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6 (목) 요18:28-40 이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 당하는 장면이 19장 중반까지 이어진다. 재판 과정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의 고발이 부당하고 위선적이며, 예수님이 진리의 왕이심을 볼 수 있다. 1 가야바 재판에 관해 요한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고, 다만 ‘가야바 집에서 로마 총독의 관저로 끌고’ 갔다고만 말한다(28). 유대인들이 관저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함이었다. 정결예식을 위해서는 이방인의 관저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고발하는 무고죄를 저지르는 그들의 모습을 요한은 고발한다(29). 그들은 이미 마음 속으로 예수님을 죽일 마음으로 사형언도가 가능한 재판정으로 온 것이다(31). 법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악한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넘쳐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공의는 반드시 실행될 것이다. 2 예수님이 정치적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인지 알고 싶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다(33). 이에 예수님은 자신의 통치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에 관한, 더욱 크고 진정한 왕권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 나라에 속한 자들만 진리에 속한 자들이 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다(36-37). 빌라도는 이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이냐’고만 묻지만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저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38). 불법적인 고발과 재판 속에서도 참된 왕권은 홀연히 빛났다. 3 예수님의 무죄를 알았던 빌라도는 더이상 유대인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유월절에 한 사람을 석방하는 관습을 좋은 핑계거리로 삼았다. 그러나 무지한 군중은 바라바라는 이름의 강도 살인자를 대신 석방할 것으로 요구한다(40). 성난 군중의 압력에 굴복해 공정을 버리고 정치적 안정을 택하는 모습은 선을 버리고 악을 취하며, 다른 이들을 협박해 죄에 동참시키는 것은 인간의 못된 본성이다(롬1:32). 이 부조리 속에서도 주...
2025.2.28 (금) 요16:25-33 예수님은 더이상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곧 닥칠 시험 앞에 흩어질 것과 당신이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실 것을 확실히 말씀하신다. 1 비유는 아는 사람은 더 잘 알도록, 반면에 모르는 사람은 못 알아듣도록 하는 화법이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때가 이르렀기에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의 특권과 능력을 다시 확인시켜 주신다(26). 성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사랑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 기도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통로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통로요,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을 주고받는 통로가 된다. 2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시자(28, 제자들은 ‘지금에야’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부분적인 이해였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벌써 왔다”(32)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제자들의 약한 모습을 예언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뿔뿔이 흩어진다(마26:56).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라고 하신다. 우리의 믿음은 불완전해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신실하게 도우신다. 3 예수님은 긴 고별 강화를 마무리하시면서, 환난의 때에 담대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다. 바로 ‘주 안에서’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에 성도는 담대히 세상과 맞서며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자. 담대하십시오!! 주님, 연약한 우리에게 주시는 강력한 승리의 메시지를 의지해 담대히 환난을 이겨 나가게 하소서!
2025.3.28 (금) 민6:1-12 이스라엘에 요구되는 것은 강한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잘 지키는 것이었다. 나실인의 목적은 거룩한 사람의 모범을 보여 주어 공동체 전체의 거룩한 삶을 고양시키기 위함이다. 1 ‘나실’인 (히. 나지르)’은 ‘서원하다’, ‘구별하다’, ‘바치다’등의 의미를 가진 어원을 가진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도 한시적으로 높은 수준의 거룩함을 지키기로 결단하는 것이 나실인 서원이었고, 여성에게도 열려 있었다(2). 나실인으로 서원한 사람은 서원한 기간 동안 술과 식초를 금해야 했고, 포도는 가공한 것도 먹어선 안 된다(3-4). 이처럼 철저히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2 나실인은 몸을 제물로 바칠 수 없기에, 머리털을 자르지 않는 것으로 표식을 삼았다. 서원한 기간이 끝났을 때 그동안 기른 머리털을 밀어 화목제물과 함께 제단에서 태워 바친다(5, 18). 서원기간 동안 대제사장에게 해당될 만한 거룩함을 실천해야 했다(6-7; 레21:10-12). 나실인이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가 없어 보여도,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에 있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의 권능이 의로움과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다. 3 서원한 기간에 의도치 않게 거룩함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그 머리카락은 더러워져서 하나님께 바칠 수 없기에, 7일 동안의 정결 기간을 보내고, 마지막 날에 머리카락을 밀고(9), 8일째 날에 새 두 마리로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 죄를 속하여 머리를 성결하게 하고(10-11),1년 된 숫양으로 속건제를 드림으로 나실인 서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12). 그렇기에 나실인은 혹시라도 부정한 것에 접촉되지 않도록 늘 신경을 써야 했다.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자신을 성결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주님, 우리도 나실인처럼 성결하게 살아갈 때 주께서 우리에게도 능력 주셔서 세상을 이기...
Comments
Post a Comment