도다. 잘못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다시는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때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주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구원의 하나님을 높이는 매일의 삶이 되게 하소서!

2024.9.16 (월) 느9:1-8

Image
2024.9.16 (월) 느9:1-8 성벽 재건과 초막절의 절기를 다 마친 후, 또다시 모여 회개와 말씀과 기도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해, 나의 부흥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참된 부흥은 잠시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변화의 바람 정도가 아니다. 1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학사 에스라의 인도로 초막절 절기를 성대하게 마무리한 지 이틀 만에 다시 모였다. 율법의 지시를 넘어 일상을 더욱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이 생긴 것이다. 부흥의 열정은 백성들이 금식하며 굵은베 옷을 입고 티끌을 뒤집어쓰는 회개와 자복의 표로 나타난다(1). 지금까지 이방인과 통혼함으로써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했던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돌이켰다. 또한 지금의 상황이 과거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온 죄에 기인했음을 인정하며 현재에 이르는 모든 죄를 총체적으로 회개했다. 죄를 끊어 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의로운 손을 붙들 수 있다. 2 우리가 회개한 후 다시 죄악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패턴을 반복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저 청소만 했을 뿐 그 집을 성령님께 내어 드리지 못해 악한 영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다(눅11:24-26).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말씀을 조명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초막절 절기 내내 학사 에스라가 읽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8:18).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회개로 이어졌고 회개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으로 이어졌다(3). 말씀의 지표가 없으면 회개는 입에 발린 말이 되고, 거룩함은 허황된 목적이 된다. 우리 마음을 말씀으로 더 채워지도록 간구하자. 3 성도는 회개를 통해 다시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기초하여 주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야 한다. 신비로운 것만 바라거나, 성경을 연구하듯 이성적이기만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레위인들은 단에 올라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를 인도했다(4).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즉 하나...

2024.9.14 (토) 느8:1-12

Image
2024.9.14 (토) 느8:1-12 성전 재건 공사가 끝나 안전하고 풍요로운 기반이 마련되었다. 본문은 백성의 영적 필요를 채울 말씀 사경회 장소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수문 앞 광장에서 학사 에스라를 통해 말씀이 온 백성에게 선포되고 모든 백성이 크게 기뻐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 진정한 부흥은? 말씀에서 비롯됨을 다시 깨닫는다. 1 성벽 재건이 끝나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읍에 거주한지 7개월이 지났다. 2차 포로 귀환을 이끌었던 율법학자 에스라가 광장에 모든 백성을 모으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그들 앞에 섰다. 이른 새벽부터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까지 모든 백성 앞에서 말씀을 낭독했다. 제사장 무리가 강단 좌우편에 도열했고, 모든 백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4-5). 에스라가 하나님을 높일 때 백성은 손을 들어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고, 몸을 굽히고 얼굴을 땅에 대며 크신 하나님을 경배했다. 회중 사이에 있던 레위 사람들이 말씀을 해석해 주어 백성은 들은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그동안 말씀을 접하거나 깨달을 기회가 없었던 자들에게 말씀을 받고 누리게 되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하나님 백성으로의 회복은 그 영원한 말씀에서 온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 말씀을 생명줄처럼 붙잡고 살자!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백성의 첫 반응은 ‘통곡’이었다(9).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단 뜻이다.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으로 인해 운 것이다. 그때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찾아가,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서로 나누고 축제의 날을 누릴 것을 명했다.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란 사실을 우리는 잊을 때가 많다. 이제 크게 즐거워할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 읽어 들려준 말을 밝히 알게 되었기’ 때문임을 증언했다(12).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깨닫게 ...

2024.9.13 (금) 느7:61-73

Image
2024.9.13 (금) 느7:61-73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나 물질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잘 관리하고 드리는 것은 참된 예배의 모습이다. 1 642명이나 되는 숫자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족과 계보를 증명할 수 없었지만, 가나안 땅과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고 귀환길에 스스로 동참했다. 자신들의 신원이 분명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본국 귀환을 포기했던 많은 사람들, 특히 레위 사람들(43-45절)과 비교할 때 이들의 결단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제사장들 중에서 자신의 종족과 계보를 확인할 수 없는 자들이 있었다. 결혼이나 다른 가문과의 결연을 통해 제사장 족보를 포기하고 처가쪽의 가문(바르실래)을 따라 족보를 기록하다가 이런 결과가 나왔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섬겨야 했기에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제사장 사역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하나님의 직분은 그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관리하는 자들에게 맡겨질 때 가치가 상실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빛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2 본문은 1차 귀환한 자들의 총수를 49,942로 기록한다. 느7:5-65에서 소개된 합계는 31,115다. 18,827명이 차이가 나는 것은 아마도 전체 수에는 옛날 남왕국을 구성한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 이외에 , 그들의 귀환 대열에 합류한 옛날 북왕국의 10지파 사람들이나 혹은 계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제사장들도 모두 포함시켰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병행 본문인 에스라2:64-65의 총수, 49,897명과도 45명이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노래하는 남녀 (레위지파가 아닌, 결혼식, 장례식에서 전문적으로 노래하는 일을 위해 유다인들에 의해 고용된 자들)’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데, 에스라는 그 수를 200명, 느헤미야는 245명으로 말한다. ‘노래하는 남녀’의 수효 다음에 소개되는 ‘노새’의 숫자가 245라고 되어 있어서 필사자가 원문을 베끼는 과정에서 착각했을 것이란 견해가 일반적이다. 3 많은 리...

2024.9.12 (목) 느7:5-60

Image
2024.9.12 (목) 느7:5-60 성벽 재건으로 예루살렘 도성은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었지만 아직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었다. 성읍은 넓지만, 거기 살고 있는 인구가 매우 적어서, 성읍을 지키고 돌볼 백성이 필요했다. 느헤미야는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대적들의 위협으로부터 성을 지키고, 발전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하게 된다. 1 느헤미야는 자신 앞에 놓인 심각한 현실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5).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믿는 자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문제를 해결할 길을 열어주신다. 필요한 지혜, 담대한 믿음, 혹은 오래참을 힘을 주시며,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한 은혜로 인도하신다. 성도는 무든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바라고 기도해야 한다. 2 본문은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그때에 귀환한 자들을 인솔한 지도자들의 명단이 나온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자들이 BC 538년에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귀환 조서에 의해 첫번째로 537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수는 약 5만명 가량 된다(스2:64-65). 본문은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디님(히: 느티님) 사람들(46)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들(57)은 이방인들로 유다 백성 속에서 살던 자들인데, 이들의 선택은 높이 평가할 만한다. 이들의 형편은 바벨론에서 훨씬 나았을 것이나,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들과 달리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들과 달리 아무런 명예도 없이 아주 힘든 일만 해야 했음에도 성전 봉사를 위해 바벨론에서의 안일한 삶을 포기했다는 점이 놀랍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해 세상 것을 포기한 자에게 하나님은 분명 더 좋은 영적인 것들로 채워주실 것이다. 주님, 무엇이든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다 해로 여기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2024.9.11 (수) 느6:15-7:4

Image
2024.9.11 (수) 느6:15-7:4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52일의 짧은 시간 안에 완수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본문은 말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1 성경은 가장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서 기세등등하여 모든 악을 행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느헤미야를 대적하던 자들처럼 두려움과 낙담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일을 계속 감당하여 하나님을 드려내야 할 ‘왕같은 제사장들’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암몬 사람 도비야가 유대인들과의 혈연 관계를 맺고 있어 유다 사회 내부의 귀인들과 내통할 수 있었다. 유다 사회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가문을 처가로 두고 또 사돈으로 삼음으로써 유다 사회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런 위협 앞이면 얼마든지 위축될 수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항상 뚜렷한 목적의식과 원칙 아래 서 있었다. 인정에 얽매이거나 이익에 걸려서 잘못된 삶을 살기가 쉬운 이 시대에, 모든 성도는 자신의 유익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한 역사 의식, 개인 보다 공동체 전체의 유익, 상황보다 성경 말씀의 가르침에 기준을 둬야 한다. 3 대적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되었지만, 예루살렘과 유다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대적들의 위협은 여전히 존재해 있었다. 성벽을 재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운 성벽을 잘 지키는 것, 즉 그 안에서 믿음 공동체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에 느헤미야는 최우선을 두었다. 성벽과 성전 관리자와 성읍 책임자를 세우고, 성을 보호하기 위한 수칙을 세우고, 경비를 강화했다. 주의 일을 맡은 자들은 충성되고 경건해야 한다(2; 엡4:6; 빌2:2-4). 2024년 예배행진을 다시 묵상하고 그렇게 살아가자! 주님, 믿음으로 살기위해 영적 경계를 늦추지 않고 항상 깨어 ...

2024.9.10 (화) 느6:1-14

Image
2024.9.10 (화) 느6:1-14 믿는 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부르신 자에 의해서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항상 주님이 세우신 자리에 있어야 한다. 만약 그 자리를 벗어나 자기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사탄의 세력들이 놓은 무서운 올무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1 유다의 대적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성벽 건축이 착실히 진행되어 완공을 눈앞에 두자 다시 공격을 시도한다. 공동체 전체를 공격하기보다는 느헤미야 개인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리더십을 위해 공동체는 끊임없이 중보해야 한다. 대적들이 느헤미야를 유인해서 죽이려 했지만, 느헤미야는 이들의 음모를 알고 지혜롭게 대처했다. 저들의 음모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실한 목적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선순위에 따라 일할 때 헛된 일에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따라 행할 때 지혜를 갖게 된다. 2 대적들은 거짓 소문으로 모반의 누명을 느헤미야에게 씌우려 했다. 봉하지도 않은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그들이 꾸민 내용이 백성들 사이에 소문으로 퍼지기를 기대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일일이 산발랏의 모함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느헤미야는 동기와 목적이 순수했기 때문에, 대적들의 선동은 아무런 효과를 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어떤 역경에 부딪혀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느혜미야는 기도를 통해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믿음의 본을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이다. 3 대적들은 새로이 거짓 선지자를 매수해서 유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느헤미야로 올무에 빠지게 하려는 세번째 음모를 꾸몄다.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음모는 결코 중단되지 않고 갈수록 간교해지는 속성이 있다. 얼핏 들으면 스마야의 말은 대적들에게서 위협받고...

2024.9.9 (월) 느5:14-19

Image
2024.9.9 (월) 느5:14-19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부르짖음으로 드러나게 된 유다 공동체의 위기를 해결한 느헤미야는 총독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정확히 행했는지를 고백한다. 그의 행위를 통해 그의 마음에 있던 의로움을 엿볼 수 있다. 1 총독의 위치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녹조차 거절한 사실은 참다운 지도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백성들의 형편을 헤아려 마땅히 누려도 될 권리까지도 희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당하게 착취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것을 놓지 않으려는 지도자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가기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앙의 결단이 아니고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을 이끄는 리더라면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하든지 먼저 자신을 희생하면서 하나님의 영광, 복음의 진전, 믿는 자들의 형편, 또 공동체 전체의 유익 같은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2 느헤미야는 총독의 녹을 받지 않고(14),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고(15), 개인 소유의 땅을 사서 부를 늘리지 않고(16), 자비량으로 손님을 대접하고(17-18), 오직 하나님만 의뢰했던 것(19)은 요즘 시대 그 어떤 정치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아니, 거의 반대의 경우만 본다. 단지 몇 년만 정치인을 해도 재산을 몇 배나 불렸다는 것이 현대의 작태다. 느헤미야는 세상의 잣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신전의식 (코람 데오)’을 가질 때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복음에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주님, 위로부터 나리는 풍성한 보상과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위로와 기쁨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