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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수) 계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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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수) 계2:1-11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살펴보면, 현대 교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에베소, 서머나 교회에게 주어진 말씀은 이 땅에서 교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 1 예수님은 교회의 주권자이시며 교회 가운데 계신 분이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영적 전투를 잘 감당해 왔음을 인정해 주신다. 에베소는 소아시아를 관할하는 로마 총독부가 있는 큰 항구도시로 행정, 교통, 무역의 중심지였고, 황제를 섬기는 6개의 신전과 함께 아르테미스를 비롯한 많은 이방 신전이 있던 곳이었다. 이른 곳에서 신앙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지만, 에베소 교회는 부지런히 수고하고 인내하며 특별히 거짓 선생들을 용납하지 않았다(2-3). 바른 교리와 거룩한 행실을 지키게 하는 것이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바다. 2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지키지 못했다. 안밖으로 열심히 싸우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원래 지점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며, 그러지 못하면 교회의 촛대를 옮긴다고 하신다 (5). 교회가 사랑을 잃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내부의 사랑을 지키며 실천한다면, 그 교회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과 같은 이상적인 교회일 것이다. 이런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꿈꾸며 성장해 가자. 3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3:7-13)와 함께 책망이 없는 교회다. BC600년에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약 300 년 후에 재건된 도시여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연상시키는 곳이다(8b). 예수님께서 ‘처음과 마지막’이란 말씀은 구약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란 뜻이기도 하다(8; 사41:4; 44:6; 48:12).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이라고 일갈하시며(9), 두려워하지 말라고 독려하신

2024.11.19 (화) 계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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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9 (화) 계1:9-20 계시록은 5개의 찬양 본문(4:8-11; 7:10-12; 11:15-18; 15:3-4; 19:1-8; 22:8-9)이 구분점의 역할을 하여 총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예외: 5:9-14). 제1막 (1:9-4:11)은 요한이 인자와 같은 이, 곧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당했다. 고난 가운데 있었던 요한은 어느 주일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는다. 이후에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명령이었다 (10-11). 비록 교회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은 교회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2 뒤를 돌아본 요한은 일곱 금 등대를 본다. 그런데 그 등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예수님이 계신다(13). 교회 가운데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보여 준다. 여기서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현들을 반영한다(13-16; 사49:2; 겔43:2; 단7:9; 10:5-6). 지금도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인 교회 가운데 계시며, 여전히 우리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 3 요한이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이다(17). 예수님은 그에게 오른손을 얹으심으로써 능력을 부여하시고 사명을 주셨다.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히 살아 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 즉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에 우리의 모든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18). 예수님의 오른손, 능력의 손안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 나아가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별과 일곱 등대가 있다(19-20). 우리의 삶과 죽음은 예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우리는 사명을 받은 자답게,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주님, 밧모섬에 있었던 요한처럼, 비록

2024.11.18 (월) 계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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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8 (월) 계1:1-8 수많은 거짓 가르침과 이단이 요한계시록을 마음대로 해석하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 요한계시록을 가까이하며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는 인류의 기원을 모르고, 사후 세계를 두려워하는 유한한 인간일 뿐이다. 이런 한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본문은 예수님이 처음이요 나중 되신다고 밝힌다. 1 요한계시록의 표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이는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셨고, 다시 예수님이 보내신 천사가 요한에게 전달했다(1). 요한은 자기가 본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거를 예수님의 종들에게 증언하기 위해 계시록을 기록했다(2). 요한은 ‘때가 가깝다’ ‘속히 일어날 일’이라 표현하면서 임박성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나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진 말씀이다. 2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로 보낸 서신이기에 당시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 먼저 말씀을 볼 필요가 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 땅의 임금들의 머리라고 말하며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단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어 그분을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한다. 3 요한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얼마나 큰 영광을 가졌는지 밝힌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죄에서 해방시켜 제사장 나라, 곧 교회로 세우셨다(5-6; 출19:5-6). 비록 그리스도인들의 분포가 작고 교회도 약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예수님이 구름,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그때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그 앞에서 애곡하고 교회가 가진 영광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7). 이 모든 일은 세상을 주관하시고 처음과 끝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날 것이다(8). 주님, 악하고

2024.11.16 (토) 시7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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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6 (토) 시72:1-11 시편 제2권의 마지막 시편인 72편은 ‘제왕시’로 알려져 있다. 왕의 대관식 축제에 쓰였던 것으로, 왕이 견지해야 할 철학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1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신하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시인은 새롭게 세워지는 왕, 곧 왕의 아들에게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왕은 자기 백성을 다스릴 때 사회적, 경제적인 ‘공의’를 따라야 하고, 사법적인 정의를 세워야 한다. 왕이 공의와 정의로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땅에 평화와 공의가 세워진다. 억울함이 없어야 하고, 궁핍한 자들이 압박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시는 원리이며,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 때 원칙으로 삼아야 할 가치다. 2 공의를 지키는 왕이 통치하면 백성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5). 성경의 공의는 벌하는 것보다 생명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시인은 온 세상에 비와 같이 정의가 임하면 그 ‘날’ 즉 해가 있는 동안에는 의인들이 흥왕하고, ‘달이 다할 때까지’ 즉 밤에도 평강이 풍성하리라고 노래한다(7). 그리스도의 통치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도록 부름 받은 성도는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남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정의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이루는 정의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3 시인은 왕의 통치가 이스라엘을 넘어 온 땅에 미치게 될 것을 노래한다(8). 이스라엘 왕 앞에 모두 굴복하며, 먼 곳까지 그 통치권이 미칠 것이며, 세상 모든 왕이 그 앞에 엎드리고,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 왕을 섬길 것이다(11). 사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보면 이 시는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를 성취하셨다. 또한 주를 믿는 자들에 의해 그분의 통치가 지금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권세를 선포하고, 생명을 구원하며, 공의를 세우는 사명을 성도가 감당할 때, 예수님의 왕권은 더욱 빛날 것이다. 주

2024.11.15 (금) 시71: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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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5 (금) 시71:14-24 평생토록 여호와를 의지해 온 노년의 시인은 71편 후반부에서 더 깊은 감사와 찬양을 주께 올려 드린다. 하나님이 자시의 찬양과 기도에 응답하셔서 자신을 보호하시며 끝까지 위로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1 본 시를 시작할 때 ‘주는 내 소망’(5)이라고 외쳤던 시인은 이제 ‘내게는 항상 소망이 있으니 내가 더욱 더 주를 찬양하겠습니다”(14)라고 결단한다. 오랜 소망이 이제 곧 이뤄지리라는 확신을 점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주의 공의와 구원을 종일 전하겠다는 것과(15), 주의 능하신 행적과 공의를 전하겠다는 것과(16), 평생 교훈하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한다(17). 시인은 백발이 되어도 주의 놀라운 기사들과 능력을 후대에 전할 것을 열망하며 간구한다(18). 이처럼 하나님을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2 시인은 주의 기이한 능력과 놀라운 기사들을 노래하면서 때로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결국에는 회복시키시고 주권과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한다(20).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더 높이시고 위로하실 하나님을 구하는 모습을 통해 계속 전진하는 믿음을 본받는다(21). 세월 지날수록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할 뿐이다. 믿는 자에게 노후대책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떠올리는 믿음의 기억력일 것이다. 3 시인은 마지막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프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의 영혼도 기뻐 소리친다(22-23).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찬양할 유일한 분이시다. 이제 시인은 그를 모해하려던 자들이 수치와 망신을 당할 것을 확신하며 시를 끝낸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통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을 되새기고, 자신의 여생에 함께하실 공의의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다. 그렇게 찬양하자. 그렇게 살아가자. 주님, 지금까지 돌보신 주님을 기억하고, 마지막까지 주님을 의지하고 찬양하는 더 성공적인 인생으로 펼쳐지도록 하나님을 찬양

2024.11.14 (목) 시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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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4 (목) 시71:1-13 본 시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신뢰해 온 연로한 시인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세월이 지나도, 나이가 들어도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겸손히 들려준다. 1 시인은 숱한 어려움을 기도로 통과했고, 지금도 여전히 고난 가운데 주를 의지하는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을 ‘숨을 바위’, ‘나의 반석’, ‘나의 요새’라는 표현으로 주를 높인다(3). 이는 평생 주를 의지했고 주께로 피했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여호와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현재적 기도인 동시에 평생 여호와를 의지했다는 믿음의 총체적 고백이다. 황혼의 믿음이 참 아름답다. 2 시인은 먼저 하나님이 이제까지 자기에게 어떤 분이었는지를 회상한다. 그는 ‘나의 소망’되신 여호와를 어려서부터 신뢰해 왔음을 고백한다(5-7). 그래서 그는 종일토록 찬양을 입에 머금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8). 그래서 그는 쇠약해져 가는 자신을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시기를 호소한다.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으니 건질 자가 없을 것이라고 대적들은 수군거린다(10-11). 사탄은 항상 거짓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를 깨뜨리려 발버둥을 친다. 시인이 노년에 겪는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평생 한결같이 그를 신실하게 대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기에 우리 또한 지금까지 의지해 온 주께 간절한 마음으로 속히 도와 달라고 외칠 수 있다 (신31:6; 수1:5; 히13:5). 주님,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요 도움이십니다. 주님만을 찬양합니다!

2024.11.13 (수) 시7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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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3 (수) 시70:1-5 시편70편은 40:13-17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다윗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에서 속히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시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겠다는 다윗의 신앙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1 ‘기념시’란 표제가 이 시에 붙어 있다. 하나님을 기억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할 때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마땅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다윗이 속히 자신을 건져 달라고 반복해서 외친다.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것은 순전한 믿음이다. 비빌 언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토록 절실하게 매달리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정하고 정의로운 성품을 기대하며 간구한다(2-3). 다윗처럼 나를 도우시는 주님, 공의로운 재판관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이제 다윗은 개인의 청원을 넘어 고난에 차한 자를 구원해 주심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이 기뻐하며, 크게 즐거워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한다(4).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는 찬양이 끊이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이 짧은 시 안에서도 구원을 반복해서 요청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를 듣는 모든 이가 알게 한다. 우리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성도는 오히려 하늘이 가깝고, 하나님이 크게 보이며 하늘 문이 열리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는 모든 이가 깨달아 알도록, 그렇게 광대하신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자. 주님, 말씀에 기록된 모든 명령을 ‘기억하며’ 순종하게 하셔서 항상 우리를 건지시는 주만 찬양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